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노동자들은 MB를 진짜 사장이라 부른다

[워커스 이슈] 왜 다스에 창조컨설팅이 들어왔을까?

“그래서 다스는 누구 겁니까?” 꽤 오래된 질문이지만, 최근 들어 또 다시 빈번하게 출몰하는 질문. 답은 정해져 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답만 하면 되는 질문. 다스를 둘러싼 실소유주 논란이 인터넷 상에서 격렬하게 재점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답해야 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도대체 노조 깨기 만렙을 찍은 창조컨설팅과 당신은 무슨 관계냐는 것. 그리고 어떤 작당모의를 한 것이냐는 질문에도 그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노조 파괴 시나리오’를 들고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창조컨설팅이라는 노무법인이 기획하고, 컨텍터스라는 경호업체가 몸빵을 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맞장구를 치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그게 다스와는 무슨 관계냐고? 창조컨설팅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인 2010년, 다스는 이미 창조컨설팅과 접촉 중이었다. 그리고 이명박 측근들이 소유하고 있던 다스의 하청업체에선 진즉에 노조파괴 공작이 이뤄졌다. 직장폐쇄와 함께 투입됐던 컨텍터스라는 용역업체는 이명박 전 대통령 후보시절 개인경호를 맡았던 업체였다. 이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이명박과 노조파괴’는 ‘이명박과 다스’만큼 꽤 가까워 보인다. 경주지역 다스와 하청업체에서 일어난 노조파괴 공작에서부터, 2012년 노조파괴 시나리오까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노조파괴 역사를 짚어봤다.

[출처: 청와대]

다스, 창조컨설팅의 문을 두드리다

다스가 창조컨설팅의 문을 두드린 건 2010년 7월이다. 다스는 이후 26개월 동안 자문료 명목으로 창조컨설팅 계좌에 2,761만 원을 입금했다. 창조컨설팅이 노조파괴 작업에 뛰어든 초창기이다. 첫 입금이 7월에 이뤄진 것은 절묘하다. 이 시기는 창조컨설팅이 발레오만도를 첫 타깃으로 삼아 노조파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던 때다. 발레오만도와 다스는 모두 경주지역에 위치한 사업장이다. 발레오만도가 창조컨설팅에 처음으로 5,500만원을 송금한 그 해 4월, 회사는 공격적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노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6월 7일, 발레오만도지회는 금속노조 집단탈퇴를 결정하고 기업노조로 돌아섰다. 신속하고도 성공적인 결과였다. 발레오만도는 창조컨설팅에 총 4억 원이 넘는 돈을 쏟아 부었다.

다스가 처음으로 창조컨설팅에 돈을 건넨 7월은, 발레오만도 노동조합이 금속노조를 탈퇴한 직후다. 첫 ‘시범사례’가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다스는 2012년 8월까지 창조컨설팅에 매달 자문료를 입금했다. 마지막으로 자문료를 입금한 그 해 8월은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세간에 드러나 떠들썩했던 시기다. 그리고 상신브레이크와 KEC, 유성기업, SJM, 만도, 보쉬전장, 콘티넨탈 등 금속노조 사업장을 상대로 한 노조파괴 공작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든 때이기도 하다. 이 사업장들은 모두 창조컨설팅의 자문을 받아 노조파괴에 나선 곳들이다.

결과적으로 다스의 민주노조는 파괴되지 않았다. 경주지역을 시작으로 금속노조 소속 자동차 부품사들이 줄줄이 무너졌지만 다스지회는 건재했다. ‘성공보수’가 아닌 ‘자문료’만을 꼬박꼬박 입금한 것도 노조파괴에 성공하지 못한 채 상황만 저울질했기 때문일 테다. 정진홍 전 금속노조 경주지부장은 “물량을 납품하는 방식, 노조 분위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노조를 깰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 판단했을 것”이라며 “발레오만도에 노조 파괴 작업이 들어온 뒤 다스지회도 긴장했지만 본격적인 시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경주 지역 노조들 사이에서는 “(노조파괴의) 목표는 다스였지만, 다스만큼은 노조파괴 공작에서 빗겨갔다”는 말이 회자됐다.

다스는 어떻게 노조파괴에서 빗겨났나

다스는 1987년 회사 설립 직후부터 약 20년 간 쭉 한국노총 소속 사업장이었다. 그 당시 현장에서는 관리자가 정강이를 차거나 뺨을 때리는 경우도 있었고, 작업 환경도 열악했다. ‘무늬만 노조’에 부당함을 느낀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결성을 주도했다. 다스에 금속노조가 들어온 시기는 2008년 7월이다. 노동자들은 속전속결로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새 지도부까지 선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매제이자 당시 다스 부사장이었던 김진은 독일 출장을 접고 공장으로 긴급하게 돌아오기도 했다. 사측의 금속노조 가입 방해 시도도 존재했지만, 금속노조 경주지부가 연대총파업을 결의하자 사측은 결국 금속노조를 인정했다. 노동계 관계자들은 다스가 파업에 돌입할 경우, 현대차의 완성차 생산에 큰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에 노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다스는 국내 자동차 시트부문의 독점 공급업체로 현대, 기아차 등에 90%에 달하는 물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자동차 시트의 경우 재고 물량도 넉넉하지 않아 며칠만 생산에 차질을 빚어도 완성차 생산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막강한 노조의 조직력도 노조파괴를 어렵게 한 요인이었다. 금속노조 가입 후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과 복리후생, 일터의 분위기 등은 확연히 달라졌다. 지회는 사측과 매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10%를 정규직으로 전환토록 하는 단체협약을 맺기도 했다. 다스지회의 노조 조직률은 현재까지 100%다. 최재소 다스지회장은 “현장은 100% 조직돼 있고 사내하청 노동자들까지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집행위원은 “당시 (노조가) VIP 사업장을 건드렸는데 사측이 가만히 있을 것 같냐는 이야기가 무성했다”며 “하지만 다스지회가 만들어지고 3~4년간은 손도 못 댈 정도로 조직력이 막강해 섣불리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스가 창조컨설팅에 자문을 구하기 시작한 시점은, 다스지회가 전면파업에 돌입한 직후다. 2010년 6월 25일, 지회는 사측의 임단협 잠정안 거부에 맞서 야간조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한 후 28일부터는 주야간조 통합 전면파업에 돌입해 공장사수투쟁을 전개했다. 3개월 동안 총 15차례의 교섭을 거쳐 도달한 잠정합의안이었다. 지회는 찬반투표를 통해 잠정합의안을 가결했지만, 사측은 노조 전임자 조항을 비롯한 노조 활동을 위한 조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합의안을 거부했다. 그해 7월 1일은 복수노조와 타임오프제(근로시간면제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된 시기다. 이를 앞두고 조합원 500인 이상의 대형 사업장이 타임오프 문제로 전면 파업에 돌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파업은 4일 만에 마무리됐다. 전임자 문제는 완성차의 임단협 체결 상황을 본 뒤, 추가교섭을 진행하는 것으로 노사가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사는 그해 6월 29일 임단협 조인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딱 한 달 뒤인 7월 28일, 다스는 창조컨설팅에 첫 자문료를 입금했다.

하청에 민주노조가 결성된 ‘하극상’, 이에 대처한 MB

이명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은 다스에 민주노조가 결성되기 이전, 이미 노조파괴를 성공시킨 경험이 있다. 자동차 시트 레일을 용접해 다스에 납품하던 ‘세광공업’이라는 협력업체 이야기다. 세광공업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매제인 김진이 1997년 2월부터 2년 9개월 동안 대표이사로 있던 회사다. 이후에는 이명박의 고려대 후배인 이대환이 대표이사직을 넘겨받았다. 세광공업 노동자들이 금속노조(당시 금속연맹)에 가입한 시기는 2000년 7월이다. 아직 금속노조 경주지부가 출범도 하기 전이다. 당시 다스의 성장속도는 무서울 정도였다. 다스가 수주하는 신규 물량이 늘어날수록 하청업체의 물량도 덩달아 증가했다. 하지만 세광공업은 신규채용을 거의 하지 않아 잔업과 특근이 일상화 돼 있었다. 공장은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돌아갔다.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했다. 하지만 이듬해 5월, 회사는 ‘폐업’으로 노조 결성에 맞불을 놨다. ‘노사 분규로 물량 수주를 받지 못했다’는 게 폐업 이유였다.

세광공업지회는 위장폐업과 집단해고의 실질적 배후로 다스를 지목했다. 이들은 세광공업이 다스의 위장계열사라고 주장하며 다스를 상대로 한 투쟁에 돌입했다. 최해술 당시 세광공업지회장은 “이대환 대표이사는 대부기공(현 다스)에서 개발부 상무를 겸직했다. 이명박의 형인 이상은의 장남인 이동형도 세광에서 과장으로 근무했다”며 “이명박이 우리 공장에 온다고 하면 몇 주 전부터 청소를 하고 VIP 의전을 준비하는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민주노총 경주시협의회가 폐업 직후 낸 보도자료에는 “지난해 7월 노조를 결성했을 당시, 노조를 깨기 위해 부산에서 용역깡패를 사들인 것도 대부기공이고, 세광공업에서 하는 생산물량을 대부분 가져와서 현재 가동하고 있는 곳도 대부기공이며, 세광공업에서 회사에 빌붙어 노조를 반대했던 비조합원들을 데려와 일 시킨 곳도 바로 대부기공”이라는 주장이 실려 있다.

세광공업의 위장폐업은 노조 설립 움직임이 다스까지 이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사전 차단의 목적이 컸다. 홍석범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역시 2013년 ‘산별노조의 지역활동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에서 “다스보다 작은 계열사에 민주노조가 들어섬으로써 당시 어용노조가 있던 다스에도 노조민주화 움직임이 번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고 분석했다. 집단해고를 당한 세광공업지회 노동자들은 이후 다스 정문 앞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하며 납품을 봉쇄했다. 이틀 후 다스는 구사대와 용역을 동원해 농성장을 훼손하고 조합원들을 폭행했다. 그해 7월, 금속노조 경주지부의 모든 사업장이 교섭을 중단하고 이틀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초기 산별노조 시기, 개별 사업장의 문제가 지역 총파업으로 번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홍 연구원은 같은 심포지엄에서 “과거 단위사업장별로 전개됐던 투쟁들이 금속노조 출범이후 하나의 지역적 울타리를 치고 저항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세광공업 투쟁은 경주지역 사용자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심어준 것으로 평가된다”며 “실제로 단위사업장 조직력이 천차만별이 상황이었음에도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 가량의 기간 동안 지역 사용자들이 세광공업 같은 방식으로 노조를 탄압하는 일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후에도 세광공업지회는 이명박 자택과 사무실, 소망교회 등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소망교회 앞 시위 도중 마주친 이명박은 노동자들에게 ‘여기서 이렇게 있어도 의미 없다. 내려가 있으면 해결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노사간의 실질적 교섭이 시작됐고, 2002년 6월 새로운 회사 설립 및 남은 조합원 26명의 복직과 체불 임금 지급 등의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렇게 설립된 ‘유광테크’라는 회사는 2년도 채 되지 않아 또 다시 폐업을 맞았다. 최해술 지회장은 “이대환이 1년을 운영하다 최승락이라는 사람에게 회사를 매각했다. 이후 다스에서 들어오는 물량이 점점 줄었다”며 “일거리가 줄면서 조합원들이 퇴사하기 시작해 결국 남은 사람이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모두 퇴사한 뒤 폐업한 ‘유광테크’는 2010년 9월, ‘한양실업’이라는 회사로 부활하게 된다. 중소기업현황 정보 사이트에 기재된 ㈜한양실업의 정보에는 1988년 세부공업으로 시작해 1993년 세광공업으로 사명이 변경되고 2001년 폐업을 한 세광공업의 연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다른 다스의 하청업체, 금강

세광공업이 담당했던 다스의 물량은 ‘금강’이라는 또 다른 하청사로 넘어갔다. 2003년 10월 22일, 다스에 시트레일을 납품하는 ‘금강’이라는 협력 업체가 설립됐다. 유광테크에서 다스에 납품하는 물량이 점점 줄어들던 시기다. 금강의 주식 64%를 소유한 최대주주는 이명박의 처남 고 김재정의 부인 권영미다. 권 씨는 다스의 주주에도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김재정은 2010년 2월 사망 전까지 다스의 최대주주(48.99%)였다. 하지만 사망 후 상속 과정에서 다스 주식 지분 19.91%를 상속세로 물납했고, 권영미는 청계재단에 본인 지분 중 5%를 기부했다. 이로서 이명박의 형 이상은이 다스의 최대 주주(47.26%)로 등극했다.

금강 노동자들은 2013년 12월 10일 금속노조를 결성했다. 정규직 노동자 140명과 이주 노동자 30여 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사측은 노조파괴 시나리오와 유사한 민주노조 파괴 공작을 벌였다. 최인혁 금강지회장은 “노조 설립 직후 야간에 기습적으로 공장 문이 닫혔다. 용역으로 보이는 80여 명의 무리들이 유니폼을 입고 ‘사내 도급 계약’을 맺었다며 공장 안으로 진입했다”며 “그들은 공장 골목마다 배치돼 조합원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경주지부에서 연대해 일주일 만에 그들을 철수시켰다”고 설명했다. 노조 설립 후 사측 주도의 기업노조도 결성됐다. 위장취업을 통한 노조 파괴 시도도 있었다.

최 지회장은 “5~6명 정도의 위장취업자들이 조합원들에게 들켰다. 조합원들이 눈치채 압박하니 위장취업 사실을 실토했다”며 “그 중 팀장격인 사람도 있었는데 사측과 퇴사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듬해에도 사측은 교섭을 해태하고, 노조 간부에 대한 부당 징계를 시도했다. 노조는 전면파업으로 징계 무효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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