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절된 역사는 반복된다

[양규헌 칼럼] 권력 중심의 이동에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 이유

인간의 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규정되고, 그 기준은 현재에서부터 출발한다. 지나간 과거를 살펴보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우리 관점으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과거와 상호작용하는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역사를 기록하는 자는 누구일까를 생각하면 역사가 왜 지배계급 중심으로 기록돼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역사를 쓴다는 것은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을 통해 현재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상호 작용한다는 생각에서 기록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때문에 현재의 한 부분, 지금의 현재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역사에서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복원하지 않는 이상, 역사는 지배계급 중심으로 쓰여진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전주시청 앞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재주 씨에 이어 해고된 택시노동자들이 완전월급제 시행을 요구하며 전주시청 점거농성하고 있다. [출처: 김한주 기자]

문정왕후의 개혁성과 국정 농단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4대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미사화)는 정치세력 간 갈등과 목숨을 건 정치투쟁이 500년을 훌쩍 넘긴 현재보다 더욱 더 과격했고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남존여비, 삼종지도라는 절대원칙을 설정했던 유교의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받았던 엄혹한 상황에서도 문정왕후, 신사임당, 황진이, 명성왕후 등 재기발랄한 몇몇 여성들은 사회의 완고한 벽을 뚫고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지난 탄핵국면을 경과하며 문정왕후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인간 평등이라는 불교의 이념을 받아들여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지 않았고 종친들에게도 관대했으며 여성인권신장에도 기여했다. 중종 사후 삼년상을 치른 뒤 출궁이 관례화되어 있는 후궁들을 만류하여 궁궐에 머물게 했고, 천출이었던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을 따뜻하게 대함으로써 그녀의 지극한 충성을 이끌어내며 정치적 동반자 반열에 올리는 조직적 감각도 뛰어났다고 보여진다. 문정왕후는 정치권력을 움켜쥐고 유교적 모순을 깨며 인간평등과 여권신장에 개혁을 걸었던 성과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만 정치적으로는 국정을 농단한 여성 중의 한명이다.

명종을 앞세우고 배후에서 수렴청정으로 정치 전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문정왕후는 정치적으로 적대관계거나 밉보인 사람들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것은 물론 살려두지 않았다. 제 친정 오라비 윤원로의 목숨까지도 빼앗았으니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상부 권력구조가 이러할 때,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 굶주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종과 명종을 거치며 권력의 정점에서 활약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이 박근혜와 최순실로 오버랩되는 것은 역사의 우연일까. 나아가 문정왕후와 함께 권력을 둘러싸고 국정농단을 일삼았던 간신배들의 행태와 현재의 사법농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투쟁을 통한 민중들의 계급의식

임꺽정에 관해서 소설자체가 허구이든 사실이든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봉건 귀족을 우월성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천민 계층을 이상화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집단의식을 현저하게 드러내었다는 게 중요하다. 민중들의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을 조직하고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 양반과 관아를 습격하여 곳간에 있는 곡식들을 배고픈 민중들에게 나눠주었던 행위는 그 자체가 계급투쟁이었다. 이런 임꺽정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관군에 대해 민중들은 조정이나 관가를 지지하기 보다는 임꺽정을 지지했다. 민중들은 시대의 모순과 착취에 맞서 싸우고 임꺽정을 응원했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임금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정치세력들 간의 투쟁은 오로지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살육도 마다하는 진흙탕 싸움일 뿐,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점이 역사적 상황이다. 임꺽정의 활약을 통해 함께 지배세력에게 맞섰던 백성들의 투쟁이 당 시대 직접정치의 한 부분이었다고 보여지며, 그 역사적 맥락은 현재 우리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본질이 승계되는 역사

이미 500년을 훌쩍 넘어선 조선의 정치상황이 자꾸 곱씹어지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구조적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권력이 동인에서 서인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정치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듯이 현실정치의 여야가 자리 바뀜을 해도 본질에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그 본질이란 정치가 지배계급에게 기득권을 보장하며 백성은 한낱 화풀이 대상과 희생양은 물론, 지배 권력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낚싯밥 정도로 취급했다. 굳건한 지배체제와 억압, 착취구조를 안착시키려고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강화시켜 저항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은 참담함의 연속이었다. 봉건시대의 사헌부나 형조는 지금은 정보기관과 사법부가 되어 그 기세를 떨치고 있다.

높고 웅장한 법원 처마에 걸린 평등, 자유, 정의라는 말은 지배 권력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구일 수는 있어도 노동자, 민중에게는 전혀 감흥이 없는 글씨들이다. 노동자 민중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장치들이 보호는커녕 감시와 억압하는 기구가 되어 군림한다. 이런 사실은 500년 전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는 정해진 패턴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민중들의 투쟁에 비례해서 발전과 퇴보를 거듭해 왔을 뿐이다.

생존권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을 특공대를 투입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세월호에서 수백 명이 수장되는 상황에서도 구출은 고사하고 안타까운 때 죽임을 이념논쟁으로 발전시켰던 기발한 발상들, 정리해고에 맞서 10 여년을 투쟁하다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30명 이상의 노동자와 가족이 목숨을 끊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그리고 KTX노동자들과 쌍차 노동자들은 10여 년의 긴 시간이 흐른 지금 원칙적으로 원상회복에 합의를 이뤘다. 이런 결과에 대해 다행이라는 평가와 함께 박수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밀려오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노동자에게 해고는 생존권 자체를 빼앗는 것이다. 그런 막무가네식 폭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투쟁에서 요구를 쟁취했다고 승리라고 평가할 수 없다. 삶의 기반자체를 앗아간 10여 년이 남긴 것은 인생의 굴곡에 아픔이 깊게 자리한다. 그 노동자와 가족이 겪었던 긴 세월동안 덕지덕지 쌓여진 상처는 누가 치유하는가. 어두운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겨진 깊고 깊은 절망은 누가 치유하는가. 소리 없이 소멸돼 간 그들의 청춘은 다시 돌아올 수 있는가.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말살하고 노동자 민중을 보호해야 할 국가와 자본이 저지른 반역사적인 행태는 범죄행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무도 당당하다.

노동자가 가꾸지 않으면 오욕의 역사는 반복된다

500년 이전의 조선시대는 지금과 체제도 다르고 권력의 형태도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 다만 방식에 변화만 있을 뿐이다.

봉건시대와 지금의 변화는 억압과 착취 기법이 세련됐으며 지주가 아니라 자본이 이윤배가를 위해 맘대로 쫓아내고 고용형태를 멋대로 주물러대는 변화이다.

노동자들의 사망률은 충격적임에도 정치권도 언론도 조용하다는 게 이상하다. 노동자의 목숨은 정치적 쟁점이 될 수도, 기사거리로 적합하지 않은 모양이다. 산재사망률이 EU국가들에 5배가 높아 전 세계에서 1위를 자랑한다. 장시간 노동 또한 메달감이다. 여기에 소득구조 불평등 또한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치권과 언론은 최저임금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정의에 대해 언론과 정치권이 몰라서 최저임금 동결을 선동하는 거 같진 않다. 영혼 없는 선동으로 친자본 기조를 분명히 하며 그들만의 질서를 구축해보자는 의도에서 언론과 합세하여 노동배제와 착취질서를 안착시키고 있다.

사화의 정점에 섰던 훈구파와 사림파가 뒤바뀌어 권력의 중심이 이동했다고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 이유나, 여야가 바뀌었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기본권이나 노동할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이 체제의 근본적인 질서를 바꾼 것이 아니라 착취와 억압구조를 존속하는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이러한 질서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굴절되고 가공된 역사는 지배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세운다. 지배계급이 기록하는 노동자 역사는 굴절된 형태로 변질되기에 노동자 역사는 노동자가 기록하고 보존해야 굴절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노동자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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