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판 ‘좌익 효수’, 10년간 9개 대선에 개입

멕시코 대선은 여론 조작 집대성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선거 당선자 머리 위로 색종이 다발이 쏟아진다. 2012년 7월 멕시코 대선 투표일, 그의 당선이 확실시됐다. 안드레아 세풀베다(Andrés Sepúlveda)는 이곳에서 2천 마일 떨어진 콜롬비아 보고타에 위치한 한 고급 아파트에서 여섯 대의 컴퓨터를 앞에 두고 공식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콜롬비아인이고, 머리 뒤에 암호키와 QR 코드의 문신을 하고 있다. 니에토의 승리가 공식화되자 세풀베다는 플레쉬 드라이브와 하드 드라이브, 핸드폰에 구멍을 내 해체한 다음 전자레인지에 부품을 넣고 때워 버렸다. 그 뒤에는 망치로 파편이 될 때까지 부셨다. 이어 문서 자료를 잘게 조각내 변기에 쏟아붓고 비트코인으로 임대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산 서버 기록도 삭제했다. 모두 최근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더러운 선거 운동의 비밀 하나가 담긴 증거물이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 공격...미국 지원 의혹

  표지 속 인물이 안드레아 세풀베다이다. [출처: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4월 4일자 표지]

라틴아메리카판 ‘좌익 효수’로 남미 전역이 논란에 빠졌다. 남미 좌파 정부들이 주장해 왔던 우파의 여론 조작이 현실로 드러난 것.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우파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을 순방한 뒤 정부가 멕시코와 FTA를 재추진한다고 밝히면서 한국에선 FTA 기사가 쏟아졌지만 정작 멕시코에서는 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대선 부정 선거 논란이 한창이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가 지난달 31일 안드레아 세풀베다라는 이름의 해커를 인터뷰하면서 세계적으로 공개됐다. 그는 1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9개국에서 모두 우익 편에서 선거를 조작했다. 2006년 콜롬비아 대선과 총선, 2012~2013년 베네수엘라 대선, 멕시코 대선을 비롯해, 온두라스, 니카라과, 파나마 등 모두 대선에서만 아홉 번 개입했다.

세풀베다의 주 고객이 후안 호세 랜던(Juan José Rendón)이라고 알려지면서 미국이 그 배경에 있다는 의혹도 촉발했다. 랜던은 미국 마이애미를 중심으로 한 정치 컨설턴트 전문가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부를 공격하는 미디어 조작을 주도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특히 베네수엘라 전문 영자 언론 〈베네수엘라 어낼러시스〉에 따르면, 그가 미국 대외 원조를 명목으로 라틴아메리카 정치에 간여해 온 미국 국제개발처(USAID)와 긴밀하게 작업해 온 것으로 드러나 미국 개입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세풀베다가 밝힌 해킹 사례는 광대하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 상대방을 공격했다. 3만여 개의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 여론을 조작했고, 전화 도청은 물론, 컴퓨터 네트워크와 이메일 계정에 침투해 관련 정보를 긁어 여론 조작에 활용했다. 또 한밤중에 상대편 후보를 사칭한 녹음 전화 메시지를 유권자에게 보내 경쟁자의 이미지에 타격을 줬다. 웹사이트를 손상시키거나 다운시키는 것은 기본이었다.

돈은 문제되지 않았다. 애플, 블랙베리와 안드로이드폰 도청에 수월한 고가의 러시아산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는 데 5만 달러(약 5천7백만 원)를 쓸 정도였다. 이용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최고급 트위터 프로파일을 만들기 위해 돈도 물 쓰듯 썼다.

보수도 높았다. 스마트폰 해킹과 웹페이지 위조나 대량 이메일 또는 메시지 전송에 현찰로 월 1만 2천 달러(1300만 원)를 받았다. 디지털 공격, 해독과 방어 등 전반적인 해킹 수단이 포함된 프리미엄 패키지에 대해선 2만 달러(2200만 원)를 요구했다.

세풀베다는 대체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7~15명 정도의 팀원을 모집하고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작전을 짜 시행했다. 중간업자와 컨설턴트사가 이 더러운 캠페인을 세심하게 세탁했다. 작업을 한 뒤에는 모든 자료를 파괴했다.

세풀베다가 이 일을 시작한 건 2005년 당시 콜롬비아 대통령이던 우익 알바로 우리베 정부 여당 선거를 돕고 있던 형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우리베는 이 형제들의 영웅이었다. 세풀베다는 어릴 적 콜롬비아 좌파 게릴라의 폭력 행위를 목격했다. 어른이 된 뒤 그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우익에 동조했다. 그는 선거 운동 사무소에서 노트북을 꺼내 놓고 사무소 무선 네트워크를 스캐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쉽게 이 정당의 전략가로 일했던 랜던의 컴퓨터로 다가가 우리베의 활동 스케줄과 연설 계획을 다운받았다. 이 일을 안 랜던은 바로 그를 고용했다.

SNS 조작부터 전산망 해킹, 새벽 전화까지

이후 세풀베다는 8년 동안 정치 선거 운동을 조작하면서 대륙을 오갔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웹사이트를 손상시키거나 반대편 기부 데이터베이스에 침입하는 등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그는 라틴아메리카 대선 운동을 염탐하고 훔치며 중상하는 팀을 이끌게 됐다.

최대 공작 사건은 2012년 멕시코 대선이었다. 세풀베다는 선거 운동 전략을 훔치는 해커 팀을 운영했다. 후보에 대한 열광과 조소 등을 만들기 위해 SNS를 조작했으며 반대편 선거 운동 사무소 네트워크에 스파이웨어도 심어 놓았다.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2000년 패배하기 전 70년 동안 집권했던 제도혁명당(PRI) 소속이었다. 이 당은 1994년 미국,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 나프타(NAFTA)를 체결한 중도 우파다. 2012년 대선 때 이 당은 우파 국민행동당(PAN)과 좌파 민주혁명당(PRD) 사이에서 경쟁했다. 세풀베다의 팀은 민주혁명당 후보 중앙 사무실 전산망에 악성 소프트웨어를 설치했다. 후보를 포함해 네트워크 사용자의 핸드폰과 컴퓨터를 도청할 수 있게 했다. 그는 국민행동당에 대해서도 유사한 작업을 했다. 이 때문에 후보의 팀이 정책 연설을 준비할 때면, 세풀베다는 작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치는 대로 바로 알 수 있었다.

페냐 니에토는 대선 초반까지 상대적으로 참신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멕시코시티의 한 대학을 방문한 뒤 학생들로부터 야유 폭탄을 받고 지지율은 곤두박칠쳤다. ‘나는 132번째(Yo soy 132)’❶라는 멕시코 학생운동이 시작된 장면이었다. 당시 니에토가 피신한 장면과 그가 화장실에 숨었다는 루머가 SNS로 퍼졌고 대신 야권인 좌파 오브라도의 지지율이 올라갔다. 하지만 세풀베다가 오브라도 측에 심어 놓은 도청 프로그램을 통해 그가 기업가에게 600만 달러의 선거 자금을 요구하는 통화를 도청하고 언론에 흘리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세풀베다는 멕시코 대선에서 수천 개의 위조 SNS 계정을 운영했고 마약 폭력 등의 주제에 대한 토론의 윤곽도 만들었다. 오브라도 선거운동본부 전산망 해킹으로 페소에 관한 약점을 알아내 SNS에 오브라도 지지율이 올라갈수록 페소 가치는 떨어진다는 내용을 유포하면서 상대편 지지율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또 다른 선거에서는 투표 전날 밤 3시에 상대편 후보가 미리 녹음한 것 같은 전화 메시지를 수만 명의 유권자에게 보내 짜증을 유발했다. 이 후보는 소폭의 차로 세풀베다가 지지한 후보에 패했다.

베네수엘라 대선에서도 공세를 퍼부었다. 세풀베다는 차베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열린 2013년 재선거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의 트위터 계정을 해킹해 부정 선거 혐의를 제기했다. 세풀베다는 스페인에서도 여러 번 주문이 들어왔지만 거절할 만큼 너무 바빴다고 밝혔다.

여론 조작, 체스보다 쉬웠다

랜던은 불법적인 일에 세풀베다를 동원했다는 의혹을 부정한다. 단지 세풀베다를 알고 있었고 웹디자인을 의뢰했다고 주장한다.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언론 담당자는 논평을 거절했다. 제도혁명당 대변인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랜던과 세풀베다 간 이메일 기록을 분석한 한 컴퓨터 보안 회사는 이 이메일이 진본이라고 평했다. 이 이메일은 원래 파기해야 했지만 세풀베다가 자신을 위한 일종의 보험으로 남겨 뒀다. 안전을 이유로 신원을 밝히지 않은, 멕시코 선거 운동 관계자 또한 세풀베다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세풀베다는 랜던을 멘토로 모셔 왔다. 그는 업계에서 성공적인 이력의 소유자다. 더러운 속임수와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전략으로 유명하다. 그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2004년 차베스 대통령이 투표 조작을 했다고 비난한 뒤 국외로 빠져나가 활동해 왔다. 랜던은 세풀베다의 이상형이었다. 고가의 차를 소유하고 있었고 맞춤 외투에 수천 달러를 소비했고 우익을 지지했다.

그러나 세풀베다는 랜던과 다른 길을 택하면서 결국 이 일 때문에 쇠고랑을 찼다. 2012년 콜롬비아 대선에서 랜던은 현직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 재선을 위해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세풀베다는 이를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산토스 대통령이 임기 중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평화 회담을 개시한 게 문제였다. 세풀베다는 좌익과의 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이 회담에 반대하는 다른 후보를 지지했다. 세풀베다는 돈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했다.

세풀베다는 산토스 대통령에 맞서 100명 이상의 이메일 계정을 해킹했고 무장혁명군이 마약 거래와 폭력을 일삼는다는 증거를 모아 TV 방송에 제공했다. 하지만 선거에는 산토스 현 대통령이 당선했고 세풀베다의 숙소에는 특공대가 들이닥쳤다. 그는 범죄 내용을 밝히는 대신 형량을 줄이는 협상을 통해 스파이 활동, 해킹 등으로 10년형을 받았다. 그는 이 방송사 관련자가 자신을 밀고했을 것이라고 본다.

세풀베다가 보고타의 라 피코타 감옥에 도착한 뒤 두 차례의 살해 시도가 발생했다. 칼을 가진 남자가 매복하고 있었고 또 저격 시도에 관한 제보도 있었다. 그는 최고의 보안 시설을 갖춘 보고타 중앙 감옥 독방에 있다. 방탄 담요를 사용하고 침대 옆에는 방탄 조끼가 있다. 문은 폭발에도 끄떡없는 재질이다. 경호원은 매 시간 그를 확인한다.

세풀베다는 자기 이야기를 언론에 밝힌 이유에 대해, 대중이 현대 선거에 개입하는 해커의 힘과 이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SNS 계정도, 전체 경향도 조작될 수 있고 이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체스보다 쉬웠다는 얘기다.

지난해, 콜롬비아의 한 언론은 랜던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선 선거 운동 본부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랜던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트럼프 측은 그와 접촉했지만 그가 트럼프를 싫어해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랜던은 다른 주요 대선 주자와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워커스 5호(2016.4.13)>


* ‘요소이 132(Yo soy 132, 나는 132번째) 운동’은 2012년 7월 멕시코 대선을 계기로 신자유주의 후보와 상업 미디어에 반대하며 분출한 멕시코 학생운동이다. 제도혁명당의 페냐 니에토 대선 후보가 그해 5월 초순 선거 운동을 위해 멕시코 이베로아메리카 대학을 방문하자 학생들은 “신자유주의 ​​후보는 돌아가라” 등을 외치며 반발했다. 그러나 보수 언론은 이를 의도적으로 삭제 보도하면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시위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분증을 제시한 비디오를 촬영해 유튜브 등에 올렸다. 이 수는 131명에 달했고 이후 이들의 동영상을 보고 “나도 참여하고 싶다. 나는 132번째다”라는 메시지가 트위터 등에서 잇달아 전해지며 ‘요소이 132 운동’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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