[도서]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이은주, 김그루, 또뚜야, 김다솜, 박신, 최석,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 한겨레출판, 2025
끝내 실현된 노동자 양회동의 당부
뜨거운 여름, 서울 한낮 기온 36도까지 치솟는다는 예보다. 뉴스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데 무더위 소식보다 더 덥게 만드는 소식도 눈에 띈다. 오늘이면 파면 당한 전직 대통령의 재구속 여부가 결정된다 한다. 진작 감방에 있었어야 할 그가 반바지 차림에 개 끌고 다니는 꼴을 보면서 열통이 터졌던 지난 몇 달이었다. 검찰 조사, 특검 조사도 나가지 않거나 비공개 지하주차장 출두를 하겠다며 별 생쇼를 해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내란죄 말고도 특검이 제시한 구속 추가 사유는 체포영장 집행 저지, 국무위원의 심의권 침해, 사후 계엄 선포문 작성, 비화폰 기록 삭제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구속 여부와 관계 없이 그의 죄목은 더 많이 덧붙여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중 가장 앞서 물어야 할 죄가 있다면 건설노동자들을 폭력배로 몰아붙이면서 노동조합 말살을 획책했다는 죄다.
윤석열은 2년 5개월 전인 2023년 2월 21일 국무회의에서 ‘폭력과 불법을 보고서도 이를 방치한다면 국가라고 할 수 없다’며 건설 현장의 폭력을 ‘건폭’이라 명명했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경찰청, 국토교통부, 법무부, 고용노동부가 ‘건설 현장 불법·부당행위 근절 대책’을 발표했고 전국 건설 현장에는 “채용 강요 등 조직적 불법 행위 정부 합동 특별단속 실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법무부 장관 한동훈은 경찰청과 함께 ‘건폭수사단’을 출범하고 단속하겠다고 보고했다. 경찰들에게는 1계급 특진, 50명 포상을 내걸었다. 경찰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전국 각지의 사무실이 총 22차례의 압수수색을 받아야 했고, 총 2,250여 명의 노동자가 소환 조사를 받았으며, 그중 42명이 구속됐다. 탄압이 한창 진행중이던 와중이었던 2023년 5월 1일, 노동절 집회장에 건설 노동자 양회동 열사의 분신 소식이 전해졌다.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 양회동 역시 2월부터 ‘업무방해 및 공갈’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았고 4월 26일에는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그는 건폭 몰이에 앞장선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동갑이다. 5월 1일 당일, 그는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강릉지원 앞에서 그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양회동 열사는 유서에서 “먹고 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네요.”라면서 “윤석열의 검찰 독재 정치, 노동자를 자기 앞길에 걸림돌로 생각하는 못된 놈 꼭 퇴진시키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꼭 만들어주세요.”라고 당부했다.
그가 하늘로 떠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지난 2025년 4월 4일 11시,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은 탄핵됐다. 거짓말처럼 윤석열은 퇴진됐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거짓말 같은 일은 일어날 리가 없다. 그리고 열사가 분신할 때 현장에 건설노조 간부가 말리지 않았다고 써갈겨댄 <조선일보> 사회부장과 기자도, 그 악의에 찬 보도를 인용한 국토교통부 장관 원희룡도, 법원의 CCTV 영상을 유출한 ‘성명 불상자’도 처벌 받지 않았다. 2년에 걸쳐 수사를 했다면서도 경찰은 이 모두에 면죄부를 주면서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노동자로 살아가기
<한내레터>에서 건설 노동자를 다룬 책으로 목수 송주홍이 쓴 ⟪노가다 칸타빌레⟫(2021, 시대의창)와 ⟪노가다 가라사대⟫(2022, 시대의창)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형틀 목수로 일하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노가다’라는 멸칭을 자긍심으로 역전시켜 내면서 노동의 일상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이 책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한겨레출판, 2025)는 이 몇 년 사이 ‘건폭’이라는 낙인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일하고 싸워왔던 건설노동자 12명의 증언을 엮은 책이다. 이들 12명은 모두 건설 현장에 있지만 처지도 다르고 직종도 다르다. 여성 노동자도 있고 이주 노동자도 있다. 굴착기, 덤프, 레미콘처럼 건설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도 있고, 철근, 형틀, 알폼, 갱폼, 비계, 타설, 내장 등 저마다의 공정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공사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 노동자도 있지만, 이제 현장에 들어온지 몇 년 되지 않는 20대 노동자도 있다.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는 윤석열 정부의 탄압이 지속되던 2023년,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마창산추련)이 기획해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연재 기사가 바탕이 되었다. 이주 활동가, 인권 활동가, 그리고 <경남도민일보> 기자 셋이 나눠서 노동자들을 인터뷰했고 그 기록을 글로 옮기고 다듬었다.
저마다 건설 현장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사연은 달랐다. 군대 다녀와서 우연히 시작했다거나, 이혼 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철근 일을 시작했다거나, 고국 베트남을 떠나 몇천 만 원의 소개비를 지불하고 이역만리 한국에 왔다가 우여곡절 끝에 알폼 일을 시작했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 사연 하나하나가 다 신산(辛酸)하지만 또 어찌 보면 가까운 이웃 누군가의 이야기인 것처럼 낯설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의 노동, 어떤 일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자면 아파트나 빌딩 한 채가 완성되어 간다. 빈 땅에 굴착기가 땅을 파 덤프에 실어 옮기고 아래서부터 기둥과 벽체, 보를 만들기 위해 거푸집을 만들고 그 안에 철근을 엮은 다음 콘크리트 펌프카가 와서 타설을 한다. 레미콘이 부지런히 오가고 타워크레인은 쉴 새 없이 이것저것을 나른다. 한 층씩 올라가기 위해 알폼, 유로폼, 갱폼으로 거푸집을 만들고 그 주위에는 ‘허공에 길을 내기 위해’ 날아다니는 계단, 즉 ‘비계’를 설치한다. 그렇게 한 층씩 올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2~3년에 걸쳐 건물을 세우면 ‘내장’을 맡은 노동자들이 들어간다. 할석, 견출, 창호부터 시작해서 벽돌쌓기, 미장, 방수, 타일 등 다양한 공정을 통해 우리가 살 수 있는 아파트의 모양이 비로소 갖춰지게 되는 것이다.
공정은 다양해도 노동자들을 대하는 원청사와 종합건설사의 태도는 똑같다. 하도급에 하도급을 내리면서 단가를 후려치고, 노동 강도를 높이기 위해 일당제 말고 도급제, 탕뛰기를 강요한다. 건설기계 임대료를 30일마다 지급하지 않고 60일, 길게는 90일마다 주거나 현금 대신 어음을 지급했다가 부도 내고 사라지기 일쑤다. 몇달 치씩 임금이 체불되거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현장에서 다치기도 한다. 직종을 떠나 이 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여러 계기를 거쳐 노동조합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노동조합이 바꿔낸 현장, 건폭몰이가 뒤집은 현장
노동조합은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싸웠다. 또 체불된 임금도 받아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었다. 일자리가 확보되었을 때도 당장 일 안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기회를 줬다. 그래서 더 조직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 보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고 노동강도 강화에 맞서 제때 퇴근하고 제때 쉴 수 있도록 요구했다. 퇴직 공제금 제도, 휴일수당, 일요일 휴무 등도 노조가 만들어냈다.
“노조가 현장을 정말 많이 바꿨어요. 기본적으로 하루에 10~12시간 이상 일하던 노동 시간이 단축되어 일 마치고 집에 가서 쉴 수 있는 게 저는 제일 좋더라고요. 또 주말에 일 안 하니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요… 옛날에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 한여름에 쉴 수 있는 휴게실, 샤워실 같은 게 없었어요.” (119쪽)
그러나 윤석열의 건폭몰이는 다시 건설 현장을 몇 년 전, 몇십 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탈퇴한 조합원들은 늘어났고 노동조합이 조직력이 약화된 만큼 현장에서는 사측이 노동자들을 몰아세우고 제 멋대로 했다. 잘 지내던 회사들과도 틀어졌고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노조 방송차를 운전하는 데도 눈치가 보였다.
노동조합 활동에 앞장선 사람들은 양회동 열사처럼 경찰서나 광역수사대에 수사를 받기 위해 불려다녀야 했고 폭력배 양아치 취급을 받았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같은 건설 일을 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경찰서에 불려와 수사를 당하기도 했다. 폭력을 행사하지도 협박한 적도 없지만 경찰은 ‘건폭’으로 벌써부터 결론 내고 막무가내로 몰아붙였다.
“2022년 초 한 건설사에서 우리 조합원들과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어요. 노조에서는 안 될 게 없잖아요. 그러라고 했죠. 건설사랑 팀장이랑 단가부터 조합원 고용까지 대략적인 교섭은 전화로 이야기가 끝난 뒤였어요. 그래서 저희가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했죠. 그게 다예요. 근데 사측에서 그거를 공동 협박(두 명 이상이 계획적으로 공모한 협박)으로 고소한 겁니다.” (김태훈, 139쪽)
구속돼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양회동 열사의 자결 소식을 들은 노동자도 있었다.
“2023년도 5월 2일. 아마 제 평생 잊지 못할 날일 겁니다. 이날 오전 10시에 면회를 갔어요. 그때 처음 들었죠. 양회동 열사가 분신했대요… 탄압을 받으면서 참 억울하다 생각했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뭔가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법원 판결만 바라보고 있었죠. 근데 그 사람은 자기 목숨을 바쳐 목소리를 낸 거고… 저는 그럴 용기가 없었어요. 한동안 건폭, 건폭 소리만 듣다가 건설 노동자, 건설노조 이야기로 관심이 옮겨간 것도 열사 덕분인 거죠. 출소하자마자 양회동 열사 묘소에 찾아갔어요. 그때는 묘비명도 없었어요. 저랑 와이프는 아무 말도 못하고 10분 넘게 울기만 했어요. 끝내 한마디도 못했어요. 미안해서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김용기, 41쪽)
건설노동자, 그 이름을 찾기 위하여
뜨거운 여름, 서울 한낮 기온 36도까지 치솟는다는 예보다. 뉴스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더위보다 더 숨막히는 죽음의 소식이 들려온다. 7일 경북 구미의 한 아파트 공사장에서는 스물세 살 베트남 이주노동자가 앉아 있는 채 숨졌다. 어제 구미의 낮 최고 기온은 37.2도였다. 온열질환으로 추정된다는데 숨진 당시 그의 체온은 40.2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날 첫 출근했다.
그의 죽음은 고승이 앉은 채로 입적한다는 좌탈입망(座脫立亡) 같은 죽음이 아니었다. 타살 당한 것과 다름 없다. 그렇다면 그를 죽인 것은 무엇인가? 무더위인가? 폭염인가? 기후 위기인가? 아니다. 노동조합이 힘이 있었다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노동조합이 최소한의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 힘이 완전히 복구되지 못했다. 한 타설 노동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근데 ‘건폭’ 프레임에 갇힌 뒤로는 노조의 목소리는 깡그리 무시됐죠. 이제 현장에 찾아가면 만나주지도 않아요…… 노조가 그래도 힘이 좀 있었을 때는 달랐어요. 미리 6월, 7월에 공문을 보내요. 곧 한여름 다가오니까 열사병 환자 안 생기게 그늘막 좀 설치해 달라고요. 그러면 회사에서 그늘막 옆에 아이스박스까지 가져다 놨어요. 이게 과도한 요구고 협박입니까?” (김용기, 42~43쪽)
점심 먹고 그늘막에서 쉬면서 아이스박스에 담긴 시원한 물과 음료를 마셨다면, 에어컨이 설치된 휴게실에서 일하는 틈틈이 짬을 내 쉴 수 있었다면 스물세 살의 베트남 이주 노동자는 무사히 퇴근하고 첫 출근한 날의 평온한 저녁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체감온도 31도 이상의 폭염 작업 시, 물·그늘·휴식 제공, 온도계 설치, 작업시간 조정, 휴게시설 설치 등의 조치를 의무화했다. 올해 6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허나 이 같은 법은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 법을 강제해낼 노동자의 힘, 노동조합이 무력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시간은 갔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울타리인 노동조합을 ‘카르텔’로 매도하던 그 정권이 먼저 몰락했다. 내일 당장 윤석열이 다시 감옥에 들어가는 희소식이 전해지기를 고대한다. 아직 건폭 몰이의 악몽이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지만 건설노조는 다시금 안전화 끈을 고쳐매고 있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아직 섣부르게 희망을 장담하지는 않지만 건설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나아질 거라는 낙관을 버리지는 않는다. 정당하게 땀흘려 일한 만큼 가져가는 건설 일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진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아버지, 어머니의 일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제가 공사한 건물이 보일 때면 “저거 아빠가 한 거다”라고 말하곤 해요. 해운대 49층짜리 고층 아파트도 가리키면서 “아빠가 일했던 곳이다. 저 안에 벽도 세우고, 건물 만드는 일도 하고 그랬다” 하고 이야기할 때도 많아요…… 저도 고등학교 1학년생 아들에게 “나중에 아빠 밑으로 와라… 아빠가 가르쳐줄게” 이렇게 말해요.” (김부생, 128~129쪽)
“내가 일했던 현장에서 아파트가 완성될 때 만족감도 있어요. 철근이 건물의 뼈대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빠지면 저렇게 높이 올라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 짓고 나면 뿌듯하죠… 노조가 우리를 대변하니까 그나마 인식도 조금씩 나아졌죠.” (이도연, 64~65쪽)
보다 희망을 그릴 수 있는 미래가 온다면, 노동자들은 ‘노가다’라는 멸칭, 현상 수배범 전단에 ‘노동자풍’(214쪽)이라고 쓰이는 사회적 편견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평범해질 수 있을까? “제 삶의 목표는 평범하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제일 힘든 것 같더라고요.”(김준영, 214쪽)라는 담담한 읊조림이 실현될 수 있을까? 노가다가 아니라 기술자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김부생, 128쪽)는 이들의 목소리, 그러나 “오랫동안 노가다였다가 이제는 노동자가 되나 했더니 도로 건폭이 되어버렸습니다.”(김중근, 183쪽)라고 자조하는 것이 아직 오늘의 현실이다.
하지만 건설 노동자들에게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세월에도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이름들이 있다. 안동근, 하재승, 주민칠, 하중근, 정해진, 하태훈, 조현식, 이기수, 그리고 양회동. 9명의 열사들과 조합원들이 만들어 온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 존엄성도 사라지지 않는다. 남들이 노가다, 건폭, 뭐라고 부르든 간에 건설 노동자의 노동, 삶, 투쟁은 이 무더위보다 더 뜨겁게 이어질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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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돌규는 노동자역사 한내의 운영위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