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

[워커스 코르셋벗기]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②

[출처: 사계]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우리의 역할분담이 나름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임신과 출산 이후 우리의 역할분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유수유가 끝나고 역할 바꾸기를 통해 6개월간 아빠가 육아를 전담하고 난 후에야 육아와 살림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슬금슬금 땅따먹기처럼 나의 노동 영역이 넓어지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건 남편의 아주 사소한 질문들에서부터였다.

‘여벌 옷 안 챙겼어?’ ‘날이 추운데 아이 잠바는 없어?’ ‘아이 머리는 언제 감겼지?’ ‘이번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은 언제야?’ 정도의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나들이 길에 아이가 추울 것을 걱정하는 모습으로, 함께 목욕을 하는 다정한 아빠로, 아이 어린이집의 일정까지 체크하는 육아에 적극적인 아빠로 생각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남편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적지는 않다. 내가 바쁘거나 피곤할 때는 아이와 외출해서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도 하며, 쉬는 날에는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6개월간의 역할 바꾸기 기간 덕택에 나름 높은 육아스킬을 구사하고 있어 (남편의 주장대로) 평균 이상일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저 일상적인 질문을 들었을 때, 미묘하게 올라오는 불편함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질문들이 하나씩 쌓이던 어느 날, 답답함에 잠을 못 이루다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질문들이 맞벌이 부부임에도, 나에게 책임을 두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질문에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당신은 몰라?’라는 대답을 돌려주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남편은 곤란해 하기도 하고 억울해 하기도 한다. 남편이 생각하기에는 절대 자신이 차지하는 육아비율이 적지 않으니, 내가 남편의 질문에 화를 낼 때는 억울한 모양이다.

문제는 (예전에 내가 몰랐듯이)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일상적으로 던지는 저 질문들은 나를 주 양육자로, 책임의 주체로 소환한다. 아이의 옷을 다락에서 꺼내 정리하는 것, 작아져서 나눠야 할 옷가지들을 분류하고 부족한 옷가지를 살펴 새 옷을 구매해야 하는 것, 어린이집에서 필요하다고 말한 준비물을 챙기는 것, 날이 쌀쌀해지면 아이 소풍 때 보온 도시락을 꺼내야 하는 것, 아이의 칫솔이 벌어졌을 때 교환해주는 것, 아이가 아플 때 아이의 약을 챙기고 어린이집에 아이 상태를 적은 메모를 보내야 하는 것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육아의 이름 아래 있다. 단순히 아이와 놀아주는 것으로 육아가 마무리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세세한 지점에 대해 일상적으로 살피고 조율하고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하는 부분까지 육아이다. 보조 양육자는 육아에 있어 선택적으로 참여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기에 이 세세한 지점까지 머릿속에 담고 있을 필요가 없다. 문제가 생긴다면 결정적인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주 양육자를 나로 설정해 놓은 적이 없음에도 남편은 질문이라는 형태로 나를 주 양육자, 책임의 주체로 소환했던 것이다.

사회의 소환

남편이 소환하지 않더라도 여자들은 도처에서 주 양육자로 소환된다. 그 지긋지긋한 소환술은 명절에 가족들이,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기관에서,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그 그물망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엄마라는 이름은 주 양육자와 다름없는 단어로 받아들여지고, 그에 따른 불평등한 노동을 부여받는다. 수많은 육아서들이 엄마의 이름으로 쏟아지고, 엄마의 양육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글들이 인터넷에 떠돈다. 물론 아빠양육에 대한 글과 책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이벤트 같이 느껴질 뿐이다. 엄마라는 이름이 주 양육자로 사회에서 끊임없이 소환받기 때문에 그 미시적이고 불평등한 노동 분배를 눈치 채지 못할 때가 많다. 나도 때로는 사회의 소환술을 눈치 채지 못하고 그 부름에 응답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치를 채고 딴지를 걸기도 하며 엄마라는 이름에 쓰인 코르셋을 열심히 벗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 코르셋을 벗는 그 일련의 과정은 수많은 관계들과 조율이 필요해서 때론 지칠 때도 있지만, 우리가 다른 의문을 가진다면 그리고 이런 작은 목소리들이 공론장에 선다면 분명 변화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거시적인 권력관계의 뒤엎음도 필요하지만 가정과 살림, 육아, 성 등 미시적 관계에 관한 반성과 통찰 없이는 여전히 누군가의 ‘희생’이 담보 잡혀 있는 반쪽짜리 평등일 것이다. 그럼 어째야 할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반성과 고민의 주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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