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층과 진보정치

[양규헌 칼럼] 정치 선동부대 자임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진보와 보수의 경계선은 더욱 애매모호해졌다. 최근에는 자유주의자들조차 진보로 지칭되고 규정된다. 진보와 보수는 삶의 태도인 동시에 사상적이며 철학이다. 이런 논리는 느닷없이 등장한 규정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억지 이념성과 정치적 진영 논리가 학문, 사상, 철학과 역사를 뭉뚱그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표현으로 갈무리한다. 근거도 불분명하게 이쪽은 보수, 저쪽은 진보라는 딱지만 붙이면 동질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적으로 규정되어 대화나 토론보다는 힘의 작용이 앞선다. 정치, 언론을 비롯한 전사회적 분위기가 여기에 어우러져 놀아나고 있다. 이 판에 노동자, 민중은 없다.

국가와 정부의 책임방기와 이분법적 통치기법

이념적 스펙트럼을 현상으로 구분하는 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념에 근거하지 않고 의미 없는 패거리로 재단하며 그 속에 인격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패 가르기에 맛 들린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세력결집에 재미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과 북을 가르고 동과 서를 가르며 같은 노동자까지 갈라 친다. 세대별 갈라치기로 가족사회에 균열까지 조작해 내려한다. 이것도 모라자서 보수, 진보의 판으로 갈라 치고 성에 차지 않아 빨갱이를 덧씌운다. 즉 보수는 애국, 진보는 빨갱이. 얼마나 단순명료한가. 즉 진보는 빨갱이와 동어체이다. ‘빨갱이는 나쁘다. 진보는 빨갱이다. 고로 진보는 나쁘다’는 논법이 완성되어 미개와 야만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진정한 진보정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와 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노동자 민중에게 노동의 시장가치나 재산 수준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을 보장하는 것이며 둘째, 노령, 실업, 질병, 장애 등 개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해 안전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며, 셋째, 계급이나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 민중이 빈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보수와 진보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라 국가와 정부의 임무와 책임일 뿐이다. 정치집단이 권력을 움켜쥐고 임무와 책임을 방기했을 때는 그 책임을 물어야 국가가 발전하며 인류역사가 진보한다. 책임을 묻기는 고사하고 다른 쟁점으로 자신들의 오류를 덮으려고 할 때, 결국 노동자 민중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 불행에는 노동자도, 청년도, 노인도 예외일 수 없다. 이 불행에 예외일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한국사회를 맘대로 주물러대는 극소수 특권층이다.

노동자 민중은 물론 노년층의 경제여건은 더욱 박살이 났다

우리나라의 노년층 인구증가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집계한 노인 빈곤율은 OECD국가들 중 가장 높게 나왔다. 뿐만 아니라 소득대비 가계부채비율이 연령대 평균 128%인데 노년층은 161%를 넘어섰다고 하니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한마디로 노년층의 경제여건은 박살났고, 대부분이 빈곤의 상태에서 삶에 허덕이며 앞날도 암울할 뿐이다. 정치는 삶의 반영이며, 삶이란 생존자체에 허덕이기보다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노년층의 경우,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집단이 자신의 삶을 돌봐주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짝사랑 한다. 자신의 삶이 풍전등화에 내몰렸는데도 자신들을 외면하는 정치세력에게 막무가내로 무한한 지지를 보내는 사회가 있는지 모르겠다. 스웨덴의 경우는 손꼽히는 고령화 국가로서 모범적인 노인복지 때문에 노년층의 압도적 지지로 사민당 정권이 30년 이상의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속한 계층(노년층)의 삶을 보살펴주는데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공약으로 약속했던 노인복지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버리는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을 오히려 압도적으로 지지함은 물론, 시녀노릇까지 마다하지 않는 작금의 현상은 분명 아이러니다.

노동자 민중이 가난한 건 노동자 민중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와 정부의 책임이다. 노년층이 빈곤한 것 역시 정부의 책임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면죄부를 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환호하며 정치적 선동부대를 자임하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재의 노년(60대 이상)은 6월 항쟁을 겪은 87세대라는 사실이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쳤던, 그리고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해방을 외쳤던 세대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노년층의 수구세력 지지는 환상적이다.

급증하는 노년층에 대한 진보세력의 대안은 무엇인가

왜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변혁세력은 물론이고 진정한 진보를 주장했던 세력들은 냉정하게 돌이켜 봐야한다. 아울러 유신의 향수가 현재까지 왜 그들의 말초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는지도 분석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노년층은 박정희 철권통치 후 박정희를 신으로 생각 한다. 비록 유령이지만 지도자가 나를 이끌어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일종의 발달장애에 걸린 것이다. 이런 성과에 입맛이 들린 박근혜 정권은 국정교과서를 통해 역사 왜곡은 물론, 새마을 운동을 미화시키고 더 나아가 동상을 세워 숭배하게 하는 짓에는 그들 정치세력의 장기집권화의 전략이 담겨있다.

노년층의 수구적 정치지향을 놓고 한정된 온라인에서 다양한 비난이 쏟아진다. ‘투표를 잘못해서 이 꼴이 되었으니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느니, ‘표 찍은 놈들은 자업자득이니 그렇게 살아라’ 등의 투박한 비아냥거림으로 도배하고 있다. 그런 비난을 퍼붓는 자신은 진보라고 자처하지만 과연 진보인지 자유주의 세력인지, 감정배설자인지 알 수는 없다.

노년층 70%이상이 보수(수구)세력을 지지한데 대해 이렇게 SNS를 통해 비웃음과 저주가 가득하지만 그러나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진보세력은 물론, 자본주의를 끝장내겠다는 변혁세력도 “그런 것들”로 치부하고 웃어넘길 사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우리의 운동을 반영, 접목시킬 대안마련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노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젊은 층만의 의식과 인식의 발전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앙상한 토대를 노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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