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 갇혀버린 그 궁색함에는 노동정치가 실종된다

[양규헌 칼럼] 평화와 폭력의 주장에는 허구가 넘쳐난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내모는 가두리사회

미디어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 사회에서 온라인 소통의 확장은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직접 모이는 집회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그럼에도 십 수 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하는 이유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집회는 특정 장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공간적 요소가 강조되며 시위는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펴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법률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노동자민중의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집단의 주장이나 입을 틀어막는 행위는 정상적 사회가 아니라 ‘파시즘’, 혹은 ‘독재’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고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해를 당한 사람이다. 우리 속담에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못 뻗고 잔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가해자도 최소한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 규정하기에 성립된다. 순간적으로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때는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제정신이 들어오면 미안해지고 반성하며 사과도 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같은 행위를 계속 반복할 때, 피해자는 누적된 분노가 폭발하여 분노표출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건들의 공통점은 가해자가 동일하다

지난 정권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박근혜정권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달라지고 있다. 가해자는 뻔뻔스럽게도 반성과 사과는 커녕, 피해자의 요구와 분노를 불법이라는 틀에 가두고 무차별 폭력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치기 하려고 권력이 가진 수단을 총동원하여 야단법석을 떤다. 그 효과로 피해자의 요구를 소멸시키고 가해자의 폭력을 피해자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있다. 이 장단에 권력의 하수인들은 물론이고 권력의 나팔수인 언론을 비롯하여 지식인 종교인 등이 한바탕 춤을 추며 놀아나고 있다. 이 난장판에는 정의도 진실도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은 없어지고 오로지 ‘폭력’과 불법,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며 환장들하고 놀아난다. 무엇을 요구하며 무엇이 분노이고 무엇이 폭력인지조차도 헤아리지 않는 무아지경의 인간군상 들이다.

최근 벌어지는 집회. 시위의 목적과 발단은 노동자 민중이 자본과 권력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게 본질이 아니다. 핵심 사안은 세월호, 농민의 생존, 노동법개악, 국정교과서 등이다. 그런데 세월호의 가해자는 유병언으로 몰았다가 아니면 말고가 됐고, 자유무역협정으로 피해 입은 농민들은 조상 탓이고, 노동법개악은 경제개혁이라고 우기고, 검인정 교과서는 빨갱이들이 배우는 책이라는 억측이다. 하나같이 노동자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고 왜곡된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건들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가해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며 그 주체는 바로 박근혜정권이다.

세월호의 가해자는 골든타임을 허비하면서 배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지 않은 박근혜정부가 아닌가. 공산품 수출로 경제를 발전시킨다며 농촌을 초토화시킨 대안 없는 자유무역협정의 가해자도 박근혜정권이다. 나아가 비용들이지 않는 ‘쉬운 해고’와 ‘저성과자’, ‘비정규직 전면화’라는 칼날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자본에게 선사하고, 비정규노동자를 벼랑에 내모는 당사자도 박근혜정권이다. 현 집권여당이 스스로 지침을 내리고 손을 봐서 내놓은 ‘검인정 교과서’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국정화를 관철함으로써, 다른 교과서 발행은 못하게 틀어막아 국정을 유일한 단일교과서로 하겠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왜곡까지 하면서 가족내부의 허물을 역사적으로 갈무리 하겠다는 천박한 발상도 박근혜정권이다.

정치는 실종되고 왕권만이 부활하고 있다

지난 11월 14일 집회시위가 노동자 민중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면 다음 질문에 답해야한다. 세월호를 유족이 침몰시켰는가. FTA를 농민이 요구했는가. 노동법개악을 노동자가 요구했는가. 국정화 교과서를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요구했는가. 민중들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업적과 재벌을 위한 정책을 일관되게 밀어붙이고 있지 않는가. 여기에는 이 땅의 절대다수인 민중(노동자, 농민, 학생)이라는 주체가 철저히 무시되고 있으며 다수의 요구에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따라서 노동자 민중에게는 정치가 실종되고 왕권만이 부활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권력의 힘으로 다수를 제압하고 기본권과 생존을 위협하며 가해지는 기본권 유린의 폭력 앞에서 생존에 대한 위협의 수위가 최대치로 올라가고 있다. 삶의 위협이 목줄을 조이면서 꿈틀거린다고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는 짓은 엄청난 폭력이다. 생존의 절박함으로 분노하며 외치는 공간을 확보하자고 하는 노동자 민중의 집회시위를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다. 공권력이 저지르는 폭력은 사회 안정이라 우기면서, 생존의 몸부림으로 저항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배권력이 주장하는 사회 안정은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폭력 운운하기에 앞서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단한번이라도 생각해 보는 것이 상식적인 정부인 동시에 정치의 기본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에는 무조건 폭력을 덧씌운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권력의 거대한 폭력이 진실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하며 나약한 민중을 끝없이 죽음으로 내 몰고도 폭력을 합리화시키려 한다.

대의정치가 민주주의의 표본인양 침을 튀기며 떠들어대지만 실제 의회정치는 반 노동자민중적으로 흘러왔다. 역사적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법제도적 장치가 발전적으로 변화한 게 있다면 그건 순전이 노동자계급이 거리를 통한 직접정치투쟁으로 쟁취한 산물일 뿐이다. 때문에 노동자 민중이 가두에서 집회하고 시위하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인 동시에 직접정치에 해당된다. 이렇게라도 대응하지 않으면 희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발견할 수없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노동자 민중들에게 폭력의 덫을 씌워 거대한 가두리를 만들려는 저들의 발상, 그 자체는 현 정권이 전형적인 독재정권이라고 자랑질 하는 꼴이다.

권력을 활용한 광기어린 폭력은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으면서도 ‘평화적’이라는 소리를 유행가 가사처럼 읊어대는 꼴이 가관이다. ‘복면과 아이슬’도 영화제목으로 대박감이다. 노동법 때문에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고 출산율이 저하되고 경제가 어렵다는 말도 권력의 무능과 무지를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다. 삼권분립은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국회가 청와대의 하부기관으로 편입된 꼬라지가 희극의 소재로서 손색이 없다.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도로교통방해라는 딱지를 붙여 1급 수배령을 내리고 체포하기 위해 수 억 원의 경비를 썼다고 엄살떠는 경찰의 모습은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충정심을 구걸하는 추잡함이 보인다. 불통과 살인적 광기에 미쳐 돌아가는 21세기 한국사회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2년만 버티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똥배짱 앞에 이 땅에 살고 있는 노동자로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평화와 폭력의 주장에는 허구가 넘쳐난다. 허구를 종식시키는 것은 완강한 투쟁

평화인가. 폭력인가라는 이분법적 구조의 틀에 갇히는 순간 노동자 민중의 주장은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복면과 아이슬(?)이 어쩌고 하는 사이 지배 권력이 설치한 포획 틀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저들은 지금도 마구잡이로 덫을 뿌려댄다. 노동악법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과시키기 위해 ‘경제위기설’, ‘국가비상사태’를 들먹이고 노동자 민중을 협박하며 비상계엄이라도 선포할 자세다. 이런 행태는 분명한 폭력이다. 집권여당과 정부 내에서조차 위기에 대한 진단이 다르지만, 만약 경제위기가 비상사태 지경이라고 진단한다면 뻔뻔스럽게 떠들 것이 아니라 경제를 말아먹은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대표인 한상균위원장은 구속되었다. 박근혜정권의 지휘 하에 공권력과 언론과 사찰의 합작품으로 노동자 대표의 인권과 체면에 걸레질을 하려고 모든 언론을 동원했다. 진실의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폭력이라는 가면을 안주삼아 이빨이 아프도록 씹어댔다. 이런 과정이 모든 종편과 지상파로 생중계되면서 자진출두(?)라는 허물을 뒤집어쓰고 잡혀가는 장면이 그대로 비춰졌다. 민주노총의 대표가 공권력에 의해 체포 구금되는 과정을 보며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은 눈물을 글썽인다. 억눌린 감정에는 분노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에 대한 탄압을 즉각 저지하겠다는 결의가 취약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노동자 투쟁의 정점은 공장과 일손을 멈추었을 때가 가장 위력적이며 투쟁의 성과를 챙길 수 있다. 그리고 노동법 개악을 비롯한 현 정권의 공세와 공안탄압을 저지할 수 있다.

집회. 시위에 소요죄를 씌우려는 박근혜정권에 정면으로 맞서야한다

민주노총과 노동자계급은 박근혜정권의 반민중적 정책을 저지하고 방어해야할 과제 외에 ‘구속동지 구출’과 ‘공안탄압 저지’라는 과제가 더 생겨났다. 이제는 평화와 폭력이라는 틀에 갇힌 궁색함을 딛고 노동자계급의 방식대로 집회와 시위를 이어가야 한다. 박근혜정권은 노동자 투쟁을 테러로 오버랩 시킨다. 형편없는 미치광이 인식으로 노동자는 국민도 아닌 적으로 규정하는 상태에서 노동자계급이 이들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노동자 투쟁에 소요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박근혜정권에게 한 가닥 희망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비타협적 투쟁정신으로 계급적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다. 노동자 투쟁의 꽃은 총파업이다.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지금부터 완강한 투쟁을 조직해야하며 그 투쟁은 일회적인 몇 시간 파업이 아니라 지속적인 파업을 조직해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철창에서 처절하게 단식투쟁으로 맞서는 한상균위원장의 결의에 대한 화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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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평화 , 민중총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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