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강 스키장, 저기가 내 고향이야”

[워커스 이슈] 평창올림픽이 쫓아낸 사람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 지난해 5월, 이곳에 사는 문영희(가명) 씨의 집에 굴삭기가 들이닥쳤다. 다행히 문 씨가 집을 비운 때였다. 굴삭기는 문 씨의 가정집 벽면을 뚫었다. 공사 관계자는 철거할 집으로 착각하고 실수로 집을 부쉈다고 말했다. 굴삭기가 할퀴고 간 살림살이는 대부분 망가져 버렸다. 문 씨는 할 수 없이 도망치듯 이주마을로 이사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이주마을은 매일 먼지가 날렸다. 문 씨만이 아니었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때로는 허망하게, 때로는 분노를 삭이며 짐을 꾸렸다. 주민들이 떠난 집터에는 거대한 숙박시설과 경기장이 들어섰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치러질 활강 스키 경기장이라고 했다.

[출처: 김한주 기자]

# 이주 전, “우리도 태극기를 흔들었지”

정선 알파인 경기장이 들어선 평야지대는 원래 숙암리 주민 약 50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에 대형 숙박시설과 주차장, 관중석 공사가 한창이다. 현대산업개발과 송담아이엔씨 같은 건설사들이 중장비를 거느리고 마을로 들어왔고, 주민들은 수백 미터 떨어진 산 비탈길 밑으로 밀려났다. 산 비탈길 밑에서도 밀려난 사람들은 아예 마을을 떠났다. 이주단지에 정착한 가구는 단 11가구. 남은 사람 보다 떠난 사람이 많았다.

한때는 그들도 태극기를 흔들었다. 자발적으로 나서기도 했고, 동원이 되기도 했다. 꼭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려야 한다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삼수 끝에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가 확정됐을 땐 누구보다 기뻤다. 작은 마을에서 세계적인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쁨과 환호는 오래지 않아 ‘이럴 줄 몰랐다’는 한숨으로 바뀌었다. 생태가치가 높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됐던 가리왕산이 바리깡으로 밀려나갈 땐 등골이 서늘했다. 2012년 정부는 올림픽 경기장 건설을 위해 가리왕산을 보호구역에서 해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이주단지에 사는 김명숙(가명) 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5년간 숙암리에 정을 붙이고 살던 사람이었다. 올림픽 유치를 원했던 것도 마을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공사가 시작된 후 유령마을로 변해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뒤늦은 분노만 쌓여갔다. 마을 밑에 펼쳐진 활강 경기장 공사장에서는 매일 뿌연 먼지가 날렸다. 이런저런 민원을 수차례 넣기도 했지만 ‘조금만 참으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우리가 이주하지 않겠다고 ‘배 째라’ 한 것도 아니야. 그런데 이주하면 어떻게 살게 해줄 건지, 올림픽 끝나고 우리 마을이 어떻게 되는 건지 주민간담회도 안 했다니까. 그냥 이런 게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과장급 공무원은 ‘기간 안에 이주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겠다’고 땍땍거리기만 했어. 이주 전에는 수시로 마을에 와서 압박하더니, 우리가 다 이주하고 나니까 한 번을 안 왔어. 공무원이 그러면 안 돼. 우릴 완전 물로 보고 있잖아.”

# 이주, 폐교에서 1년

남정화(가명) 씨가 이주한 곳은 마을의 폐교다. 그는 가장 먼저 이주 압박에 시달린 주민이었다. 이주단지가 조성되기도 전에 살림살이를 챙겨 집을 비웠다. 그의 집터에는 516실 규모의 대규모 숙박 시설이 지어질 것이라 했다. 건설 사업비만 700억 원이 드는 공사였다.

도청은 자꾸 이사를 하라며 보챘다. 숙소 건설이 다른 공사보다 오래 걸린다는 이유였다. 당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아팠던 그는 ‘조금만 이사를 미루겠다’고 했다. 건설사 관계자는 남 씨 때문에 이사 차량을 돌려보내 손해가 막심하다며 핀잔을 줬다. 그의 다리가 진짜 아픈지 확인하고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이주 압박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2015년 7월, 폐교에 살림살이를 풀었다.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을 폐교에서 지냈다. 네 가구가 10평 남짓한 방 한 칸씩을 배정받았다. 리모델링 비용은 도청에서 냈다. 하지만 관리비는 각자의 몫이었다. 도청이 설치한 전기 판넬 난방은 전기비가 비쌌다. 같이 들어간 노인들은 전기료가 무섭다며 추위를 견뎠다. 남 씨 역시 온풍기를 끼고 앉아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폐교를 벗어나기 위해 살 집을 찾다가도 종종 분노가 치밀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윗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먼저 집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 분하고 원통했다.

“우리가 윗동네에 있으니까 먼저 나온 거죠. 우리가 집을 비우고 나니 그 밑에 집도 비워 달래서 또 나갔지. 산 위부터 도미노처럼 쫓겨난 거예요. 미리 나가는 대신 생활 유지비라든가 그런 것도 없었어요. 보상받았으니 끝이라는 거야. 처음에는 엄청 분통을 터뜨렸지. 1년 먼저 밥줄 끊기고, 1년 치 농사 먼저 손해보고.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 때는 뭘 몰랐지.”

남 씨는 가리왕산 밑자락에서 32년을 살았다. 배와 더덕 농사를 지었고, 마을에서 식당도 운영했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농지를 포기했고, 식당 문을 닫았고, 집을 비웠다. 8개월 만에 그의 집과 생계 수단은 모두 사라졌다. 그는 이주단지에 입주를 결국 포기했다. 생계 수단 없이 생활하긴 어려웠다. 지난해 5월, 숙암리에서 10km떨어진 나전리에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융자 6천만 원을 얻었다. 토지 보상 금액을 조금씩 까먹으며 생활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지난 3월부터 올림픽 경기장 부대시설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짓고 살던 땅으로 출근해 일을 한다. 올해 11월에 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 일자리다.

# 이주 후, “일거리는 사라지고 빚만 6천만 원”

최신자(가명) 씨는 이주 과정에서 5천8백만 원의 빚을 졌다. 생계는 사라지고 빚만 떠안은 꼴이었다. 최 씨는 정부가 이주민들에게 아무것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며 하소연했다. 평창군과 민간 사업자가 조성한 이주단지는 도로와 수도관, 전기 같은 기본 시설 공사만 갖춰져 있을 뿐이었다. 집은 각자 자비를 들여 지어야 했다. 새 집을 지으려면 빚을 내야 했다.

“이주하면 집 짓고 잘 살겠구나 했지. 그런데 이주하고 1년이나 지났지만 사람이 미칠 지경이에요. 우리 집 화장실 바닥 타일이 경기장 발파(공사) 때문에 깨져버렸다니까. 옆집은 새집 벽에 금이 가고… 버스 정류장은 5분 걸리던 거 20분 이상을 걸어요. 눈 오면 이 비탈길은 아예 걷지를 못하겠어. 여든 넘은 할머니들은 평소에도 못 다녀. 원래 살던 집이랑 밭 보상만 했다고 끝이냐고. 삶의 질이 이렇게 떨어진 건 어떻게 보상할 건데?”

율무를 재배했던 넓은 농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10평 남짓한 집 앞 텃밭만 남았다. 최 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일거리다. 농지가 없어지자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고, 평균 연령 70세가 넘는 노인들만 남았다. 이주단지 입구는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라 노인들에게는 고역이다. 거동이 불편한 주민 6명은 마을 밖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 눈이 오면 이주 단지는 고립되고 만다.

이주단지에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입주권은 집과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숙암리 원주민 절반은 마을을 떠나야 했다. 70년 넘게 평생을 숙암리에서 살았던 노인 세 명도 집 명의가 자식 앞으로 돼 있다는 이유로 짐을 쌌다. 이 중 두 명은 2015년 8월과 지난 추석에 각각 숨을 거뒀다.

# 올림픽 후, 우리 마을은...

올림픽이 치러진 후, 마을이 어떻게 변할지는 가늠할 수 없다. 공무원도, 건설사도 누구도 답을 해주지 않는다. 최 씨는 “우리가 이렇게 희생했는데, 올림픽 이후엔 마을이 어떻게 되는 건지 도지사한테 물어보고 싶다”며 “이주에 문제제기했던 것도 그 이유다. 올림픽 이후에도 지역 경제가 존속할 수 있는지, 이주단지를 포함한 지역 활성화 방안이 있는지 궁금하다.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문제가 심각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북평면에서 만난 한 이장은 “이제 올림픽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저 지금보다 피해가 덜 하기를, 빨리 공사가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주민들은 3년 동안 이어진 도로 공사 때문에 매년 30%이상의 작물 피해를 보고 있다”며 “공사장 먼지가 흩날리지 않게 한 시간에 한 번 물 뿌려달라는 요구도 들어주지 않는데 뭘 바라겠나”고 울분을 터뜨렸다. 도로 확장 공사로 교통이 편해지면,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물으니 코웃음을 쳤다. 그는 “나도 도로공사를 가장 많이 원했지만, 온통 부실공사 뿐”이라며 “몇 겹 씩 다지고 포장해야 할 도로를 한 번에 쌓아올리는 걸 봤다. 지금도 주저앉은 도로가 많다. 공사가 끝나도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평창올림픽 이주 문제를 연구해 온 윤지혜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은 자신의 연구 자료에서 “보수적이고 고령화 된 강원도에서는 ‘감히 막을 수 없는 국가 행사’라는 정서가 지배적”이라며 “특히 이주민은 저항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고령화된 지역 주민들도 올림픽의 잔혹함 앞에서는 분노와 허탈감을 느낀다.

15년의 간극을 두고 아픈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72만 명에 달하는 이주민이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당시에는 빈민, 노점상 탄압으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2017년 현재. 또 한 번의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를 앞둔 평창에서도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어지고 있다.[워커스 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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