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개인과 독립적 시민의 연대 공동체

(9)전국교수연구자 비상시국회의 ‘2017 새 민주공화국 제안’

한국은 지금 ‘헬조선’이라 불린다. 여성, 청소년, 노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실업자, 이주노동자 등 갈수록 늘어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한국이 지옥이 되었다는 말이다. 호혜와 연대는 간데없고 각자 도생으로 내몰린 나라, 갈수록 일자리 얻기 어려운 나라,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잃고서 알바나 장사를 하게 되면 생계유지가 어려운 나라, 복지혜택이 최악인 나라, 개별 가계의 빚만 늘어가는 나라, 그런 나라가 지금의 한국이다.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노동시간은 최장이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미국과 함께 수위를 다툰다. 2000년대 이후 자살률이 OECD 나라 중 단연 최고로 등극해 ‘죽음의 공화국’이 되었다.

  박근혜 탄핵한 날, 낱개의 촛불들 중 [출처] 사계

연대와 호혜 공동체의 해체와 ‘헬조선’의 등장

한국 사회가 ‘헬조선’이 된 것은 사회적 연대와 호혜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아 개인들이 의지할 데가 사라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개인들의 이런 사회적 고립은 전통적 공동체가 대부분 해체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자연적이고 전통적인 유대관계를 제공하던 공동체가 해체되면, 사람들은 상호 경쟁과 불신에 빠지고 소외를 겪으며 불안과 우울의 노예가 되기 쉽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가족이기주의가 유난히 팽배한 것도 연대와 호혜를 가능케 하던 공동체가 대거 해체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사공동체라면 지금도 있다. 최근 국정농단의 주인공 최순실의 변호인 이경재, 전 민정수석 우병우의 장인 이상달, 우병우의 가족회사 정강의 전무 이정국, 박근혜로부터 총리 지명을 받았던 국민대 교수 김병준, 국회 청문회에서 최순실의 ‘호위무사’로 나선 새누리당 의원 이완영 등은 모두 특정 지역 출신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연줄 네트워크는 전통적 공동체와 일면 흡사한 측면도 있으나 사익 추구를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동의 이익과 함께 호혜와 연대를 중시하는 전통적 공동체와는 성격이 크게 다른 배타적 이익공동체로 간주된다. 오늘날 과거의 전통적 공동체와 유사한 것이 있다면 이런 종류의 이익공동체가 아니면 회사나 학교, 공장, 군대, 정부조직 등 근대사회의 형성과 함께 만들어진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위계적 조직들이다. 동호회, 협동조합, 노동조합, 시민운동단체처럼 연대와 호혜를 지향하는 비전통적 공동체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사회적 영향력과 지배력이 무척 약하다.

자연 질서에 가까운 전통적 공동체는 서열이나 혈통에 따른 위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기본적으로 비민주적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회사나, 학교, 공장 등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근대적 조직들은 어떨까? 이런 조직들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가입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출생에 의해 소속되던 전통적 공동체와는 구성 원리가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조직들이 민주적이라고 보면 오산일 것이다. 근대적 조직들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위계적 명령체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근혜의 헌법 유린이 진행되고 있을 때, 청와대 참모진이나 정부의 고위관료 중 그것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고 나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오늘날 사회적 조직들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유로운 개인들이라기보다는 비민주적 명령체계에 예속된 종속적 개인들임을 말해주고 있다.

근대 사회에서 인간 주체는 개인임과 동시에 시민으로 살아간다. 개인이 공동체적 존재라면 시민은 사회적 존재다. 전근대에서는 사람들이 주로 개인으로서 공동체적 삶을 영위했다면, 오늘날은 시민으로서 소득, 안녕, 복지 등을 위해 근대 사회가 구축한 제도와 조직에 의존해야 한다. 이것은 근대 시민이라면 사회적 권리를 당연히 누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국인 가운데 그런 권리를 제대로 누리는 사람은 드물다. 무엇보다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하다. 2012년 말 한국의 인구 상위 1%의 소득은 전체 소득의 12.23%로 OECD 3위,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은 44.87퍼센트로 2위 수준에 이르렀다. 소득 불평등이 이처럼 심하면 사회적 지원을 받아야 할 사람도 많겠으나, 한국의 복지는 OECD 국가들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2016년 10월 발표 OECD의 ‘사회복지 지출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중 추산치는 10.4%로 회원국 가운데 34위였다.

사회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시민은 독립적 주체가 되기 어렵다. 특히 임금과 복지를 통한 소득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그럴 공산이 높다. 물론 국가권력에 의한 정치적 권리의 박탈도 독립적 시민의 출현을 막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하지만 소득을 확보하지 못해 생계의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면 독립적 시민으로 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민적 독립을 누리지 못하면 개인으로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지금 한국에는 그래서 자유로운 개인들이 아주 드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도 너무나 적다. 이는 지금 한국의 개인들 대부분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노동권과 ‘개인적 부’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개인’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저주받은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시민으로서 개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만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 각자가 시민으로서는 각종 불평등에서 벗어나 모든 사회적 권리를 누림과 동시에 개인으로서는 연대와 호혜가 가능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우리가 각자의 시민적 권리를 누리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무엇보다 노동권 강화가 중요하다. 그래야만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의 소수에 의한 사적 전유를 막아, 만인의 사회적 부 향유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분배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고,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진작해 생산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 노동권은 노동할 권리와 노동을 거부할 권리를 모두 포함한다. 노동할 권리는 안정된 일자리를 확보할 권리이자 사회적 부의 창조에 참여할 권리이며, 노동 거부권은 사회적 차별이나 생태파괴를 강요하는 부당한 노동, 자유시간을 앗아가는 장시간 노동 등을 거부할 권리다. 이 두 가지 노동권을 함께 확보해야만, 노동과정에 대한 민주적 생태적 통제와 생산된 부의 공정한 사회적 분배를 기대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혈연과 지연, 학연 등 태생적 조건을 기반으로 구성되는 전통적 또는 유사전통적 공동체를 대체해 새로운 호혜적 연대적 관계를 진작시킬 공동체를 건설하려면, 그런 활동의 주체가 형성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각자 ‘개인적 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 부는 개인으로 하여금 생존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물질적 토대에 해당한다. 자신의 원기, 안위, 능력, 여유, 행복의 증진을 위해 그런 토대를 확보해야만 개인들은 새로운 연대 공동체 건설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개인적 부는 이때 사적인 부와는 다르며, 사회적 부 즉 사회의 총 물질적 부 가운데 개인 각자가 청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으려면, 개인은 사회적으로 기여한 만큼,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만큼 사회적 부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 부는 임금 소득, 복지 소득 등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부는 시간적, 공간적, 주체적 측면에서 개인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 개인적 부는 개인의 자유시간을 확보해주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 평균보다 43일, 독일보다는 93일이 더 길다. 자유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면 노동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야 하며, 시간의 효율적 사용을 위한 사회적 시간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공간적 측면에서도 개인적 부를 확보해 합리적으로 사용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인격체로서 자신의 존재와 역능을 펼칠 수 있는 개인적 공간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이런 공간은 상품으로 작용하는 사적 공간과는 구분되며, 도로나 골목, 공원, 도서관, 문화센터 등 다양한 공적 공간의 확보에 의해 일부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개인적 부는 개인 자신의 인간됨과 역능 향상을 위한 물질적 비물질적 자원으로 쓰일 수도 있다. 이때 개인적 부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통한 주체성 구성의 물질적 토대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새 민주공화국에서 교육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비자본주의적이고 성평등적이며 생태적인 주체성의 형성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시민으로서 사회적 권리를 확보해 얻은 개인적 부를 바탕으로 시간적, 공간적, 주체적 자원을 넉넉하게 확보한 사람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개인이지만 오늘날의 ‘헬조선’에서처럼 사적인 개인으로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개인’으로 성장할 공산이 크다. 사회적 개인들이 많아질수록 사회에는 경쟁과 독점 대신 연대와 호혜가 중요한 원리로 작용할 가능성도 커진다.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공화국이 새롭게 탄생할 필요가 있다면, 바로 이런 주체들이 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시민적 연대 공동체’를 만들 사회적 조건

이제 민주공화국에서 새롭게 구성될 연대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먼저 연대공동체의 구성 주체를 생각해본다면, 방금 언급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그 중심에 서야할 것이다. 그런 개인들은 노동권과 개인적 부 확보를 통해 생계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자유롭고, 아울러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보편적인 시민적 권리로 확보한 독립적 시민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요구되는 연대공동체는 이런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연합으로 구성된 공동체일 것이다.

둘째 새로운 공동체는 전통적 공동체와도 달라야 하지만 근대적인 이익공동체와도 달라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 근대적 사회적 제도와 조직이 요구하는 삶과 연결됨과 동시에 구분되기도 하는 삶의 형태를 허용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가 출생에 의해 구성된다면, 새로운 연대공동체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가입과 탈퇴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연합이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명령에 의한 의무 수행을 해야 하는 조직이 아니라 개인 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체계가 되어야 한다.

셋째, 새 연대공동체는 전통적 공동체의 자연적 위계, 근대적 사회조직의 명령체계와는 다른 조직원리에 의해, 즉 연대와 협동의 원리에 의해 운영될 필요가 있다. 공동체는 이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서 민주주의의 생생한 실천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호혜적이고 협동적인 연대공동체가 구축되려면, 그 구성 및 존립 조건을 크게 개선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주체로서 개인과 시민이 공동체 건설과 운영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 제공이 필요하다. 이때 ‘자유’는 개인들이 시민적 주체로서 사회적 권리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어야만 충족될 것이다. 사회적 권리는 크게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원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공동체에 참여하는 개인이 그런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민주공화국의 법·제도적 지원 채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의 개인들은 한국사회를 ‘헬조선’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국인 전체가 한국사회를 자신의 사회로 수용하고 그 발전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려면, 이런 현실을 바꾸고 개인들이 사회로부터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권리와 혜택을 누리고, 원하는 만큼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사회를 건설하려면, 한편으로는 개인들이 독립적 시민으로서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타인과의 호혜적 연대적 관계를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들이 사적 개인에서 사회적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나아가 개인의 소외를 초래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특히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하는 개인들의 자율적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사회적 분배와 생산 과정에서 중대한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개인과 독립적 시민의 연대 공동체가 곳곳에서 만개하는 민주공화국 사회로 탈바꿈하고, 개인으로서든 시민으로서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주체적 삶을 목적 그 자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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