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영웅 백선엽이 복무한 간도특설대는

[1단 기사로 본 세상] 중앙일보도 말린 조선일보의 백선엽 ‘파묘’ 논란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중국에선 1960년대 문화혁명 때도 간도특설대 복무자들이 거리에서 질질 끌려 다니며 얻어맞았다. 그러나 한국에선 간도특설대가 역사 청산의 대상이란 공론조차 일어나지 못했다.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파들은 은폐를 넘어 간도특설대가 민족의 자랑거리였느니, 민중의 편이었느니 하는 거짓말로 추악한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한다. 항일 투사들을 죽인 친일파들이 ‘공비 토벌’이란 말 바꾸기로 장난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조선일보는 5월 28일 6면에 “향군 ‘백선엽을 친일파 모는 건 대한민국 국군 부정’”이란 제목으로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을 또다시 엄호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백선엽을 대한민국 국군 창군 멤버로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인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평양 진공 작전의 선두에 선 영웅으로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2단짜리 작은 기사에 그치지 않고, ‘백선엽 장군이 현충원 못 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 아니다’는 제목의 사설로도 백선엽을 엄호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간단하다. 국가보훈처 직원들이 지난달 13일 백선엽을 찾아가 “현충원에 안장됐다가 다시 뽑아내는 일이 생길까 걱정된다”고 말했다는 거다.

그러나 다음날인 5월 29일 중앙일보는 10면에 “백선엽 ‘어떤 특혜 없이 대전현충원에 묻히고 싶다’”제목의 기사에서 전날 조선일보가 인용한 보훈처의 ‘파묘’ 발언은 사실이 아니라고 사실상 정정했다. 중앙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백 장군 측 관계자는 보훈처 측이 ‘백 장군이 현충원에 안장됐다가 뽑혀 나가는 일이 생길까 걱정된다’고 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그런 발언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보훈처는 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이 꽉 차서, 백 장군이 별세하면 대전현충원에 안장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게 조선일보 기사에선 ‘파묘’ 논란으로 확대됐다.

조선일보는 5월 28일자 사설에서 “(여권 지지세력들이) 그(백선엽)의 공훈에는 눈을 감고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한 기록만 부각시켜 ‘독립군 토벌 친일파’라고 한다. 이렇게 친일파 공격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작 자신의 부모가 진짜 친일파인 경우가 숱하게 드러났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건 팩트다. 친일파 자손은 친일파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조선일보 논리도 이상하다. 친일파 자손이 조상의 죄상을 대신 사과하고 친일파를 공격한 사례는 종종 있었다. 조선일보는 “당시 중공 팔로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했다”는 백선엽의 주장에 기대어 자기 주장을 편다.

  조선일보 5월 28일 사설(왼쪽)과 6면 기사

  중앙일보 5월 29일 10면

백선엽이 복무했다는 ‘간도특설대’는 어떤 단체였던가. 간도특설대는 1930년부터 만주에서 주로 활약한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였다.

중국의 러허 성은 1955년 허베이 성과 랴오닝 성, 내몽골 자치구로 나눠 사라진 행정구역이다. 일본은 1943년 2월 보란 듯이 러허 성 침공을 강행했다. 백선엽은 일본어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간도특설대가 러허로 이동한 시기를 1944년 늦가을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1943년의 착오다. 간도특설대가 1진으로 배치된 건 ‘대게릴라전의 명수’라서다. 백선엽은 책에서 러허로 들어와 “작전 지역은 팔로군으로 뒤덮인 ‘붉은 바다’였다”고 적었다. 조선일보가 기사에서 인용한 ‘중공 팔로군과 싸웠다’는 백선엽의 주장과 같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는 민중의 편, 팔로군도 민중의 편, 민중의 편은 민중의 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엉터리 논리를 폈다. 간도특설대의 악행은 굳이 중국 쪽 기록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

1930년부터 조선일보 지면에도 간도 얘기는 자주 등장한다. 1930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기림이 처음 특파원으로 출장 취재에 나선 게 1930년 5.30 폭동 현장이었다. 당시 간도엔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인 지주의 수탈과 일본과 중국 관헌들의 폭압, 마적떼 약탈까지 당하며 힘들게 살았다. 조선인 농민들이 견디다 못해 5.30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중국인 지주들에겐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관청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2천명의 조선농민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수많은 농민이 중국인에게 학살당했다. 폭동의 현장을 찾은 김기림은 조선일보에 1930년 6월 ‘간도기행’ 11편을 연재 보도했다. 동아일보도 1930년 간도 폭동을 심층 보도했다가 정간 당했다.

3년 뒤 조선일보 기자 한설야도 간도 취재에 나섰다. 한설야는 1933년 9월 24일 밤 11시 55분 간도의 ‘팔도구 습격사건’을 취재하라는 회사의 전보를 받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팔도구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해방을 함흥에서 맞은 한설야는 김일성과 함께 북한 정권 수립에 나섰지만 1963년 숙청됐다.

평양 을밀대 고공농성으로 유명한 여성노동자 강주룡도 14살 때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백광운 부대원과 결혼해 1년을 전장에서 지냈다. 남편이 전사한 뒤 친정 평양에 돌아와 1931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가 됐다.

간도에서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한 게 간도특설대다. 신현준은 간도특설대에 복귀해 러허 성에서 토벌작전에 여념이 없던 1944년 3월 상위(대위)로 승진했다. 신현준은 여기서 박정희 중위와 이주일 중위를 만났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전면 진공이 시작되자 일본 대본영은 조선군을 개편한 17방면군을 관동군 전투 서열에 편입시켰다. 간도특설대는 천황의 항복 소식을 듣지 못해 해방 뒤에도 토벌작전을 계속했다. 간도특설대에 일본의 항복을 알려준 건 팔로군이었다. 신현준, 박정희, 이주일은 1945년 9월 부대를 떠나 함께 귀국 길에 올랐다.

간도특설대는 1945년 8월 26일 진저우 교외에서 부대 해산식을 갖고 일본인 장교들이 이탈한 뒤 선임 중대장인 김백일(본명 김찬규)이 해산시켰다. 해산 뒤 백선엽의 귀국경로는 일어판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 상세히 나온다. 백선엽은 1945년 봄 간도특설대를 떠나 예지로 전속돼 국경 경비임무를 맡았다. 만주군 중위였던 백선엽은 출장 중 지린 역에서 8월 15일 이미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들었다. 옌지에 살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8월 15일 열차편으로 출발해 바로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는 소련군이 점령 체제를 갖추기 전에 재빨리 만주를 벗어나 9월 초 평양에 도착했다.

김석범은 러허 성으로 옮긴 간도특설대의 정보 책임자였다. 김석범은 패전 뒤 중국인의 약탈과 보복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신징에 보안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았다. 김석범이 편찬한 ‘만주국군지’엔 신징 보안사령부 41명의 한국인 명단이 있다. 여기엔 전두환의 장인 이규동과 그 동생 이규광도 있다. 이규동은 육사 2기, 이규광은 3기로 준장까지 올랐다.

김석범 등 신징 보안사령부 관련자는 1946년 3월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는 당시 7살이었다.

간도헌병대장을 지낸 정일권은 소련군에 잡혔다가 탈출해 1945년 연말 서울로 돌아왔다. 정일권은 1946년 1월 서울에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남한에서 화려한 군 생활을 시작해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간도특설대 장교였다가 1944년 8월 만군 보병 8단으로 옮긴 신현준은 이주일과 박정희 중위를 만났다. 셋은 1945년 9월 광복군에 들어갔다.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본 군인들이 광복군으로 탈바꿈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만주국 해체 때 대위였던 신현준과 김석범은 해군에 들어가 해병대 1, 2대 사령관이 됐다.

간도특설대 하사관에서 출세한 사람도 있다. 임충식과 서종철은 간도특설대 하사로 출발해 해방 뒤 육군대장과 국방장관까지 올랐다. 간도특설대 하사 김대식은 1957년 9월 해병대 3대 사령관이 됐다. 해병대는 1, 2, 3대 사령관이 모두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김대식은 1987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의 안보특보로도 일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화려했다. 백선엽은 해방 직후 조만식의 비서로 일하다 1945년 12월 김백일, 최남근과 월남해 군사영어학교에 나란히 들어갔다. 백선엽은 군내 좌익 숙청 때 박정희를 구명했다. 한국전쟁일 일어났을 때 대령이던 백선엽은 전쟁 중에 초고속 승진해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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