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신묘하고 불온한 상상력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테>에서 혁명을 읽다

  제임스 토머스 감독의 영화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테>, 2008년, 맥밀란 영화(Macmillan Films)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라는 파격적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른바 ‘리시스트라테 프로젝트’(The Lysistrata Project)다.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 잠자리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이라크 공격 반대 시위를 진행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대표적인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작품 <리시스트라테>(Lysistrata)의 정신을 잇는 ‘성 파업’이다.

기원전 41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장기화하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국 모두 지친 상황이었다. 이 남성들의 전쟁은 자존심과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어 흥분 상태가 극에 달했다. 타협과 협상은 불가능해 보였고, 공멸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종식될 가망이 없자, 주인공인 아테네 여성 리시스트라테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지혜로운 여성이 생각한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남편이나 연인과의 성관계를 거부하는 성 파업. 둘째, 파르테논 신전에 적립해 놓은 전쟁 기금을 쓸 수 없도록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는 것이다.

만국의 여성이여, 단결하라!

리시스트라테는 아테네 여성들을 모아 적국인 스파르타 여성과 단합하고 다른 도시국가의 여성과도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들만의 민회를 개최한 것이다. 리시스트라테가 ‘성 파업’을 제안하고, 스파르타 여성 람피토(Lampito)가 여기에 동의하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아테네의 리시스트라테와 스파르타의 람피토가 적대적인 양국을 대표해 전쟁 종식과 평화 회복을 위한 성 파업을 성공시키자고 의견을 모은 것이다.

람피토는 의지가 확고하고 추진력이 강한 스파르타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람피토의 동의와 강력한 지지는 여성들의 참여를 끌어내는 동력이 됐고 성공적인 거사의 바탕이 됐다. 이로써 집단지성의 힘으로 본격적인 반전 평화 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이는 의사결정권이 없는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뒤집고,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발한 상상이었다. 나아가 공동체의 삶에 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참여이자 실천이며 연대였다. 여성들의 연대가 국제주의적으로 발현되는 위대한 발상이기도 했다.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상호 호혜적 관계 맺기를 통해 공동체와 삶을 연결하는 새로운 해법인 것이다.

하지만 성 파업으로 전쟁을 종식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전쟁을 지속하게 하는 중요한 자원 중 하나가 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점거라는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전쟁 비용이 파르테논 신전에 보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제국주의적 델로스 동맹의 보물창고(treasury)인데, 전쟁 자금을 봉쇄해 전쟁을 종식하고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발상이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중심이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자본의 상징이기도 했다.

게다가 파르테논 신전은 지혜와 전쟁의 신이자 처녀 신인 아테나에게 바쳐진 공간으로 성 파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렇게 여성들이 전쟁자금을 봉쇄하자, 아크로폴리스를 되찾으려는 남성 노인들과 집단적인 성 대결이 펼쳐지기도 했다.

신전의 보고를 지키는 감독관은 “돈이 있어야 전쟁을 하고, 전쟁이 우리를 지킬 수 있다”라며 여성들의 점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리시스트라테는 ‘평화를 위한 전쟁’의 허구를 밝히고, 전쟁 자금을 공동 기금으로 운영하자는 제안을 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보고를 장악한 집단지성이 ‘자원의 공정한 분배’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참정권이 없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고자 했고, 또 이를 직접 실천하는 것이었다.

남성들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자신들의 성적 욕망뿐 아니라 화목한 가정이라는 가족들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스파르타의 대사가 황급히 아테네로 달려왔다. 그는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라며 “여자들이 꾸민 국제적 음모에 빠졌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확인한 양 국가는 사태가 급박함을 인정하고 어떤 조건으로라도 평화협정을 맺기로 한다. 그래서 곧장 자국으로 달려가 평화협정 체결을 설득하기로 했다. 결국 그리스 세계는 여성들에 의해 평화를 되찾는다.

그리스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리시스트라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쟁을 이어온 남성들의 역사에 질타를 쏟아냈다. 그러면서 여성들을 향해 주체적인 모습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라고 강조했다.

주체 의식과 보편성

<리시스트라테>는 무능과 권위 그리고 위선으로 가득 찬 고대 그리스 사회의 가부장제 권력 구조에 균열을 가하고자 하는 혁명적 연극이다. 리시스트라테는 ‘군대를 해산하는 여성’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군대를 해산 시켜 시민들을 생업과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당시 남성에게 차별받던 여성의 모습을 변증법적 구조를 이용해 대비시킴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시킨다. 물론 <리시스트라테>의 여성들이 목표했던 싸움이 가부장제 권력 구조의 해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무런 공적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이 여성들은 온전히 자신들만의 지혜와 사랑의 힘으로 평화를 회복시켰다.

또한 <리시스트라테>는 ‘여권신장’이나 ‘반전 평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확장성과 고대 그리스판 ‘반(反)제국주의’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전성기를 맞은 아테네의 번영 뒤에는 수많은 노예와 동맹 도시의 희생이 있었다. 아테네 문화의 황금기는 이웃 국가들을 착취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직접민주주의의 효시로 불리지만 민회나 아고라에 자리 잡은 어떤 공적 장소에서도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20세 이상 아테네 성인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세계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아테네가 자랑하던 민주주의와 경제·문화적 번성은 이 전쟁을 통해 끝이 났고, 이전 그리스 사회를 지탱했던 모든 질서가 무너졌다. 전쟁과 착취로 융성한 국가가 전쟁을 통해 붕괴한 것이다.

리시스트라테는 신화 속 주인공이나 영웅도 아니며 어떠한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상의 여성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하게 되면 주변부의 불가능한 상상은 재현의 힘을 갖게 된다. ‘전쟁 반대’와 ‘평화 구현’은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삶의 정치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파업과 점거가 일상이 된 21세기 자본주의에서 엄중히 새겨야 할 교훈이다.

<참고문헌>
류재국, “고대 그리스 희극의 두 여주인공이 추구한 연극적 행동과 정치적 시가로서의 의미- 「리시스트라테」와 「여인들의 민회」를 중심으로”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40권 (한국브레히트학회, 2019)
아리스토파네스, 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2』(도서출판 숲, 2010)
한정숙,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길, 2008)
홍은숙, “그리스 희극에 나타난 포스트휴머니즘 전망: 리시스트라테와 민회의 여인들에 나타난 집단지능.” 『인문연구』 93호(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0)
홍은숙,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저항운동: 새로운 개인과 새로운 공동체의 부상.”『인문정책연구총서 2017-07』 (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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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개 전성시대

    시정잡배들의 재미는 끝나지 않았다. 청와대 줄로 살아가는 종들이 시정잡배 이론을 나날이 향상시키고 있으니 앞으로의 정세가 어찌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시정잡배들이 쓰는 글은 구이론을 보고 딸딸이를 치는 수준인데 국가권력과 부의 맛으로 길들여지다보니 오늘도 무서울 것이 없다 하노라.

    그런데 인간의 마음 그 성심과 성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배성인님처럼 말이다. 나는 작년 말부터 거인의 몰락이라는 소설을 보고 있는데 여성운동과 볼셰비키의 "혁명성" 대해서 그 시야를 넓힐 수 있어서 극히 흥미롭게 보고 있다.

    오늘도 보스딸딸이스키는 자유게시판에서 잘 나가냐. 구정물 같은 스키를 타고 잘도 놀고 있구나. 일마 니가 아는 것들은 다 물갈이 될 거야. 만다고 똥통 이론에서 놀고 자빠졌냐. 애인 없으면 딸딸이나 쳐라. 니가 힘들게 아는 이론은 그냥 가끔 보고 버리는 소비이론일 뿐이다. 딸딸이나 쳐 쉐끼야.

  • 선거도사

    홍준표 민다고
    일마 꿈에 홍준표는 아니라고 진작에 나왔다. 이번에 대선후보 대열도 못끼겠더라. 서울하고 부산 다 이기면 홍준표를 받아줄 일이 없잖냐
    선거 끝나면 제주도지사 등 잔챙이 쇠끼들이 또 설레발을 치겠구나. 보수는 김무성, 이재오, 김문수가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 정계개편이 되고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다. 문재인 퇴임하면 같이 정계은퇴하라고 그래라.

  • 문경락

    남성들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자신들의 성적 욕망뿐 아니라 화목한 가정이라는 가족들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스파르타의 대사가 황급히 아테네로 달려왔다. 그는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라며 “여자들이 꾸민 국제적 음모에 빠졌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확인한 양 국가는 사태가 급박함을 인정하고 어떤 조건으로라도 평화협정을 맺기로 한다. 그래서 곧장 자국으로 달려가 평화협정 체결을 설득하기로 했다. 결국 그리스 세계는 여성들에 의해 평화를 되찾는다.

  • 토론분석가

    오늘도 딸딸이쉐끼는 홍발정하고 궁합을 맞추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