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직후, 자본주의가 심각한 존재론적 위기를 맞았을 때, 자본주의는 그에 대응하기 위한 이중 전략을 채택했다. 첫째로, 자본주의는 전혀 근거 없는 '공산주의 공포(Red Scare)'를 조장하여 국내 노동계급을 공포에 몰아넣고 체제에 순응하게 했다. 둘째로, 자본주의는 자신들의 운영 방식에 일부 조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네 가지 조정은 다음과 같다. 형식적 정치 탈식민화, 보통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통치 도입, 대량 실업 해소를 위한 케인스주의적 ‘수요 관리’ 수용, 그리고 복지국가 조치의 도입이었다. 특히 서유럽에서 복지국가 조치가 광범위하게 도입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변했다’, 더 이상 예전의 약탈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복지 자본주의’가 등장했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전후 장기 호황 동안 금융 자본이 힘을 키우고, 이 금융 자본이 세계화되면서 민족국가의 자율성이 약화하고 어디에나 신자유주의 체제가 강요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전후 조치들은 어차피 뒤집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역전 현상은 전례 없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대도시 자본주의가 지원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자행되고 있는 공개적 집단학살은, 그 잔혹성에 있어 식민지 시절에 필적하거나 그보다 더하다. 신파시즘과 부르주아 권위주의의 대두는 민중에게 허용된 민주적 공간을 약화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 위기는, 세계화된 금융 자본의 헤게모니로 인해 더 이상 케인스주의적 ‘수요 관리’ 방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복지 지출을 축소하려는 조직적 노력이 본격화하고 있고, 이를 통해 확보된 재원을 자본가들에게 이전하거나 군사비 증강에 투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7월 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에 서명한 후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출처 : 백악관의 X
도널드 트럼프가 발의하고 미국 상·하원 모두를 통과해 법으로 제정된 ‘아름답고 거대한 법안(big beautiful bill)’은 복지 지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다. 미국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추계 작업을 수행하는 의회예산처(CBO)에 따르면, 이 법안은 향후 10년간 총 4.5조 달러에 달하는 감세 혜택을 제공하게 되며, 그 주요 수혜자는 부유층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군사비는 총 1,500억 달러 증가하고, 이민자 유입을 막기 위한 ‘국경 안보’ 예산은 1,290억 달러 늘어나게 된다. 이 모든 지출은 메디케이드 예산 9,300억 달러 삭감, 그린 에너지 분야 예산 4,880억 달러 삭감, 식품 보조 예산 2,870억 달러 삭감을 통해 충당된다. 메디케이드는 노인, 빈곤층, 장애인 등 미국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을 돕기 위한 제도인데, 이 법안은 이를 축소함으로써 가장 무력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트럼프의 ‘아름답고 거대한 법안’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부유층에게로의 이득을 노골적으로 이전하는 조치다.
물론 감세 규모는 앞서 언급한 지출 삭감 규모를 훨씬 웃돈다. 그 결과 미국의 재정 적자는 향후 10년 동안 누적 기준으로 3.4조 달러 증가할 전망이다. 요컨대 미국 정부는 자발적으로 부채를 증가시키고, 자국의 복지 지출을 줄임으로써, 그저 미국 부유층에게 부를 넘겨주려는 것이다. 정부는 이것이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경제 회복이 목적이었다면, 정부가 차입한 돈을 직접 사용했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단지 이 구매력을 부유층에게 넘겨주고 있다. 이 조치가 경제를 자극할 효과는 미미할 것이며, 단지 부유층의 부를 무상으로 늘려주는 데 불과하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재정 적자 확대는 금융 자본이 싫어하는 조치다. 그 재정 적자가 부유층에 대한 이전 지출을 위한 것이라 해도, 금융 자본은 여전히 이를 반기지 않는다. 실제로 영국 전 총리 리즈 트러스는 이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금융 자본의 반발이 너무 거세서 파운드화 가치는 하락했고, 리즈 트러스는 사임해야 했다. 그 결과 그는 영국 역사상 재임 기간이 가장 짧은 총리로 기록되었고, 임기는 50일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금융 자본은 도널드 트럼프가 부유층에 대한 이전 지출을 위해 더 많은 차입을 하는 것을 용인했을까?
물론 트럼프가 재정 적자 확대를 완전히 무사히 넘긴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즉, 금융 자본이 트럼프에게 부유층에 대한 이전 지출을 줄이진 않더라도, 복지 지출을 더 삭감함으로써 재정 적자를 줄이도록 압박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 달러가 오늘날 지니는 특별한 지위 덕분에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갖고 있다. 세계 자산 보유자들은 여전히 달러를 ‘금’과 거의 동등하게 여기고 있으며, 트럼프의 재정 적자 확대에도 달러에서 이탈할 가능성은 작다. 이런 여유는 리즈 트러스가 영국 부유층을 위한 재정 적자 확대를 시도했을 당시에는 없었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지 지출 축소는, 머지않아 다른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2024년 6월 24~25일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모든 나토 회원국은 2035년까지 군사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대부분의 나토 국가들은 GDP의 약 2%만을 군사비로 지출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그보다도 적다. 즉, 특히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나토 회원국들은 향후 10년 안에 군사비 지출을 GDP의 2%에서 5%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그런데 다른 나토 국가들의 통화는 미국 달러에 비해 신뢰도가 낮기 때문에, 이들은 세계화된 금융 자본의 뜻을 거스르며 GDP 대비 재정 적자를 늘릴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유럽 나토 국가들은 유럽연합(EU) 소속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GDP 대비 재정 적자를 3% 이상 넘길 수 없다. 현재 그 수준도 거의 3%에 도달해 있다. 부유층에 대한 과세는 금융 자본의 반대 때문에 불가능하므로, 군사비 증액은 결국 이들 국가 노동자 계층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거나, 복지 지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토 동맹국들, GDP의 5%를 국방에 투자하기로 한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출처: NATO의 페이스북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두 가지 방식 중에서는 복지 지출 삭감이 상대적으로 더 쉽게 실행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결국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저하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GDP의 3%에 해당하는 추가 부담을 노동자에게 지운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요컨대 나토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복지 자본주의’ 시대가 끝났고, 세계는 다시 ‘약탈적 자본주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나토 국가들이 왜 군사비 증액을 결정했는가? 겉으로는 서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을 이유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른바 소련의 위협이 한창이던 냉전 시대에도 이 정도의 군사비 지출은 없었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연간 군사비는 유럽 내 나토 회원국 전체의 연간 군사비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국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위협’은 단지 명분일 뿐이다. 나토 국가들이 스스로 약속한 이처럼 급격한 군사비 증액은, 위기에 처한 서방 제국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 질서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국가들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란에 대한 폭격도 바로 이런 의도에 따른 것이었고, 향후 수년 동안 유사한 침략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선진국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누려온 복지 제도를 희생당하고 있다. 그러나 붕괴 직전의 제국주의는 극도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런 제국주의는 세계를 재앙으로 몰아넣을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핵 시설을 폭격하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 무모함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제국주의적 무모함에 맞서 전 세계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출처] Capitalism’s Rolling Back of Welfare Spending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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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