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죽음을 밝히기 위해, 오늘보다 내일 더 강해질 것”

[인터뷰] 문중원 열사 부인 오은주 씨

한국마사회 문중원 열사가 사망한 지 58일 째. 그리고 열사의 유족들이 서울 광화문 고인의 운구차 옆에서 투쟁을 벌인 지 30일 째를 맞았다. 그동안 유족과 노조, 시민사회는 한국마사회의 사과와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제도개선을 요구해 왔다. 고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남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통상적인 요구였다. 적어도 설 전에는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이어졌다. 4박 5일간 과천경마공원에서 청와대까지 오체투지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한국마사회와 정부는 설 전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유족의 절박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날 당일인 1월 25일. 유족과 시민사회는 광화문 시민 분향소에서 합동 차례를 지냈다. 그리고 참담한 심경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설 전날까지도 교섭에 임했지만 결국 설 전 해결은 무산됐다”고 밝혔다. 이어서 “설 연휴가 끝나기 전까지, 고 문중원 열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교섭에 성실히 임하라”며 “그럼에도 마사회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마사회와의 교섭은 의미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설 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유족은 광화문 분향소 열사의 운구차 옆에서 또 다시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설 연휴 전날인 23일, 문중원 열사 부인인 오은주 씨를 만나 현재의 심경을 들었다.

[출처: 윤지연 기자]

“설 전까지 장례 치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마사회는 생각보다 너무 높은 산이었다.”

서울로 상경해 투쟁한 지 한 달이 돼 간다. 유족 분들 건강은 어떠신가.

나는 부산에서 왔고 시댁 어르신들은 제주도에서 상경하다보니 서울이 너무 춥다. 어른들께서는 감기에 조금 걸리신 것 같고. 그런 것 말고는 저나 어른들이나 잘 버티고 있다.

설 전에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지만 결국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이렇게 오래 투쟁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마사회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높은 산 같다. 이럴 줄은 몰랐다. 내일은 되겠지, 내일 모레는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다. 일곱 명이라는 기수와 마필관리사가 죽어도 바뀌는 것이 없다. 아무리 노동자들이 죽어도 이익만을 추구하는 뻔뻔함을 바꿀 의향이 없어 보인다. 특히 마사회는 공기업이다. 일곱 명의 노동자가 죽어나가는 문제에 대해 정부가 움직여줘야 하는데, 정부도 움직이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21일, 김낙순 마사회장 면담을 요구하며 렛츠런파크서울(한국마사회 본사)을 방문할 당시 폭력을 당했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

당시는 서울로 상경하기 전이었다. 김해 장례식장에 있으면서 부산경남경마장 본부장실에 가서 남편의 죽음에 대해 항의했다. 부산본부장은 자신들에게는 권한이 없으니 본사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래서 김낙순 마사회장을 만나러 본사로 올라온 것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이미 본관 앞에 경찰이 엄청 많이 있었다. 본사로 들어가 남편이 왜 죽었는지 들어야 했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사로 들어가려는 나를 경찰이 막았고, 경찰에 밀려 바닥에 주저앉게 됐다. 다리 밑으로라도 기어들어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다. 너무 억울한 마음에 기어가려고 하는데 밑에서 발길질이 시작됐다. 뒤쪽의 경찰은 내 머리를 잡아당겼고. 일어났더니 앞에 있는 경찰이 목을 졸랐다. 주위에서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도 속수무책이었다.

이후에도 마사회 본사를 방문 할 때마다 경찰 폭력이 있었다. 12월 27일 서울로 상경했을 때는 경찰이 고 문중원 기수의 운구차 견인을 시도하기도 했다. 1월 21일에는 청와대 인근 오체투지 행진을 막아서 충돌이 일었다. 경찰에 대한 분노도 클 것 같다.

경찰은 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시민들이 같은 생각일 거다. 힘든 일, 위험한 일이 생길 때 경찰을 찾지 않나. 그런데 경찰이 약한 시민들을 마구 폭행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평화 행진을 막아서는 행위를 보면서 우리나라 경찰이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권력자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경찰인가. 도대체 우리는 앞으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경찰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설명해야 하나. 이번 일을 겪으면서 경찰에 대해 가장 많이 화가 난다.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자’라던 남편. 옆에 남편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출처: 윤지연 기자]

지난해 11월 29일 새벽 고 문중원 기수가 사망했다. 전날 밤 10시까지 오은주 씨와 문자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특이사항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전날에도 평상시와 같이 일상생활을 했다. 유치원과 학교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마중 나갔고,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다 들어왔다. 집에서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그날 남편이 일정이 있어서 나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남편은 ‘갔다 올게, 안녕’이라고 했고, 나는 ‘잘 다녀와’라고 배웅했다. 그때 주고받았던 메시지도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같은 평범한 대화였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걸리는 말이 있었다. 남편이 죽음을 준비하며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니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자’라고 했다. 나는 정말 늦는 것으로만 생각해서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다. 그러다 새벽 5시쯤 잠에서 깨니 옆에 남편이 없더라. 전화기를 보니 동료한테서 전화가 많이 와 있었다. 다섯 시 반 쯤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탔다. 아이들 둘만 집에 남겨두고 허겁지겁 나왔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믿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믿어지지 않아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택시 타고 가는 길에 동료와 전화를 하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병원으로 데리고 가 달라. 병원 가면 살릴 수 있으니 단정 짓지 말자’고 했다. 동료 입장에서는 내가 억지를 쓰고 있다고 느껴졌을 거다. 진정하고 우선 집에 있으라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정말 병원 가면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 까지는 남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경찰과 119대원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들어가려고 하니 절대 보지 말라며 막아서더라. 누군가가 저를 부축해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의사가 들어와 사망 추정시간이 새벽 2시쯤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내가 왜 그렇게 푹 잤을까, 중간에 한 번이라도 깨서 남편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고인은 유서에서 마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폭로했다. 남편의 유서를 봤을 때 많이 놀라고 분노했을 것 같다.

내가 가장 먼저 경찰 조사를 받았다. 누가 사진으로 찍어 놓은 유서를 보내왔고, 조사 받으러 가는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남편 유서를 확인했다. 남편 유서를 보고 많이 울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 왔는지 몰랐다.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괜찮다, 괜찮다 라고만 했다.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죽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힘들어도 견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마사회가 사과할 줄 알았는데 누구도 오지 않았다. 남편도 억울한 죽음으로 잊혀질 것 같았다.”

[출처: 김한주 기자]

결국 유족들이 고 문중원 기수 사망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투쟁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

처음 유서를 봤을 때는 ‘싸워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 큰 충격에 빠져 있어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투쟁이라는 것은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것이었고, 관심 있게 본 적도 없었다. 경찰 조사를 받고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노조에서 위임장을 가지고 오셔서 설명을 해 주더라. 남편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노조에서 설명을 해 주는데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5일 간은 너무 정신이 없어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마사회 관계자가 와서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당연히 사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혼자 앉아있는데, 도대체 마사회라는 곳이 어떤 곳이길래 남편을 포함해 7명의 노동자가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조합에서도 당장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중원이의 죽음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다. 장례를 치르면 모든 것이 잊혀 질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채 6명의 죽음이 잊혀 졌듯, 내 남편의 죽음도 그저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나도 남편의 죽음을 밝히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만 14년 간 7명의 경마기수와 마필관리사가 사망했다. 고인이 평소 마사회의 부정, 비리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나.

기수로서 15년을 일했고,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수 생활을 했다. 결혼 전에 겪었던 일을 남편에게 들은 적이 있다. 조교사가 남편에게 몇 등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부당 지시를 했다고 들었다. 차는 브레이크가 있고 속력 조절이 가능한데, 말은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500키로가 넘는 말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정말 좋은 말이면 순위에 들 수밖에 없다. 결국 남편은 순위 안에 들었고, 조교사는 왜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느냐며 남편에게 화를 냈다. 남편은 잘못했다며 조교사의 집 앞까지 찾아갔는데 뭐하려 왔느냐고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했다. 가끔 남편은 ‘오늘은 3등하면 안 되는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3등 하면 상금이 나오고,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 것으로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출처: 김한주 기자]

부산경남경마장이 고 문중원 기수를 퇴역기수 명단에 올려놓았더라. 전체 퇴역기수 85명 중 통산전적이 3404건으로 가장 많다. 기수로서 남편의 삶은 어땠나.

남편은 2004년에 데뷔해 15년간 기수로 활동을 했다. 결혼 전후 1~2년은 말도 많이 타고 좋은 성적을 내는 실력 있는 기수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아픈 곳도 많아지면서 확실히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단 한번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어렵게 조교사 면허증을 취득했으나, 마방을 받지 못해 기수 생활을 계속 했다. 문제는 2015년 조교사 면허를 취득한 후, 기수로서도 기승 횟수가 현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조교사 면허증을 갖고 있는 기수는 곧 조교사가 될 사람이지 않나. 조교사들 입장에서는 경쟁 상대가 되기 때문에 남편에게 말을 잘 태우지 않았다. 면허증 취득 후에는 기수로서의 삶조차 예전 같지 않았다.

경마기수 산재율은 타 산업 평균재해율의 50배가 넘는다고 한다. 고 문중원 기수도 유서에 ‘허리 목 어디 성한 곳이 없다’고 썼다. 고인은 평소 어떤 사고를 겪곤 했나.

결혼 전에는 코뼈가 으스러졌고, 나와 만난 후에는 말에서 떨어져 허벅지를 꿰맸다. 목 디스크를 심하게 앓아 목이 뒤로 넘어 가지 않은 상태였다. 수술을 하면 긴 시간 말을 탈 수 없으니, 디스크를 앓으면서 생활했다. 남편이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여러 번 봤다. 말에서 떨어진 후 그렇게 아프지 않다 싶으면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그냥 참고 하는 거다. 기수는 위험한 업무를 하는 직업이라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남편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도 해 내더라. 오늘보다 내일 더 강해질 것”

[출처: 김한주 기자]

한국마사회와 정부가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사과 등의 요구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그 모든 것 자체를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만약 인정하게 되면 노동자 7명의 죽음이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래서 회피하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 정말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저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지난 1월 18일 열린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반드시 저 썩어빠진 한국마사회를 무너뜨리겠다’고 말했다. 마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마사회의 내부 구조적 문제를 바꾸지 않으면 누군가가 또 죽음을 선택할거다. 노동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마사회 내부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남편이 유서에 실명으로 거론했던 책임자의 처벌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은폐되는 비리와 부정들, 그리고 갑질 등이 없어져야 한다.

1월 6일부터 매일 청와대를 향해 ‘헛 상여 행진’을 벌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지난해 11월 31일부터 매일 문재인 대통령의 SNS로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내고 있다. 메시지가 전달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통령님 귀에 문중원 기수에 대한 이야기가 한 마디라도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와대로 행진할 때마다, 걸으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대통령이 제발 나서 달라’고 기도한다. 시청에서 청와대로 오체투지를 했을 때도, 청와대가 보이니 정말 마음이 간절해지더라. 여기까지 울면서 걸어왔는데, 제발 국민의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대통령이 문중원 개인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공기업에서 사망한 7명의 노동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대통령이라면 공기업에서 7명이나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나. 마사회 회장을 임명한 사람도 문재인 대통령이다. 충분히 책임이 있는 자리다. 문중원 기수가 사망한 지 60일이 다 되가는데도 한 번도 안 와주시는 것이 안타깝고 속상하지만, 들릴 때까지 몸부림치고 외칠 거다. 마사회를 갈아엎어야지, 무너뜨려야지, 라고 말했을 때 제 눈앞에 민주노총 조합원 몇 천 명이 있었다. 그 순간 너무 감격스러우면서도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낸다면, 정부도 움직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의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싸워나가고 싶나.

처음에는 투쟁을 하면서 몸이 힘들었다. 너무 힘들다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다 견뎠고 해냈더라. 처음에는 발언하는 것도 너무 두려웠다. 그런데 그것 또한 해내더라. 내가 남편을 위해서라면 마냥 두려워만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느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믿게 됐다. 제일 큰 힘은 아이들이다.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아이들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갈 수 없다. 지난 21일 오체투지 후 청와대에서 충돌이 있었던 그날, 정말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생각하며 참고 견뎠고, 결국 또 해냈다. 자꾸 오기가 생긴다. 처음에는 마냥 슬퍼했다면, 그리고 아직도 슬픔이 크지만, 이제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겠다는 마음이 제일 크다. 발언에서 ‘오늘보다 내일 더 강해질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늘보다 내일 더 강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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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창수

    설명절 11월이 아닌1월 25일입니다

  • 조언가

    작년에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가장 고생을 한 것 같습니다. 올해는 정국이 잘 풀릴 때는 한 시름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잘 풀리지 못할 때는 더 꼬여서 더 불안정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향후 정국은 총선의 결과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 조언가

    글을 훓어봤나. 글에 설이 11월이라고 한 내용은 없는 것 같은데.

  • 조언가

    해를 넘기자고 한 건 네들 아니었나, 이번만이라도 책임지고 해봐라. 세월은 자꾸 가는데 80,90살 먹을 때까지 계속 기회가 닿겠나. 니 성격을 보면 어떤 세계사의 예일지라도, 어느 국가의 유형일지라도 긍정성만 있으면 되겠구만. 잔머리만 굴리다가 "검은 머리 파뿌리"되면 누가 널 쳐다보겠어. 다른 사람 떠보지 말고 니 생각대로 일관성 있게 한번 밀어바라. 그래야 인정 또는 부정평가를 받을 것 아녀. (참세상 기사와 무관한 글입니다. 노조 자유게시판이 차단될 때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곳에 쓰게 되었습니다.)

  • 이창우

    승부조작을 지시하는 마사회를 이대로 두는 건 공정을 강조하는 정부의 태도가 아닙니다. 유족과 조합원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면 그것이 어떻게 ‘노동존중’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