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앞에 더는 끙끙 앓지도 비장해지지도 않는 여성들

[워커스] 세상평판

[출처: tvN]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베일을 벗자마자 맹비난을 받고 있다. 21살의 여 주인공 지안(아이유)이 사채업자인 동년배 남성에게 가혹하게 두들겨 맞는 장면과 이어 악에 받쳐 내뱉는 ‘너 나 좋아하지?’라는 대사가 특히 화를 불렀다.

방송 전부터 벼르는 눈이 많기도 했다. 작년 11월에 공개된 드라마 제목과 18살 차이의 남녀 배우 출연 소식만으로도 여성들은 많은 것을 예감했고, 늘 있던 판타지가 어디 가겠느냐며 한마음으로 공분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개된 드라마는 우리 사회를 휩쓴 미투운동의 물결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일찍 홍역을 치른 만큼 제작진이 조심하지 않았을 리 없다. 다만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첫 방송 즉시 <한국일보>, <한겨레>, <오마이뉴스>, <미디어스>에 날선 비평 기사가 주르륵 실렸다. 모두 여성인 필자들은 드라마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제작진을 호되게 꾸짖었다. 여성들의 분노가 슬쩍 눙치고 지나갈 정도일 줄만 알았지, 정말 이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사마다 ‘악플’ 기세가 만만치 않기는 했다. 그런데 들여다본 댓글의 내용은 어째 거기서 거기다. 드라마가 싫으면 보지를 마라, 현실과 드라마는 구분하라는 수준이다. 미투운동과 페미니즘의 변질을 운운하는 건 덤이다. 드라마에 문제가 있을지언정 예민하고 불순한 ‘페미들’과는 논쟁하지 않겠단 태도다. 참으로 싱겁고 느긋하고 불성실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제작진은 아직 초반이니 더 지켜봐달란 당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인물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사연이 있다고, 문제된 장면이 꼭 필요했다고 했다. 21살의 지안과 45살의 동훈(이선균)은 단순 로맨스가 아닌 상호 치유 관계라고도 덧붙였다. 인물관계도에서 둘 사이에 그어놓은 애정라인은 조용히 삭제했다. 그러나 드라마 초반부터 뿔이 난 여성 시청자들은 지안이 직장 권력 암투에서 아저씨들을 다 물리치고 마지막에 홀로 웃는 결말만이 유일한 출구라고 말하고 있다. 드라마 방송은 아직 14화가 남았다. 제작진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이전처럼은 안 될 것이다. 2018년 대한민국의 문화비평 지면을 채운 그 목소리마다 ‘기레기’라고 응수해봐야 역부족이라는 것을, 더 지켜봐달라며 시간을 벌어봐야 도망칠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혹시나 지안과 동훈이 인간 대 인간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는단 전개는 아닐까? 어쩌면 그게 지금 여성들이 가장 고대하는 한국 드라마일 것이다. 다만 남녀의 만남이 본래 대등하기가 어려운 구조이니만큼 그런 드라마에는 매우 섬세한 설정이 필요하다. 하물며 어린 여성과 중년 남성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아저씨’는 둘을 대등하게 소개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들의 세계를 밀어낼 것이다

드라마 속 지안의 처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만한 바닥의 삶이다. 그의 행색, 집안 풍경, 쫓아다니며 때리는 사채업자만 봐도 그렇다. 반면 동훈의 처지는 구차할 정도로 겹겹이 소개되고 또 강조된다. 그가 어딘가 주눅 들고 어깨가 무거워 보일지언정 절대로 볼품없고 얕잡아 보이지는 않도록 제작진이 정성껏 심어놓은 설정이 한 가득이다.

애초 대기업 부장이자 건축구조기술사다. 드라마 홈페이지는 동훈이 나대는 성품이 못 돼서 그렇지 실제로는 건축사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다고 굳이 부연해 놓았다. 어머니에겐 집도 장만해 드렸단다. 그밖에도 동훈은 무능력자가 아니라 진급에 연연하지 않을 뿐이라고, ‘양심적’이어서 되레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이라고 촘촘하고도 거듭해 설명한다. 여성과의 관계에서 기어코 우세하고 여전히 매력 있는 아저씨로 만들기 위한 밑밥들이다. 이렇게 제작진은 ‘흔하디 흔한 아저씨’라는 자신들의 남자 주인공을 진짜로 가진 게 없는 남성으로 만들지도 못한다. 배달된 뇌물 5천만 원을 몰래 서랍 안에 챙긴 동훈이건만 무엇이 양심적이란 건지도 도통 알 수 없다. 반면 지안은 동훈에겐 멍든 얼굴을 보이며 대뜸 여자 때린 경험을 묻고, 또 다른 아저씨에겐 갑자기 ‘아줌마’를 비하하며 도발을 한다. 이제 이 모든 게 너무도 수상하고 군색하고 견딜 수가 없다. 재미가 없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스무 살 은탁(김고은)이 외친 “아저씨 사랑해요”가 모든 시청자의 마음을 살랑이게 한 지 겨우 1년 남짓이다. 이제 여성들은 그 익숙한 판타지에서 우르르 탈출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때리기도 한다는 발상을 못 버린 드라마에서도, 남성은 꼼꼼히 치켜세우고 여성은 간단히 후려치는 드라마에서도, 그 드라마들이 거슬리지 않던 지난날의 나 자신에게서도 빠져나올 준비가 되어있다. 앞으로도 지안과 주변 남성들이 어떻게 얽히고 설키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것이다. 제작진이 무엇이든 변명하고 당부하고 끊임없이 눈치를 보게 만들 것이다.

변화의 균열이 발밑에 다가오는 줄 모르고 지난 태도만 고수하다가는 언제 아찔한 순간을 맞게 될지 모른다.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하라는 핀잔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나의 아저씨’가 왜 재미없는지를 떠들고 공감하는 여성들에게 이 드라마가 왜 아직도 재미있는지를 반박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야 할 때다.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뒤에서 끙끙 앓거나 홀로 비장해지지 않고도 때마다 지면을 뒤덮고 여론을 이루며 당신들을 당혹케 할 것이다. 당신들의 세계를 밀어낼 것이다. 이 변화에 합류하자. 마음을 열고 적응하자. 부디 도태되지 말고 함께 가자.[워커스 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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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은(전국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차장)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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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기셔

    첨엔 우려가 많았지만 1회만 봐도 재밌다고 느껴지고 회가 거듭될수록 이세상 살아가는 리얼리티이며 훈훈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그런 드라마인데... 기자가 우려한부분은 벌써 2회에 종식됬는데 웬 뒷북이람...

  • 한번이라도

    전국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차장님은 이 드라마 한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나요? 저도 여자이고 초반에 많은 장면이 거슬린 건 맞아요. 그런데요, 제작진을 호되게 꾸짖는 기사에 달린 거기서 거기인 댓글이 불만이신건가요, 아니면 말씀하신대로 직장 권력 암투에서 아저씨들 다 물리치고 홀로 웃는 결말을 정말 같이 응원하시는 건가요?

  • 한번이라도

    차장님은 왜 이 드라마가 도깨비에서 살랑거렸던 마음을 탈출하게 해야 한다고,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어요. 변화의 물결이 아니라 예전부터 동료들의 내력을 알아봐주고 응원해 줬던 상사들이 있었고, 이 드라마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추후에 감정선이 들어 갈지도 모르겠지만, 드라마를 다 봤다면 우려하시는 부분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건 아닙니다. 제목을 한번이라도라고 쓴 이유는 차장님이 "내가 시청하여 보니......"라는 말을 쓰신 글이 없어서에요. 한 번 시청해 보세요~

  • 보스코프스키

    리얼뉴스의 박박사의 문서와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 ㅋㅋ

    진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