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스 사전] 탄소중립

[이슈⑥]




미국의 경제학자 로널드 코스는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거래 비용’ 개념을 환경문제에 도입함으로써 기업의 불법행위 규제 문제를 이해당사자 간 갈등과 교환의 문제로 변형시켰다. 그전까지 환경오염에 대한 법적 책임과 처벌의 문제로 논의되던 공해 문제는 거래 비용 개념을 통해 각 권리 간의 경쟁, 갈등, 조정의 문제로 전환됐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강을 오염시킨다고 하자. 이때 제기되는 법적 문제는 기업 활동의 규제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영업권과 어부의 어업권 사이의 경쟁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업과 어부 사이를 조정하는 것이다. 만약 기업이 공해유발 영업으로 얻는 이득이 1000이고, 어부가 입는 손해가 200이라고 하면, 양자 사이의 조정은 어부가 200과 1000 사이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고 ‘공해배출권’을 기업에 파는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1)


이런 식으로 ‘맑은 공기를 호흡할 권리’와 ‘공해를 배출할 권리’는 상호 경합하는 권리로 나란히 상정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탄소중립위원회(탄중위)와 참여 인사들의 입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최근 탄중위 시나리오 발표 직후 윤순진 민간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석탄화력발전 사업자는 아무런 보상 없이 문 닫을 경우 소송을 준비한다고 한다. 환경단체들은 석탄발전소 문을 닫으라고 한다”라며, 탈석탄을 이해충돌로 설명했다. 지구 생명의 생존권과 기업의 영업권을 충돌하는 권리로 나란히 놓고 있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 간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관계를 모조리 시장의 이해관계로 환원시키면 국가와 정부는 왜 필요한 것일까? 법원과 중재소만 있으면 될 텐데 말이다.

코스의 논의에서 공해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이해관계자’ 또는 ‘갈등당사자’로 재규정된다. 당사자 간 합의가 성립하지 않을 경우 이 ‘비용-편익’ 계산에 근거해 권리 배분 역할을 가장 중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제3자에게 조정권이 주어진다. 그 주체는 법적 합의에선 판사고, 사회적 합의에선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민사회 인사’들이 맡게 된다. 노사갈등 중재라는 외양을 띈 노사정위원회 같은 기구에서는 정부가 조절자 역할을 맡는다. 그런 점에서 탄중위는 지금 두 가지의 종류의 중립을 추구한다. 하나는 지구공학적 중립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공학적 중립화다. 지구공학은 지구를 탄소로 가득 찬 텅 빈 곳으로 환원하고, 측정 저울 위에 배출량과 흡수량을 올려 뺄셈과 덧셈으로 제로(0)를 산출한다. 정치 공학은 기업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와 같은 저울에 놓고 비용과 편익을 계산한다. 위험은 탄소중립 개념 속에 이미 노정돼 있다.

그런데 최근 탄중위 시나리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탄소중립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데 주로 맞춰진다. 탄소중립을 달성하면 과연 괜찮은 것일까? 탄조중립을 달성하는 유일한 시나리오도 따지고 보면 산술적으로만 중립을 달성할 뿐, 그 방식은 탄소포집저장활용 기술(CCUS)처럼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또한 해외 탄소흡수원 개발이나 그린수소 수입 등 지금까지의 시장질서와 자본주의 성장체제의 지속을 전제한 것이다. 탄소중립을 안 하겠다는 시나리오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진보적 환경 운동 진영에서조차 탄소중립을 어떤 절대적 목표처럼 여기는 현실이다. 만약 탄중위가 지금과 같은 성장과 에너지 소비를 계속하면서도 기술개발과 해외 이전을 통해 탄소중립 달성 계획을 내놓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승인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정부가 유럽연합 정도로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높여서 탄소중립목표를 수립하면 그건 환영할 만한 일일까?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과 탄중위의 시나리오는 현재 정부, 기업, 시민사회 탄소 거버넌스가 공유하는 기본 관점과 전환 전략이 체제 전환도 정의로운 전환도 아닌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유럽 그린딜도 마찬가지다. 탄소중립은 지구를 살리는 목표가 아니라 국가 경제, 글로벌자본주의를 살리는 목표가 됐다. 이들의 탄소중립 목표는 자연을 자본에, 남반구를 북반구에, 생명을 이윤에 다시 종속시킨다. 이런 방향이라면 목표 수치를 높인다고 정의가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후위기 담론이 본격화하고 그린뉴딜이 떠오를 때만 해도, 기후에너지 전문가들은 ‘배출제로’와 ‘순배출제로(넷제로, 탄소중립)’를 분명히 구분했다. 지난해 총선 당시 녹색당의 그린뉴딜 정책에서도 목표는 탄소중립이 아니라 배출제로였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그 구분이 불명확해지더니 배출제로는 점점 약화하고 마치 탄소중립이 목표인 것처럼 돼버렸다. 왜 ‘배출제로’가 아니라 ‘넷제로’로 갔는지, 왜 ‘탈 탄소 사회’에서 ‘탄소중립 사회’라는 보다 타협적 목표로 후퇴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탈 탄소’는 화석연료와 탄소경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간명하게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탄소중립’이라고 하면 ‘중립’이 무엇인지부터 모호해진다. 혹자는 탄소중립까지 온 것도 성과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정말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단계적으로 ‘배출제로’를 향해 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둘은 전혀 다른 전환 설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출제로는 자본주의적 성장 자체에 대한 제동이고, 이는 체제 전환 없이 불가능하다. 반면 탄소중립은 기본적으로 성장도 지속하면서 기후위기도 막는다는 탈동조화 전략을 기반으로 한다. 즉 시장주의적‧기술주의적 대안들을 통해 중립(0)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IPCC도 이러한 기조하에 탄소중립을 “인간 활동에 기인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인위적인 이산화탄소 제거에 의해 지구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돼 순배출제로를 달성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인위적인 이산화탄소 제거’의 실제 내용은 현실 정치의 힘의 관계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시장주의적·기술주의적 상쇄가 탄소중립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탄소중립은 기후위기를 성장 기회로 삼으면서 체제 전환을 저지하기 위한 자본의 기후전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기업들이 앞장서서 ‘탄소중립 하자’라고 외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내가 아는 탄소중립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고? 처음 탄소중립 개념은 탈탄소화 계획안에서 탄소의 배출과 흡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로 설명됐다. 산업혁명 이후부터 누적돼온 온실가스를 감축하려면 지금부터 탄소 배출량을 급격히 줄여야 하고 동시에 지금까지 배출된 탄소도 흡수해야 한다. 그러니까 더 이상 배출을 안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지금 나와 있는 탄소를 흡수하는 방법도 같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탄소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숲을 복원하고, 면적을 늘리며, 유기농법으로 땅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도시에 더 많은 나무를 심고 녹지를 확장해야 한다. 숲과 초지, 경작지의 황폐화 원인은 물 부족과 직결되므로, 지하수 고갈을 막아야 하고, 강과 호수, 개펄, 습지를 회복하고 보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처럼 탄소 흡수를 자연흡수력을 높이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건 곧 자연의 회복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탄소중립은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됐다. ‘과거부터 배출된’ 탄소누적량까지 흡수해야 한다던 반성의 서사는, 지금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미래에 나올 기술로 상쇄시킨다는 시차모순적인 논리로 바뀌었다. 더 나아가 흡수가 가능하면 계속 배출해도 된다는 반성 없는 성장주의의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자연흡수력 증진은 자연의 회복이 아니라 자연을 흡수원으로 개발하는 채굴주의적 의미로 재정의됐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산림청의 산림 탄소중립화 사업은 ‘자연을 탄소흡수원으로 채굴하기’의 대표적 사례다. RHDD+같은 해외조림 사업이나 이산화탄소 포집 저장 이용기술(CCUS)도 마찬가지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근본 인식 자체가 변함없이 폭력적이라는 게 가장 문제다.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곳이 그냥 ‘매장지’가 아닌 누군가의 삶터고 일터였듯이, 탄소를 포집하는 곳, 저장하는 곳, 활용하는 곳도 ‘아무것도 없는 맨땅’이 아니다. 탄소배출권/상쇄권 거래제나 탄소국경조정 같은 시장적 수단은 이 거래에 필요한 탄소흡수원과 상쇄 수단을 더욱 빠르게 요구할 것이다. 탄소흡수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 개발도 더 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탄소중립은 기후정의 원칙을 파괴한다.

기업은 어떻게 탄소중립을 자기에게 유리한 서사로 변형시켰을까? 탄소의 배출과 흡수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고, 배출 억제와 흡수를 위한 회복 또한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누구나 인정한다. 이 ‘동시성’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성이 동시에 발생하는 책임의 동질적 시간 위에 놓인다. 흡수와 회복은 과거에 대한 책임이고, 배출 규제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다. 전자에는 피해 노동자, 민중, 지역에 대한 배상과 법적 책임이 따르고, 후자에는 향후 자본에 대한 규제와 민중 통제 계획이 따라야 한다. 두 방향의 책임성은 현재라는 시간 위에서 중첩되며 교차한다. 그런데 자본과 국가의 문법은 시간적 동시성을 상쇄하는 양적 등가성으로 전환한다. 동시성의 원리는 상쇄의 원리와 전혀 다른 것이다. 상쇄는 성찰적 시간성을 소거함으로써 ‘반성’의 고통 대신 대체물을 통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배출(포지티브)과 흡수(네거티브)를 각각 계량화해서 덧셈과 뺄셈의 계산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배출량을 내일의 흡수량으로 상쇄할 수 있고, 한국에서 배출하는 탄소를 외국에서 흡수해 상쇄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이런 계산법은 어제 먹은 고기를 오늘 먹은 채소로 상쇄하는 것이 채식주의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음과 양의 상쇄의 논리는 오늘날 환경문제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정치인들에게 과거의 공적은 현재의 과오를 상쇄시키는 수단이 된다. 탄중위에 참여하는 시민사회 위원을 비판하면, 그들의 환경운동 경력과 업적으로 현재의 정치적 잘못을 상쇄한다. ‘상쇄’는 채무와 채권, 비용과 편익을 등가교환 함으로써 책임을 말소시키는 합리적 기술이다.

이렇게 ‘탄소량’이 상쇄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면 왜 기후위기가 생겼는지에 대한 인과성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물음이 사라진다. 위기를 야기한 권력 관계와 지배 관계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계량화된 탄소량, 전혀 정치적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지표화 된 숫자들뿐이다. 이 숫자를 가지고 목표달성을 위한 시나리오를 만드는 작업은 경제 관료들이 경제지표를 가지고 시장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닮았다. 국가라는 공간에서 비정상적 탄소량에 개입하는 탄소조절 정책은 시장에 개입하는 통화조절 정책과 흡사하다.

탄소중립에는 상쇄의 함정 말고도 비율의 함정도 숨어있다. 배출량:흡수량이 동량으로 1:1이 되면 제로는 달성된다. 비율 계산에서는 쉽게 착시가 일어난다. 2:2든, 3:3이든 배출량이 늘어도 흡수량이 함께 늘어나면 비율은 변함없이 1:1이고 넷제로는 달성된다. 기업의 탄소 전략이 에너지 소비나 배출을 줄이는 것보다 흡수량을 늘리는 상쇄 기술에 주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비율을 통한 목표달성은 종종 목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교육부에서 전임 교수 비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며 그 비율을 대학평가지표에 반영하자, 대학은 교수를 더 채용하는 대신 비정규직 강사를 줄이는 방식으로 지표를 맞췄다. 이 비율은 전임 교수를 늘려도 높일 수 있지만, 강사를 줄여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율로 눈속임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은 NDC를 ‘2018년 대비 35% 이상’ 감축으로 규정하고 있다. 왜 ‘2018년’이 기준일까? 기준연도가 언제냐에 따라 퍼센트로 표시된 목표의 실제량은 달라진다. 탄소 배출량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해를 기준으로 잡으면 실제 감축량이 적어도 감축 비율은 더 높게 나타날 수 있다. 각국 정부에서 내놓는 NDC 기준연도가 다 다른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문재인 정부는 NDC 35% 감축 목표가 너무 낮다는 비판을 받자 얼마 전 대통령 지시로 35%에서 40%로 감축 목표를 올렸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향된 감축 분 5%는 국외감축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 5%는 탄소흡수원 개발 등 감축 인정 수단을 ‘외주화’함으로써 채워진다.

수량화와 도식화는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현실 왜곡과 은폐가 일어나고 때로는 폭력적인 형태로 도식이 적용된다는 사실이 쉽게 간과된다. 특히 그것이 누구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인지에 따라 보여주는 것과 은폐하는 것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걸 밝혀 다시 노동자 민중에게 필요한 가독성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시민과학자의 역할일 것이다.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수치화하는 것도 필요하고 참고도 해야 하지만 숫자가 사회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탄소중립의 수치화 기술들도 다르지 않다. 목표설정과 성과측정을 위해 배출량·흡수량의 계량화와 지표화는 필수적이지만 ‘그 숫자는 누구의 손에서 만들어지는가? 계량화의 방식은 적정한가? 시민들은 그것을 검토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은 모두 생략된 채, 마치 숫자 그 자체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소수의 전문가위원회에 심의하도록 넘겨진다. 전문가들이 생산한 수치가 제시되면 다음부터 시민사회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구상과 토론이 아니라 주어진 숫자들을 가지고 갈등하고 경합하면서 소모적이고 지난한 갈등 과정을 겪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은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35%에서 40%로 감축 목표를 상향한 것처럼 조삼모사식 눈속임으로 다른 선택지를 제시할 것이다. 주어진 수치 안에서 갑론을박하는 동안 정치는 사라지고 협상과 거래의 핑퐁 게임만 남는다. 여기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노동자의 기후 정치는 무엇보다 탄소중립이라는 합의정치를 가장한 조절주의와 등가성의 신화를 깨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건 NDC의 경합이 아니다. 목표달성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달성하는가이다. 우리의 목표는 탄소중립이 아니라 기후정의여야 한다. 지구 위에서 살아갈 권리와 지구를 파괴할 권리는 탄중위 같은 협의체 안에서 이해관계자들 간 조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러설 수 없는 요구는 협상과 거래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 지금 기후정의와 체제 전환은 바로 그런 요구다.



(1) 코스의 주장과 비판에 대해서는 알랭 쉬피오, 박제성 옮김, 《숫자에 의한 협치》(한울 2019) 제7장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기: 법경제학 비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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