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타샤 할린스의 죽음과 투팍

[힙합과 급진주의]

  투팍과 라타샤 할린스. 사진은 합성된 것이다. [출처: https://2paclegacy.net/latasha-harlins-the-girl-who-died-with-two-dollars-in-her-hand/]

미국의 힙합은 살해된 사람들을 기리는 음악이다. 힙합의 역사를 만들어 온 위대한 래퍼들 중 살해된 사람을 추모하는 가사를 쓰지 않은 경우는 찾기 어렵다. 사실 힙합은 재능 있는 음악인들을 총격으로 가장 많이 잃은 예술 장르이기도 하다. 최초의 세계적인 랩스타 런디엠시의 잼마스터제이부터 뉴욕 최고의 래퍼 중 한 명인 노토리어스 비아이지, 올해 세상을 떠난 로스앤젤레스의 존경받는 래퍼 닙시 허슬에 이르기까지 젊은 나이에 살해된 힙합 음악인은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힙합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 투팍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강도에게 5발의 총을 맞고 겨우 목숨을 건지는 등 그의 삶에는 늘 총과 관련된 문제가 따라다녔고, 결국 그는 25세의 나이에 차량을 이용한 총격으로 살해당했다.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았던 그의 음악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그도 자신의 곡에서 여러 죽음을 추모했는데, 유독 그가 자주 언급한 한 사람이 있다. 15세의 나이로 사망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다. 할린스의 죽음은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졌지만 투팍만큼 이 사건에 큰 영향을 받은 래퍼는 없다.

투팍은 흑인 여성에게 바치는 자신의 대표곡 ‘Keep Ya Head Up’의 뮤직비디오를 할린스에게 헌정했다. 다른 곡에서는 “그 이름을 기억해야 돼. 주스 한 병 때문에... 죽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게 아니잖아”(Something 2 Die 4)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때로 그는 크게 분노했다. “뉴스에서 그 여자가 라타샤를 죽이는 모습을 봤지. 그리고는 엿 같은 세상이라고 소리질렀지.”(Hellrazor)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 할린스의 죽음은 투팍에게 참을 수 없는 부정의한 일이었고, 투팍은 그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할린스는 1991년 3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의 한 주류 판매점에서 총격으로 사망했다. 발포한 사람은 점주인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였다. 할린스는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가방에 넣고 카운터로 다가왔고, 곧이어 주스 값 계산을 두고 할린스와 두순자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할린스는 두순자를 두 차례 주먹으로 가격해 쓰러뜨린 후 가게를 나가기 위해 돌아섰고, 그 다음 두순자가 발사한 총알에 뒤통수를 맞고 즉사했다. 이 모든 장면은 가게의 감시 카메라에 녹화됐다. 법정에서 검사는 최고형을 구형했지만 1991년 11월 15일 판사는 두순자에게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투팍의 가사가 보여주듯 흑인 사회에서 이 사건은 무례하고 탐욕스런 한인이 무고한 흑인 소녀를 살해하고도 합당한 처벌을 피한 사건이었다. 할린스는 손에 돈을 들고 있었지만 두순자가 그를 도둑 취급했고 결국 돌아서 나가는 할린스의 뒤통수에 조준 사격을 가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리고 흑인들은 미국의 사법 제도가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오랜 의심을 다시 확인했다. 반면 한인들과 한국 언론은 이 사건을 다르게 바라봤다. 흑인 거주 지역에서 강도에게 시달리며 어렵게 장사를 하던 선량한 중년 여성이 공격적인 흑인 소녀에게 구타당한 후 정당방위 차원에서 총을 발사한 불행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인들은 허다한 한인 상점의 강도 피해에는 신경 쓰지 않던 지역 경찰과 언론이 선정적인 보도로 한인과 흑인의 갈등을 부추긴다는 불만을 가졌다. 양측의 불만은 모두 이해할 만한 근거가 있었고 해결하기에 문제는 너무 복잡했다.

할린스의 죽음과 판결은 이듬해 발생한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한 배경이 됐다. 사우스센트럴 출신 래퍼 아이스 큐브가 1991년 10월 발표한 ‘Black Korea’의 “흑인의 주먹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희 가게를 완전히 불태워 버릴 거야”라는 가사는 마치 몇 달 후 일어날 사건을 예견하는 듯했다. 물론 한흑 갈등이나 일개 래퍼의 노래가 폭동의 원인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례들이 폭발하기 직전인 인종관계의 일면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리고 1992년 4월 29일,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구타한 혐의로 기소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소속 백인 경관 4명에게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내렸다. 킹을 잔인하게 구타하는 백인 경관들의 모습이 목격자의 비디오에 촬영됐고, 모든 사람이 뉴스에서 영상을 본 상태였다. 바로 그날 흑인들의 분노는 폭동으로 번졌고 방화와 약탈이 시작됐다. 두순자의 가게도 불탔다.

법이 흑인을 보호하지 않는데 흑인이 법을 존중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 폭동 현장에 나가 보기도 했던 투팍은 다음해 발표한 곡에서 킹과 할린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 분위기를 묘사했다. “오랫동안 그들이 내 것을 빼앗았으니 내가 그들에게 빼앗을 때야.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지. 너희는 흑인들이 다 태워버릴 때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이제 부시도 충돌을 멈출 수 없지.”(I Wonder If Heaven Got a Ghetto)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콤프턴 출신 래퍼 켄드릭 라마의 묘사도 비슷했다. 폭동 당시 네 살이었던 그는 약탈한 텔레비전을 실은 차에서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냐고 아버지에게 물었고 이런 대답을 들었다. “꼬맹아 오늘은 가난한 사람이 부자야. 엄마한테 화염병 봤다고는 말하지 말고 만약에 엄마가 물으면 거짓말해야 된다.”(County Building Blues) 물론 이 대화는 라마가 재구성한 것이겠지만 자신이 자라난 환경을 묘사하기에는 충분했다.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폭동에서 사람들이 교훈을 전혀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라마는 이어지는 가사에서 “언젠가 네가 돈을 벌면 이 로드니 킹 폭동 같은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하기 보다는 여기 게토에다 써야 된다”라며 아버지의 말을 빌려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당시 논쟁적인 곡 ‘Cop Killer’로 경찰 살해를 선동한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던 서부 갱스터 랩의 거물 아이스 티는 소수자들의 단합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인들은 흑인 동네에서 있었던 약간의 지랄맞은 오해를 풀어냈지. 동양인들도 노예야. 이건 이 망할 성조기에 하는 말.”(Race War) 그는 이어 “시스템은 우리가 계속 서로의 목을 노리기를 원하지. 그러면서 세금도 내고. 흑인은 사실 소수자가 아니라 대단한 다수거든.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도록 하지”라고 주장하면서 동양인도 흑인이며 자신의 형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스 큐브는 한인들에게 사과했고 2018년 내한해 자신의 잘못된 옛 곡을 무르고 싶다는 사과를 전했다. 그렇다면 투팍의 결론은 결국 분노와 파괴였을까? 그의 사후에 발표된 ‘Thugz Mansion’에서도 할린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천국의 모습을 묘사하는 이 곡의 어조는 다른 곡들과 다소 달랐다. “어린 라타샤는 자랐네. 주류 가게 아주머니한테 자기는 용서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네.” 투팍을 잃은 후에야 이 가사를 확인하게 된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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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언가

    겉핥기 기사, 연구자가 썼으니까 음미주의 탐미주의가 되겠네요, 아니면 자신의 입장에서는 정통주의가 되는 것인가요. 힙합은 운율이 비틀어진 느낌이 강하지요. 한국에서도 그냥 죠크 음악이나, 스쳐지나가는 장르였던 것 같은데. 참세상 독자로서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었다 또는 애절한 역사와 사연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