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모순을 감내한 조선 최고의 페미니스트, 허난설헌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秋淨長湖碧玉流)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 두었지요 (荷花深處繫蘭舟)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逢郞隔水投蓮子)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遙被人知半日羞)


  허난설헌 표준영정 [출처: 전통문화포털]

2018년 tvN 화제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를 향한 애신의 마음을 노래한 사랑의 시 <연밥 따기 노래>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 여인의 시로 보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호방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주옥같은 표현들 하나하나가 그 시대엔 파격적일 수도 있구나 싶다. 하지만 이 시는 다른 누군가에 매우 평범한 연시(戀詩)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당시 시인치고 이러한 연시를 남기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가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찬사를 받아온 허난설헌(1563~1589)의 작품이라고 하면 얘기가 다르다.

그가 단순히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 천재 문인은 흔했다. 조선 시대는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생활 규범으로 작동하는 가부장제와 봉건제 체제였다. 지배계급인 양반 집안이 대대로 당송 시대의 작품을 학습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천재가 태어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허난설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문학적 명성이 자자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허엽, 두 오빠 허성과 허봉, 그리고 자신과 동생 허균을 일컬어 ‘허씨오문장’으로 통하는 대문호 집안이었다. 허봉, 허난설헌, 허균 삼 남매는 모두 당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천재들로 유명했다. 이는 자유로운 소통과 토론, 역사 공부를 통해 국제적인 감각을 기른 허씨 집안의 엘리트 교육이 이룬 성과였다.

아버지 초당 허엽은 일찍이 서경덕과 이황에게서 학문을 배운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붕당정치의 대표적 정파인 동인의 지도자였다. 여성에게 제대로 된 교육이 전혀 없던 시기였기에 허난설헌의 글재주는 일단 가문의 역량과 전통에 의해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당시 다른 여성들과 비교해 학문적 접근이 수월한 최적화된 조건이었다.

하지만 허난설헌의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고 높게 평가받게 된 것은 그의 작품세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천적인 재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허난설헌의 재능은 집안 분위기와 더불어 스승과의 만남으로 일취월장하게 됐다. 조선 중기는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는 시대였지만, 아버지 허엽과 작은 오빠 하곡 허봉은 허난설헌의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

허난설헌은 어려서부터 감정이 섬세하고 글쓰기와 책 읽기에 능했다. 스스로 글을 익히기 시작해 다섯 살에 벌써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총명한 여동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작은 오빠 허봉이었다. 그는 동생에게 두보의 시집을 주며 시를 가르치고 격려했다. 당대 손꼽히는 시인인 손곡 이달(李達)을 동생 허균과 함께 남매의 스승으로 삼게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 남매가 당시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문학과 달리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작품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달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시를 연구한 이달은 서자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사회진출이 좌절돼 이상적인 평등사회를 갈망했고, 현실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이달의 사상은 허난설헌 남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달에게 수학했던 허난설헌은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장편 시를 지어 놀라운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어릴 때부터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세계를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악몽이었다. 그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과 이상주의적 경향은 억압적이고 전통적인 역할을 준수해야 하는 현실과 맞지 않았다. 열다섯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혼인하며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혼인 초부터 시작된 남편과의 불화,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시어머니와의 갈등, 두 자녀의 죽음, 친정의 몰락 등으로 피폐한 삶이 지속됐다. 삶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시를 쓰는 일, 그뿐이었다.

허난설헌의 시들은 너무나 자유롭고,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자식 잃은 여인의 불행을 노래한 시, 출정하는 병사들의 기백을 노래한 시, 남녀 간의 애정 시, 현실을 벗어나 무한한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 유선시(遊仙詩), 하층민이나 백성들의 고난을 노래한 시, 아름다운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한 시, 계절의 냄새가 나는 듯한 풍경을 그리는 시 등 당대의 여성 문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시 세계와 시풍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현실의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미학이었다. 자신이 유배된 선녀라고 자처할 만큼 선계에 대한 동경이 컸다. 도교적 사상을 배경으로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하며 혹독한 유교적 여성 윤리에 항거한 것이다. 여성으로서 실현 불가능한 현실의 꿈을 가상세계에 설정하고 불안 의식을 아름다운 꿈과 나라로 승화시켰다. 그 꿈속에서 남편과 죽은 아이들, 오빠와 동생 등의 이미지를 통해 축소된 공간에 맺힌 정한을 풀어나갔다. 그의 의식 세계는 여신을 주인공으로 삼고 선계(仙界)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거부했다. 여성해방의 신호탄이었다.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원한과 이별, 가족의 몰락에서 보여준 감수성은 조선 시대의 여성뿐만 아니라 현대 여성에게도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 그래서 보수적인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기도 했다.

허난설헌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다. 16세기 조선의 여성으로 태어나 평범한 남성의 아내로 살기에는 너무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였다. 조선의 규방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일찍 좌절했다. 우주의 이치와 사람을 다루는 학문인 유학이 여성에게만큼은 무척 편협했고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시대의 모순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찬란한 시어로 자신을 일으킨 여인. 허난설헌은 스물일곱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죽음은 그녀를 부활시켰다. 동생 허균이 펴낸 <난설헌집>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중국과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허균이 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녀의 역동적인 생애는 조선조 최고의 페미니스트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

그녀의 이름은 초희(楚姬), ‘미녀와 재원(才媛)’을 뜻한다. 난설헌은 호로서 글을 쓸 때 호를 즐겨 썼기 때문에 이름보다 호로 통했다. 난설헌의 난(蘭)은 ‘여성의 미덕을 찬미한다’라는 뜻이며 설(雪)은 ‘지혜롭고 문학적인 재능 또는 고결하고 뛰어난 문재를 지닌 여성’이라는 뜻이다. 자는 경번(景樊)인데, 중국의 여성 시인 번희(樊嬉)를 사모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소망을 마음껏 담은 이름들이다. 이름 하나도 허투루 짓지 않았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적 배경과 그녀의 주변 환경들을 뒤로하고 이름 안에서는 오롯이 자기 뜻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참고문헌
김신명숙, ≪허난설헌1-불꽃의 자유혼≫, 금토, 1998).
나태주,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허난설헌 시선집≫, 알에이치코리아(RHK), 2018
박경남, ≪사임당이 난설헌에게-조선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센 언니들의 열띤 수다!≫, 리드리드출판, 2017 이화영,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에 나타난 ‘주체와 자유’의식 고찰>, 우리문학연구 제50집, 우리문학회, 2016
장진, <허난설헌론>, 동악어문논집 제12집, 동악어문학회, 1980
최문희, ≪난설헌≫, 다산책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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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우리의 역사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 채 사라져간 안타까운 인물들이 많습니다...................늘 걱낭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