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깔깔 희망버스 출발

[파견미술-현장미술] 부산으로 떠나는 희망의 여정(3)


2011년 6월 11일, 드디어 희망버스가 출발 시동을 걸었다. 희망버스는 누구나 탈 수 있고, 무엇보다 해고노동자가 또 다른 해고노동자와 연대하고, 우리가 우리와 연대하는 버스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노동자들이 투쟁에 허덕이며 살길을 모색하기에 전전긍긍하던 시기였지만 해고노동자가 해고노동자와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상생하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희망버스에 시동을 걸기로 했다.

희망버스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파견미술팀이 한진중공업 방문 당시 찍은 사진들을 모아 웹자보를 만들어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메일을 돌렸고, 친구들에게 함께 가자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냈다. 출발은 어디에서 하고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만날지, 이동버스는 어떻게 꾸미고 버스 안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부산에 도착하면 영도 한진중공업까지 어떻게 이동할지, 김진숙이 있는 크레인 앞에서는 무엇을 할지 그리고, 밤 새 우린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출발 전 고민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았다.

버스대여를 알아보고, 시각 이미지 만들 사람을 알아보고, 즐겁게 연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하면서 이야기는 순식간에 여러 단계를 거쳐 확대되었다. ‘희망버스를 타러 가요’라는 공개 제안문이 발표되었다. 그 뒤로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즐겁고 벅찼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무슨 돈으로 차를 빌리지? 참가비 받자. 버스 빌리는데 얼마지? 밥은 어쩌지? 개인들이 알아서 먹는 걸로 하자. 잠은 어디에서 자나? 노숙해야지 뭐. 마음으로 동의가 되는 사람들이 오겠지 했는데 진짜 그랬다. 인터넷에 만들어 놓은 카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들어와 신청을 했고 좋은 기획 고맙다는 격려 의견도 달아주었다.


희망버스 신청을 받으면서 함께 준비한 친구들끼리 내기를 하기도 했다. 몇 대의 희망버스가 출발할 수 있을 것인지, 사전신청 없이 당일 현장으로 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지. 많은 사람들이 오면 부족한 버스는 어떻게 하지 등등. 즐거운 걱정이 준비하는 내내 설렘을 주곤 했다. 모든 것이 모험이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6월 11일이 다가오고 희망버스 신청자는 매일 늘어갔다. 2대가 3대로, 3대가 4대로 하루에 한 대씩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할 즈음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왔다. 문정현 신부는 아침밥을 만들어 주신다 하고, 갈비연대에서는 수백 명이 먹을 고기를 보내준다 하고, 파견미술팀은 이미지를 만들어 온다 하고, 음악을 하는 사람은 공연을 자청한다. 문인들은 언론에 기고 글을 쓰고 책도 후원한다 하고, 미디어활동가들은 영상제작 후원을 한다 하고,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찍어 준다 한다.

스스로 광장을 만드는 사람들은 밥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프로그램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이면서 스스로 프로그램이 되고 밥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 일하면서 이렇게 즐겁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일한다는 느낌보다는 즐거운 소풍을 준비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준비하는 모두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드디어 희망 버스 탑승일. 사람들이 안 오면 어쩌지. 버스가 남으면 어쩌지…. 불확실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6월 11일 오후 6시 30분 시청에 있는 재능교육노조 농성장에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한 무리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늦게 오는 사람이 꼭 있으니 마지막 차 한 대는 조금 늦게 출발하자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일찍 도착해서 삼삼오오 즐거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맑고 밝고 즐거운 얼굴들이었다.

희망버스의 콘셉트는 ‘신나게 놀자’, 희망버스 담당자들의 이름은 ‘깔깔깔’이다. 신나는 웃음소리다. 버스 담당자들의 표식은 고깔모자를 쓰기로 했는데 처음 고깔모자 아이디어는 불편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스꽝스런 모습이 어색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논의 끝에 버스의 차장들은 깔깔깔 고깔모자를 쓰기로 했다. 어색하게 웃음 짓는 나이든 노동자들의 얼굴에 싫지 않은 웃음이 번진다. 깔깔깔 고깔모자는 1차 희망버스의 상징이기도 했다.

희망버스를 상징했던 꽃분홍 손수건은 색을 정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생각했다. 그리고 정해진 꽃분홍색은 소수자의 색이며 다양성의 색이다. 성적소수자들의 색인 무지개는 6가지 색이다. 처음에는 8가지 색에서 출발한 무지개 깃발은 여러 이유에서 분홍색과 남색이 배제됐고 결국 현재 6가지 색으로 쓰이고 있다. 이때 최초로 배제된 것이 분홍색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정한 색이 분홍이었다. 사회적 배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당사자라면 누구나 분홍의 깃발을 들고 싶었고 흐린 분홍이 아닌 선명한 꽃분홍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희망버스 손수건은 이후 이윤엽의 다양한 판화작품으로 디자인되어 6차 희망버스까지 이어졌고 누군가는 이 손수건을 모으는 재미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멋진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탑승자들과 서로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나는 왜 희망버스에 탑승했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각자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이다. 해고 문제가 다른 누구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그냥 호기심으로, 어떤 이들은 연대방식에 대한 동조와 새로운 방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탑승했다고도 했다. 긴 시간 운행으로 사전 준비에 신경을 쓴다고 비정규 투쟁과 해고 투쟁 관련 영상과 김진숙의 이미지 영상을 상영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가는 이유를 충분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희망버스는 서울, 전주, 순천, 수원, 평택 등에서 나뉘어 출발했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도착한 부산 영도. 영도다리를 건너는 순간 묘한 벅참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750여 명의 참가자들은 영도구 봉래시장인근에 하차했고 바로 촛불을 들고 한진중공업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대오는 물살처럼 한진중공업 정문 방향으로 흘러갔다. 처음 도로에 들어섰을 때 경찰은 ‘불법집회’라며 방송을 하고 행진을 막아섰었다. 백발의 백기완 선생은 행진대열 맨 앞에 서 있다.

행진 차에서는 시인의 시 낭독과 구호를 맡아 줄 사람들을 사전에 섭외했었다. 하지만 행진이 시작될 즈음 섭외된 사람들이 행진시작 시간까지 도착하지 못해 결국 마이크를 잡을 사람이 없었다.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나에게 누군가 잠시 맡아 달라며 건넨 마이크로 난 구호를 외쳤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구호 선창이었다. 그 당시 어색함이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색함을 웃음으로 막아보려 실실거렸던 내 구호는 마이크를 통해 촛불을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백기완 선생이 막 화를 내셨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저렇게 장난스럽게 구호를 하느냐고…. 지금 생각해도 엉성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그 때문에 방송차 마이크를 잡은 주동자로 벌금까지 내게 된 거다.[계속]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문화연대가 발행하는 이야기 창고 <문화빵>에도 실렸습니다. 또한 희망버스 이야기는 2011년과 2012년에 각 언론에 필자가 기고했던 글 일부가 편집되어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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