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경제(sharing economy)

[워커스] 워커스 사전

한동안 공유를 파괴하려고 그토록 안간힘을 쓰던 경제학자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일제히 공유경제를 찬양하고 나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들 말로 공유경제는 ‘물건을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대여해주고 차용해 쓰는 개념으로 인식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이 공유경제가 미래유망산업분야가 될 것이니 투자도 하고 창업도 하라고 한다. 개념정의만 보면 공유경제는 ‘착한 자본주의’ 혹은 ‘대안적 자본주의’의 가능성마저 보여주는 듯하다. 공유경제의 실제 모습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유’라는 단어에서 연상할 수 있는 기본적 관념에 기대어 ‘공유경제’를 이해했고 따라서 그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 정도 외에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이 새로운 경제모델을 수용했다. 그런데 새로 유입된 공유경제와 원래 갖고 있던 공유의 개념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

첫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유’란 ‘모두의 것’이란 의미다. ‘공공의 것’이며, ‘공공재’이고, ‘공공자원’이다. 하늘과 강과 숲과 물이 모두의 것이듯 모든 사람에게 필요해서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도록 공공의 것으로 소유하고, 함께 관리하는 것을 우리는 ‘공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내가 사는 산촌에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유’의 개념이 그렇다. 마을의 수로는 마을 사람들 전부를 위한 것이고, 다 같이 쓰는 것이며 그래서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함께’라는 의미이다. ‘함께’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어원 ‘콤(com)’이란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코뮨, 코뮤니즘, 코뮤니티는 모두 그런 뜻의 ‘공유’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모두의 것을 함께 쓴다는 이 공유 개념은 언제나 ‘무상’이나 ‘공짜’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공기나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공짜이듯이, 공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거나 최소한의 관리요금만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시설을 무상이나 아주 싼값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함께 만들어서, 함께 관리하고, 함께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공유경제라 하는 것은 정반대이다. 공유하기 위해서 비용을 지불한다. 지금 쓰는 이 ‘공유경제’라는 말에는 그 단어 자체에 이미 공동(com)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이 단어는 ‘셰어링 이코노미(sharing economy)’의 번역어다. 공유경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모델들도 셰어하우스, 셰어 오피스, 카셰어링 같은 것들이다. 에이비앤비(Airbnb)가 처음 나왔을 때 ‘집을 공유’하는 놀라운 아이디어라고 했고, 우버(Uber)는 차량 공유라고 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는 세금 없는 숙박임대업이었고 우버 역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한 주문형 택시 서비스였다. 셰어한다는 것은 공유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가장 큰 차이는 공유를 거래하는 것이다. 이 공유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의 것’이 아닌 ‘각자의 것’을 공유한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각자가 제공하는 수요와 공급, 더 정확히 말하면 각자가 필요로 하는 수요와 공급의 ‘정보’다. 우버 택시 이용자들은 택시 정보를 ‘공유’한다. 우버 택시 기사들은 고객 정보를 ‘공유’한다. 그러나 집적된 데이터는 플랫폼을 제공한 우버 회사가 ‘독점’한다. 개인들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정보이용료까지 내는 셈이다. 플랫폼에서 누구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이용자들 사이에 경쟁이 무한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경쟁은 치열해진다. 노동을 공유할수록 노동자들의 경쟁은 치열해진다. 이것을 과연 ‘공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공유시장에서 사람들은 누구와 무엇을 공유하는가?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 남는 것을 타인과 공유한다고 하지만 우버 택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유휴노동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며 셰어하우스나 셰어오피스의 건물주 역시 불필요한 공간을 타인을 위해 선의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사람들과 남는 것을 나눠 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이 가진 모든 자원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파는 것이다. 그래서 피터 플레밍은 “공유경제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약탈”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우버(Uber)’라는 차량공유서비스를 세금 사기꾼 이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1) 고용주가 지불해야 할 복리후생비용과 고용비용을 모두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세금을 회피하며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일리노어 오스트롬은 세계적인 민영화 시기에 공공영역을 공격하는 상징적 우화였던 ‘공유지의 비극’ 가설을 반박할 수 있는 공공관리의 사례들을 연구했다.2) 공유지의 비극이란 사유지가 아닌 공동방목지에서는 개인들이 각자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양을 방목하고 결국 황폐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스트롬의 연구는 내부적으로 자율적 규칙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공동체 안에서는 하딩이 말한 그런 공유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규칙(rule)을 만드는 사람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일치한다는 이 자치의 원리는 지배하는 자가 동시에 지배당하는 자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유시장에서는 규칙을 수립하는 자와 준수해야 하는 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규칙은 시장이 정한다. 에어비앤비 이용자들은 어떤 규칙도 변경하거나 함께 모여 새로 만들 수 없다. 철저히 시장의 질서가 지배하며 그 지배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다. 지금 공유를 생각할 때 결정적으로 문제되는 것도 이 탈정치화된 사고다. 공공재를 사유의 총합으로 보고 각자가 그것에 대해 1/n의 몫으로 지분을 가진 것으로 계산할 뿐, 분배의 규칙을 누가 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빠뜨린다. 이것이 두 번째 차이다.

세 번째 차이는 ‘공익성’의 개념이 사라지고 ‘수익성’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공공성의 이념은 항상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것은 단지 수혜자가 소수냐 다수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시설이나 활동이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라 다수 일반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편익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공영주차장, 공공미술관, 공공체육관, 공공의료기관 등 ‘퍼블릭(public)’에 들어있는 공공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공영과 공용으로서의 공유 개념은 공익성의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지 수익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의 공유엔 그런 공익성의 개념이 없다. 물론 공익성과 공공적 가치는 끊임없이 언급되며 실제로 공익적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도 있다. 그러나 사적 기업이 공익적 재화를 공급하며 수익성을 올릴 수 있는 구조 이면에는 대부분 공적인 재정 지원이 뒤따른다. 그런 방식은 공공재와 공공자원관리를 외주화해 시장원리에 따라 사회적 자원을 재분배하게 된다. ‘교육지원사업’이란 이름으로 교육부나 지자체가 교육업체들을 지원하고 그 업체들이 공공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위탁형 교육시장 모델은 그런 공유경제의 대표 사례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차이는 관계와 개인성 중 무엇을 강화하느냐다. 공동체를 유지해온 공유경제에서는 관계의 지속성과 공동체 구성원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공유경제라 불리는 상업은 각자의 편익을 취하는 고립된 개인들의 거래로 이루어진다. 물론 그 속에는 ‘공익적 가치’ 같은 것을 구매하고 싶은 소비자도 있을 수 있고, 공유경제는 그런 소비자를 겨냥한 ‘착한 소비’ 마케팅을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유의 시장이 요구하는 ‘신뢰’라는 것은 관계를 쌓기 위한 신뢰가 아니라, 익명의 거래자에게 사기당하지 않기 위한 지불보증으로서의 신용 증명일 뿐이다. 이런 임대경제는 결국 ‘공공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것조차 모두 박탈해 남의 것을 빌려 쓰는 ‘임대생활자’로 생활방식을 구조조정한다. 필요한 생활수단과 생활기술을 모두 ‘렌탈’로 대체할 수 있다는 건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절대적으로 ‘화폐’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공유경제는 민영화의 새로운 단계이며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소유하지 말고 나눠쓰자 – 사실은 빌려 쓰자’는 이 구호는 개인의 무소유에 대한 찬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고용 회피와 무책임을 은폐하는 말이며 연대성과 관계성을 박탈하고 화폐의 힘을 강화하여 개인들을 더욱 고립화하고 무력화하는 기술을 ‘공유’라는 상징조작을 통해 정당화한다. 형식적 방법만 공유라고 다 공유라 할 수는 없다. 공유의 철학과 가치가 있어야 한다. 공유경제는 애초에 잘못된 번역이었고 무분별하게 사용됨으로써 대혼란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원래 갖고 있던 공유의 개념까지 훼손한다. 지금 공유경제라 말하는 것은 공유를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방법론적 혁신일 따름이다. 이것은 ‘공유를 파괴하는 경제’이며 ‘공유의 시장화’다.[워커스 47호]


[각주]
1) 피터 플레밍 지음, 박영준 옮김. 『호모 오이코노미쿠스의 죽음』(한스미디어 2018)
2) Elinor Ostrom.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한국어판으로는 윤홍근·안도경 옮김. 『공유의 비극을 넘어』(랜덤하우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