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와 가짜 뉴스 사이에서―미디어 포퓰리즘

[워커스] 기술문화비평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팩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팩트 그 자체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논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주로 무언가를 곡해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불화하는 젊은 보수주의자들이었다고 기억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고 팩트 자체가 변하거나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팩트를 소유하고 팩트를 자기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면 무조건 옳거나 논쟁에서 승리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 팩트라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팩트를 대하는 관점이나 위치에 따라서, 그리고 사회적 합의나 역사적 통념에 따라서 팩트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어떤 사태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묘사하는 것이 그 자체로 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 있다. “나는 팩트를 말한다”는 진술은 전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당연하다. 그리고 “어제 눈이 왔다”는 진술이 나에게 혹은 나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에게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진술을 듣는 모두에게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이런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진술이라면 사정은 더 복잡해진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대가 투입돼 민주화를 열망한 다수의 시민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는 누군가의 진술은 역사적 사실, 즉 팩트로 인정된다. 그것은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온 동력이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팩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팩트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다른 팩트, 다른 목적을 가진 팩트를 만들어낸다. “1980년 5월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내려와서 폭도들과 함께 우리 군인들을 공격했다”와 같은 진술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이라는 팩트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발생했거나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 전체가 인정하는 그 팩트는 진정한 팩트가 아니며 자신들은 그러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대안 사실(alternative fact)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팩트를 대체하는 다른 대안적인 팩트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일부 보수 정치인들이 마치 대안적인 팩트인 양 허위 사실을 조작하면서까지 애초의 팩트를 무화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정치·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트럼프가 미국 및 국제 정치의 핵으로 등장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그리고 대통령 당선 이후 지금까지 줄곧 자신의 정치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은 이주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유산들을 포용하고 존중함으로써 국가 체제가 구축됐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등장과 함께 미국적 가치관들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투쟁해서 쟁취해야 할 것으로 변하고 있다. 대신에 그동안 은둔해 있던 백인 우월주의와 외국인·이주민 배척주의, 인종주의와 여성혐오가 땅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시대적, 비민주적, 반역사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퍼트리는 것이 다름 아닌 가짜 뉴스와 대안 사실들이라는 점이다.

전 세계 수많은 개인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SNS나 소셜 미디어에 긴밀히, 그리고 일상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에서 특정한 주장이나 의견은 어느 때보다 더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퍼져나간다. 과거 국가나 거대 언론, 혹은 소수 엘리트의 손아귀에 놓여있던 정보는 이제 누구나 생산하고 공유하며 접근 가능한 것으로 거듭났다. 더구나 무수한 사용자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으로, 자신을 전시하는 디스플레이로, 그 안에 거주하는 공동체로 활용하는 각종 미디어 플랫폼들은 특정한 의도를 가진 이들이 생산한 왜곡된 정보를 접하기 용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특정 세력은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 광고인지 정보인지 알기 어려운 포스팅을 게시했고 이는 개인의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교묘한 조작 방식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댓글공작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던가.

친밀한 SNS를 통해 접하게 되는 가짜 뉴스들은 심지어 가짜 미디어와 가짜 언론을 통해 생산되고 전파된다. 사용자들의 심리적 취약점을 파고들어 어떤 것이 팩트인지 페이크인지 구분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흔히 말하는 레거시 미디어, 즉 정통 언론의 본래 기능인 팩트체크가 언론사에서 유행하고, 이것이 마치 가짜뉴스 시대에 생겨난 언론의 새로운 기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든 자신만의 미디어를 통해 자기 생각을 표출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 무엇을 진실 혹은 거짓이라 할지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이런 포스트-팩트의 시대가 공론장으로 불러내는 수많은 자기 자신의 나팔수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조회수를 위해, 즉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유명인이 되기 위해 (이미 유명하다면 더 많은 유명세와 돈과 권력으로 인도해줄 더 큰 숫자를 위해) 거짓 선동이나 재미를 위한 자극적인 행위들을 서슴지 않는다. 미디어 플랫폼의 형식은 감각에 반응하고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대중들을 볼모로, 광고라는 자본주의적 매개와 공론장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효능에 최대한의 자유도를 선사한다. 미디어는 포퓰리즘을 극대화함으로써 자본과 정치권력을 짝지어준다.

포스트-팩트의 시대에 더 이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니체가 예견했듯이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해석과 관점만 존재하는 에코채임버(echo chamber)1) 안의 세계를 깨트리고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보이는 것들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알고리즘 지배체제를 벗어나 팩트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미디어 포퓰리즘의 눈사태 속에서도 ‘즐거운 지식’을 버리지 않으면서 혐오를 재생산하지 않는 묘안을 찾아내야만 한다.(워커스 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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