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방문 여성 노동자 83%, 화장실 갈까 물도 안 마셔

민주노총 여성 조합원 889명 설문…화장실 이용 제한으로 불안·우울·자학 호소

  접근이 어려운 화장실 [출처: 민주노총]

그동안 여성 노동자의 ‘화장실’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일터 내 화장실 문제가 조금씩 조명됐다. 민주노총 전국건설산업노조연맹 여성위원회는 2019년 건설의 날부터 건설 현장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 실태를 고발하며 화장실 설치와 함께 이용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4일 오후 2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여성 노동자 일터 내 화장실 이용 실태 및 건강영향 연구 토론’을 개최하며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의 화장실 이용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김규연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연구 배경에 대해 “화장실 문제는 인간으로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존엄의 문제이며 동시에 건강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임에도 일터에서는 고충처리 수준으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별거 아닌 일로 치부돼 노동환경 측면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다뤄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라며 “이번 연구를 통해 여성 노동자들이 ‘왜’ 화장실 접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화장실이 있더라고 ‘왜’ 사용하기 어려운지 등 일터의 화장실을 둘러싼 노동환경, 문화, 인식 등 여러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민주노총 14개의 산별 노조에서 총 899명의 여성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관리직, 전문(기술)직, 사무직, 생산직, 운수직, 건설직, 판매 및 대안서비스직, 청소·시설관리직 등 다양한 직종과 직군에 종사했다. 이 밖에 15개 산별 노조 출신 조합원, 장애인, 성소수자 등 40명에 대해선 면접 조사를 활용했다. 설문 조사는 지난해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됐고, 면접 조사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됐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근무 중 화장실 이용과 관련해 수분 섭취 및 음식물 섭취를 제한한다는 답변이 각각 전체의 36.9%, 30.3%로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화장실 이용문제로 수분 섭취 및 음식물 섭취를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화장실 이용이 어려운 노동자군의 경우 음식물 섭취 제한 경험이 74.5%에 달했고, 수분 섭취를 제한한 경험이 있다는 답변은 83.1%에 이르렀다. 화장실 이용이 쉬운 노동자군의 음식물 섭취 제한 경험은 17.8%, 수분 섭취 제한 경험은 23.7%로 나타났다.


‘이동·방문’군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반 이상이 화장실 이용에 불편을 겪고 있었다. 응답자의 57.76%가 근무 중 원할 때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 대체로 불가능하거나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답했다. 원할 때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사용 가능한 화장실이 너무 멀리에 있거나 인근에 없다’는 답변이 1순위였고, 2순위는 ‘사용 가능한 화장실을 찾기 너무 어렵다’, 3순위는 ‘화장실 시설이 더럽거나 불편해서 가고 싶지 않다’로 조사됐다.

또 계속 이동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개방형 화장실이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체 응답자의 86.34%가 외부 화장실을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외부 화장실 이용자들이 걱정하는 부분으로는 ‘원할 때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해 건강상의 우려가 있다(46.76%)’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비위생적 시설로 건강상 우려가 있다(41.73%)’는 답변이 그 다음을 차지했다. 이밖에 응답자의 62.28%가 ‘개방형 화장실이나 공중화장실에서 안전 문제를 느낀 적 있다’고 응답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 화장실 문제까지 이어진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여성 노동자들의 화장실 이용의 제한 문제는 고강도의 노동, 여성 노동의 저평가 및 성별 분리 배치 등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했다.

최소인원이 근무하거나 1인이 근무할 때 노동자들은 물 섭취를 최대한 제한하고 최대한 참는 방법으로 생리 욕구를 제한했다. 면접 조사 참가자들은 “전날엔 아예 안 먹거나 매운 것 등을 자제한다” “웬만하면 오전에 한잔 오후에 한잔 정도밖에 물을 안 마신다”고 증언했다.

면접조사에 응한 B씨는 “자리 비우는 것도 미안해서 눈치가 보이지만, 관리자가 여성분이라든가 이러면 조금 더 쉽게 편하게 말을 하고 갔다 올 수 있을 텐데 다 남자다 보니까”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응답자 H씨는 “여성이 워낙 많아서 여성 팀장이 많은데, 비율로 따지면 남성이 많다. 남성은 대부분 팀장, 부팀장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일터의 승진차별과 이로 인한 편파적 남성 관리자 분포 비율로 여성들은 화장실 이용에 애를 먹고 있었다.

토론자로 나선 권수정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사례를 언급하며 “남성의 몸을 기본값으로 설계된 라인에 소수의 여성이 일하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가 화장실, 생산현장의 노동환경에 대한 성인지 관점에서의 점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권 부위원장이 수집한 사례에 따르면 사례자 K씨는 2003년부터 2018년까지 생산라인에 존재한 유일한 여성 노동자였다. K씨는 처음 배치됐을 땐 여성 화장실과 탈의실이 없어 새로 만들어야 했고, 있어도 너무 멀어서 가기가 어려웠다고 밝혔다. K씨는 “여자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런 소리 듣는 게 싫어서 남성들이 한 대 처리할 때 두 대, 세 대 더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했다”라며 “주변에 같이 일하는 분들이 천천히 다녀오라고 해서 다행이었지만, 자주 갈 수는 없었다. 눈치가 많이 보였다”라고 밝혔다.

권 부위원장은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는 올해 전 공장에 여성 화장실을 추가로 설치하기 위한 요구안을 만들기 위해 실사 파악을 하고 있는데, 관련 기준이나 매뉴얼이 없어 수치화된 매뉴얼을 요구하고 있다”라며 “기아자동차지부에서 올해 사례를 만들면 금속노조에서 이를 확장해 전 사업장을 상대로 점검하고 요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수치화된 매뉴얼을 남기면, 이것을 근거로 법제화도 해 볼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화장실 제한, 건강에 직접 타격…산업안전법의 문제로 가져와야

화장실 이용 제약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엔 흔히 알려진 방광염 외에도 출혈성 방광염, (급성) 신우신염, 하혈, 과민성방광 문제, 월경 중 곤란함 등의 질환과 증상 등이 있었다. 몇몇 질환의 경우 치료를 위해 수분 섭취가 필요하지만 대부분 수분 섭취조차 제한적인 조건에서 근무해 치료가 어려웠다. 또 화장실 이용의 제한으로 불안, 우울, 자학 등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 응답자는 “커피 한잔 마셨잖아요? 그러면 그때는 괜찮아도 나중에 속으로 ‘미쳤지, 왜 먹고 내가 이 고생을’ 하면서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해요. 어떤 때는 두 번도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면 스스로 얼마나 자책을 하는지 몰라요. 너무 신경질이 나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또 그렇다고 쌀 수도 없고요”라며 화장실을 이용할 때 겪는 부정적인 감정을 호소했다.

또 월경으로 인해 불편함을 겪던 여성 노동자들은 완경을 ‘기쁜 일’로 여기며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월경, 임신, 출산 등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날 수 있는 몸의 변화를 고려한 화장실 환경과 이용조건이 조성되지 않은 탓이다.

김규연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노동강도 완화 ▲여성 노동자 건강문제에 대한 인식변화와 사회화 ▲법제도 기준 및 환경개선 ▲노동조합의 역할을 제언했다. ‘여성 노동자 건강문제에 대한 인식변화와 사회화’와 관련해선 “화장실 문제도 ‘건강권’ 문제라는 인식을 확대해야 한다. 여성질환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며 질병의 사회적 의미를 되찾길 바란다. 더불어 일터에서 ‘표준, 정상성’의 기준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오정원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여성의 급성, 단순성, 하부요로감염은 심한 통증과 배뇨증상으로 인해 환자들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도록 몸 상태를 악화 시켜, 직업을 가진 여성이 많은 현대사회에서는 삶의 질을 저하하는 중요한 질환 중 하나로 고려돼야 한다”라며 “비뇨생식기 개인위생 및 여성 비뇨기계 질환과 건강권에 대한 교육과 정보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여민희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재능교육지부 지부장은 이어진 토론에서 학습지 교사들의 화장실 이용 제약에 따른 질병을 소개하며 “학습지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여성질환과 비뇨 기계 질환도 산재 인정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 지부장은 “올해 7월부터 임의탈퇴 제한이 강화되는 산재보험법이 시행되어 더 많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산재보험 대상이 되는데 무엇보다 직군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으로 산재보험의 실효성이 강화돼야 한다”라며 “또한 산재보험을 적용받은 학습지 교사들이 계약해지의 위협 없이, 생계의 어려움 없이 요양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현정 민주노총 노동안전국장도 “28년 만에 산안법이 개정되었지만, 여전히 제조업, 남성 중심이라 폭넓게 제기되는 여성 노동자의 안전보건문제를 현재의 산안법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라며 “중장기과제 속에 노동강도 완화를 위한 해법을 고민하고 동시에 노동자 건강권 차원에서 화장실 문제를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의 문제로 가져와야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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