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 파견미술! 힘내라 포이동!

[파견미술-현장미술] 파견미술, 포이동 빈민운동과 만나다


2011년에 파견미술팀은 참 바쁜 한 해를 보냈다. 2012년에도 바빴다. 2013년에도 여전히 바빴고 2017년 지금도 바쁘다. 바쁘다는 건 그만큼 파견미술팀이 가야 할 곳이 많다는 것이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투쟁 현장마다 참으로 많은 요청이 온다. ‘우리 농성장 만드는 것 좀 같이하자’ ‘우리 기자회견 하는데 퍼포먼스 좀 고민해 줘’ ‘우리 문화제하는데 기획 좀 부탁해도 될까’ ‘문화제 상징의식은 어떤 것이 좋겠어’ ‘행진하는데 상징물 제작이 가능할까’ ‘연대버스 가야 하는데 함께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뭐 그런 기획 없어’ ‘00투쟁 사업장 홍보 이미지 만들어야 해’ ‘오늘 집중투쟁인데 촬영팀 운영이 가능하겠어’ ‘사진팀도 구성했으면 좋겠어’ ‘공연팀 섭외 좀 부탁해’ ‘후원금 마련을 위해 티셔츠 좀 만들어야 하는데 가능할까’ ‘후원전시 기획하고 싶은데 어찌할까’.

2011년 희망버스는 파견미술팀에게도 벅차게 다가왔다. 어느 현장, 어느 공간, 어떤 사람들이 이러저러하게 싸우고 있으니 희망버스가 우리에게도 와 주었으면 좋겠다며 수없이 많은 연락이 왔다. 함께 할 수 없는 여건 등으로 안타까움이 많았던 우리는 최소한의 연대를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 필요했다. 어느 현장, 어느 곳이 힘들지 않을 것이며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겠나.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현장으로 간다. 와 달라 요청하는 현장도 많았지만, 파견미술팀 개개인의 생계를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저런 시간을 또 쪼개야 했다.

파견미술팀의 작업은 문화연대 활동가로 있는 필자가 투쟁사업장 연대를 가장 많이 하는 편이고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요청이 들어오는 루트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업이 확정되면 파견미술팀에게 SNS를 통해 미리 이야기를 전달하고 아이디어를 모은다. 때로는 현장논의 중에 파견미술팀 작가들에게 의견을 묻고 바로 결정할 때도 있다.

파견미술팀은 이렇게 일을 만들어 간다. 누군가 이런 것 해보자 하면 바로 살을 붙이고 털어 낼 것은 털어 낸다. 아이디어가 모이면 각자 역할을 맡고 함께 할 수 있는 주변 친구를 모은다. 그리고 재료를 구입하거나 집집마다 쓰다 남은 물감, 붓, 페인트 등등 바리바리 싸들고 나간다. 그리고 함께 작업할 공간을 정하고 정해진 공간으로 모인다. 작업공간이라고 해봐야 이윤엽의 작업실 아니면 평택 대추리 마을창고를 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견미술가들은 작업공간과 작품창고에 대한 욕망이 있다. 월세방사는 처지에 작업실은 엄두도 못 낸다. 아무튼 경기도 안성에 있는 이윤엽 작업실이 최적의 공간이다.

보통 1박을 기본으로 작업하거나 더 길어지는 날도 많다. 미리 작업한 것은 현장으로 옮겨 추가 작업을 하거나 변형한다. 설치 당일 경찰과의 충돌로 바로 망가지기도 하지만 그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속은 상하지만 함께 싸우는 것이 우리가 연대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오뚜기처럼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든다. 망가진 형태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로 만들면 된다. 파견미술팀의 장점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다는 거 아닐까. 가끔은 쓰레기 작가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거 보면 말이다.

주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재정이다. 돈은 어디서 마련하는지…. 애초 파견미술팀 활동은 자신이 가진 물감과 현장에 버려진 물건들을 활용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물감비용, 교통비, 식대, 숙박비 등은 대부분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사용했다. 하지만 요즘 재료비는 요청한 투쟁사업장에서 만들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 재료비 재정 요청을 할 때만 해도 큰 사업장이 아닌 경우 엄청 미안하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우리 재료비는 좀 줘야 하는데….” 항상 말끝을 흐리기 바빴다. 지금은 아니다. 당당히 요구한다. 여전히 재료비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2011년에도 우린 바빴고, 돈도 없었고, 공간도 없었다. 붓 하나 들고 달려갔지만, 전국 여기저기가 투쟁의 현장이었고 삶이 치열하기만 한 시간들이었다. 용산 철거민들이 그러했듯 서울 포이동 판자촌 화재는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있다. 6월 11일, 강남 한복판에서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의 삶터가 한순간 무너져버린 날이다.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의 제안으로 파견미술팀은 이곳으로 달려갔다. 이즈음부터 파견미술팀 개개인도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 시간을 맞춰 움직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두 명, 세 명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현장에서 함께 작업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제작보다는 그림 그리기 작업이 많았다.

포이동에 도착한 우리는 화재현장을 돌아보았고 마을 분들과 인사도 나눴다. 마을 주민들은 공동으로 밥을 해 먹고 함께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외부인의 방문에 경계의 눈빛을 보이기도 했다. 웃으며 인사하기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위로의 인사도 힘들었다. 마을 주민들의 경계는 포이동의 과거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평택 대추리 주민들이 국가정책으로 강제이주 당했듯, 포이동 주민들도 국가정책이 만든 이주대책의 피해자들이다. 결은 다르지만 국가정책이 낳은 피해자들임에 분명하다.

1979년 대통령령에 의해 자활근로대가 조직됐다. 자활근로대는 거리부랑자, 전쟁고아, 넝마주이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명목으로 도시빈민을 한 지역으로 강제수용 시키고 강제노역을 시키던 단체다. 그런데 1981년 자활근로대원들의 집단수용으로 사고가 빈번해지자 분산정책을 통해 강제 수용자들을 10개 지역으로 나누어 다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고 포이동 266번지도 그중 한 곳이었다. 군대식 통제를 통한 감시와 함께 인권을 짓밟히며 살던 사람들은 1988년 자활근로대의 해체와 함께 아무런 주거대책도 없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후 이들에게 날아온 것은 토지불법점유에 대한 토지변상금 청구서였다. 불법점유라니. 도시빈민을 돕겠다던 정부의 정책은 결국 평범한 시민들을 범법자로 만들어 내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006년 기준으로 한 가구당 토지변상금은 5,000만 원에서 1억8000만 원이었다.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이주하고 싶어도 이주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 있었다.

포이동 266번지에 연대한 사람들은 응원문화제를 준비했고 파견미술팀은 붓을 들었다. 응원문화제에 참석한 학생들과 마을입구 펜스에 이미지 작업을 하기로 하고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살고 싶은 공간,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공간을 이미지로 만들어 보자고. 빌딩과 고층건물이 서울을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이 공간만은 소박한 집들이 옹기종기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이윤엽 작가의 진행으로 이미지 작업에 들어갔다.

빨간집, 노란집, 파란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형상이 그려지고 녹슬고 허름했던 펜스는 점점 꿈같은 마을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삐까뻔쩍한 차림에 산책하던 주변마을 사람들이 이미지를 보기 위해 모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뚱한 표정이다. 꼬마 아이가 ‘나도 그려 볼래’ 하고 달려오자 그 아이의 엄마가 이야기한다. ‘안돼 더러워’ 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저 멀리 빌딩 숲으로 가버린다. 주민 중에 한 아주머니는 멀리서 그림을 바라보다가 ‘저기, 저기 나무아래 있는 집이 꼭 우리 집 같구만’ 하시며 불타버린 마을 속 자신이 살던 집을 회상하기도 한다.[계속]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문화연대가 발행하는 이야기 창고 <문화빵>에도 실렸습니다. ** 글의 일부는 필자가 민중언론 참세상에 기고한 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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