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가 만든 ‘녹아내리는 세계’, 이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기록

[인터뷰] 홍진훤 작가, 개인전 〈melting icecream〉 개최

“혁명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름답지만, 혁명의 결말은 늘 눅눅하고 처참하다. 그것이 실패이든 성공이든. 중동과 아프리카, 동아시아 몇 나라의 혁명이 떠올랐다. 혁명을 혁명이게 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승리를 선언하지 않는 혁명. 집어 든 신문을 만지작거리며 새똥으로 뒤덮인 혁명 전사 동상 주변을 한참이나 걸었다.”
-〈melting icecream〉, 작가 노트 3p


홍진훤 작가가 삼 년 만에 개인전 〈melting icecream〉으로 관객을 만난다. 사진가이자 기획자, 웹 개발자로 활동해 온 그가 이번에는 60분짜리 영상을 사진 작품들과 함께 공개했다.

작품은 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 당시의 수해 필름을 복원하는 것에서 시작해, ‘녹아내리는 세계’ 밑에 오래 잠겨있던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을 불러낸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의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투쟁, 그리고 그 속에서 목숨을 잃은 열사들의 모습이 작품 곳곳에서 재구성된다. 투쟁 영상들은 과거 <참세상>에 게시된 것들로,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영상들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작가가 복원해 낸 것은 80년 민주화운동의 ‘히어로’들이 만든 ‘녹아내리는 세계’와, 이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처절한 목소리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을 통해 ‘결코 끝날 수 없는 싸움을 섣불리 종료시키는 것이 아닌지’를 되묻는다. 다음은 홍진훤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melting icecream> 전시 포스터, 디자인: 신신 [출처: d/p]

사진가이자 기획자로 활동해 왔는데, 이번 개인전은 60분짜리 영상이다. 계기가 궁금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수해 필름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민주화운동 당시 ‘민족사진연구회’라는 곳에서 찍은 ‘A컷’ 필름 북으로 짐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필름들을 복원하고 그 과정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그 주역들이 신화화되는 모습에 깊은 의심을 품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내가 복원하려는 세계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시각 세계를 복원함으로써 삭제되는 시각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참세상>의 아카이브 영상들이 떠올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자주 보던 영상들이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재생되지 않았다. 그 영상들을 다시 호출하고 싶어졌다.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지옥의 장면들과, 그것을 막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모습을 필름 복원 과정과 연결하고 싶었다.

민주화의 주역들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그들이 영웅화되면 될수록 세계를 지키려던 사람들의 필사적인 싸움이 삭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8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과 2000년대 초반의 비정규직 투쟁, 그리고 지금의 풍경까지, 세 개의 시간을 엮기 위해서는 영상 매체가 적절하리라 생각했다.

  (스틸이미지) melting icecream, 2021, 싱글 채널 비디오, 4채널 사운드, 60분, 반복재생 [출처: d/p]

386세대가 만든 풍경을 영상으로 담았다. 지난 20년 동안 작가가 목격해온 풍경은 어떻게 변해왔나.

너무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고 차별받아 온 사람들의 끈질긴 목소리는 끝없는 패배를 반복하면서도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IMF-정리해고-비정규직으로 이어지는 이 세계의 가장 상징적인 지옥도는 변한 것이 없다. 심지어 ‘플랫폼’이라는 괴물이 등장해 더욱더 자유롭게 착취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싸우는 이들의 패배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그들이 요구했던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것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는 열렬한 노무현의 지지자였다. 선거가 다가오자 한 표를 더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다. 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노무현이 대통령인 나라는 어떻게 다를 것인지.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주장에 동조해주지 못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인 나라에 살아보았으니까. 그가 누구든 대통령이라는 직업은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사람을, 영웅을 믿지 않으니까. 노무현이 당선되던 날 밤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다. 그 축하를 언젠가는 후회할 것 같아서.”
-〈melting icecream〉, 작가 노트 9p


  공룡발자국공원, 울산, 대한민국, 2021, 피그먼트 프린트, 120x160cm [출처: d/p]

작가가 바라보는 ‘녹아내리는 세계’에서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세계가 녹아내리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가라앉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이주노동자가 그러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녹아내리는 세계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녹아내리는 세계를 막아내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노력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시각화하는 것이 구경꾼인 내가 할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번 영상은 기존 사진 작업과는 달리 작가의 메시지가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느꼈다.

나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로 이어지는 운동과 정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스무 살 때부터 지켜봐 온 어떤 장면들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의 성격이 강하다. 이런 성격의 작업은 처음 해보는 것이기도 해서 작업의 성격이 기존과 조금 달라진 듯하다.

하지만 기자가 이 작업을 ‘직접적’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참세상>이 기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국사회의 운동사를 기록해오거나, 투쟁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이런 세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거나 연결고리가 느슨한 관객들은 상당히 모호한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이 외침 내지는 절규들이 일종의 ‘사운드아트’처럼 들린다는 관객도 있다. 이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느냐는 고민이 생기는 동시에, 이 낙차를 관찰하는 것도 유의미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노트에서 ‘히어로’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작가의 세계에서 히어로는 어떤 존재인가.

‘히어로’는 언제나 대상으로써만 존재한다. 스스로 선언할 수 있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의 지지와 신뢰로 만들어지는 영웅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우선은 한 사람에 의해 달성되는 무엇은 결국 그 개인을 신화화하게 되고, 그것이 곧 권력이 된다. 그것은 영웅이 영웅이었을 때의 가치를 스스로 배반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달콤한 것이 녹아내리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혹은 언젠가는 녹아내리기 때문에 더 달콤한 것이기도 하고.

두 번째는 다중의 실천을 한 개인에게 위탁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앞서 얘기했듯,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은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는 사람들의 투쟁과 반복되는 패배다. 이 집단적 소란의 축적만이 사회를 바꿔내는 가장 긍정적인 힘이다. 하지만 영웅의 등장은 이 소동을 삭제시키고, 결과적으로 이 세계의 진보를 유보한다. 그래서 ‘히어로’가 누구인가보다, 누군가를 ‘히어로’로 만드는 힘을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혁명광장 기념품 상점,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2018, 피그먼트 프린트, 120x90cm [출처: d/p]

“스무 살 아무 생각 없는 나를 붙잡고 사회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혁명에 관해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참 신기했고 좋았다. 그들은 이내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나는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melting icecream〉, 작가노트 13p


현재 목격하고 있는 ‘녹아내리는 세계’가 있다면.

현대사회를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혐오’가 아닐까. ‘정상적인’ 노동이 붕괴한 세계는 모두를 파편화했고, 끝없는 경쟁을 생산했다. 녹아내리는 세계에 맞서 연대해 싸우기보다 나보다 약한 존재를 혐오하며 생존한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통해 나의 소속과 안전을 확인한다. 연대와 노동에 대한 희망을 확인할 수 없어진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비트코인과 주식, 그리고 부동산뿐이다.

특별히 이번 전시를 관람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나.

많은 사람이 떠오르지만, 꼭 언급하고 싶은 사람은 이 아카이브 영상을 촬영하고 공유한 <참세상> 기자들이다. 그 기록이 누군가로부터 재생산돼, 또 다른 세계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확인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하다. 또 그들이 채택한 카피레프트 정책이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었는지, 이 전시를 통해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래서 영상 크레딧의 처음에 그들의 이름을 적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현재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시각 권력’을 둘러싼 투쟁들이다. 무엇을 가시화, 비가시화할지를 결정하는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것이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세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권력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왜곡하고 교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올해 가을에 열리는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서 그 결과를 전시하고, 시각 권력을 되찾기 위한 프로젝트를 모두에게 제안해보려 한다.

  <melting icecream> 전시 전경, 사진 촬영: 박기덕 [출처: d/p]

* 전시 개요

〈melting icecream〉, 홍진훤
2021.6.11.~2021.7.3.
d/p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28, 낙원악기상가 417호
화요일-일요일, 11am-18pm(월요일 휴관)
매시 정각에 영상 작품 상영이 시작됩니다. 마지막 회차 상영 시작 시간은 오후 5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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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히어로’는 언제나 대상으로써만 존재한다. 스스로 선언할 수 있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의 지지와 신뢰로 만들어지는 영웅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우선은 한 사람에 의해 달성되는 무엇은 결국 그 개인을 신화화하게 되고, 그것이 곧 권력이 된다. 그것은 영웅이 영웅이었을 때의 가치를 스스로 배반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달콤한 것이 녹아내리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혹은 언젠가는 녹아내리기 때문에 더 달콤한 것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