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

[녹색스트라이크]

작년 이맘때만 해도 ‘기후 위기’나 ‘그린뉴딜’은 극소수만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안 되는 기간 큰 변화가 있었다. 정부의 그린뉴딜 발표와 함께 기후 담론은 금방 주류화됐고 언론 보도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기후 위기 대응 전선에 뛰어들었으며, 국회는 에너지 전환 법안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는 포스코를 비롯해 온실가스 다배출 대기업들까지 ‘탄소 중립’을 표방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기후 위기 대응에 발 벗고 나서는 형국인데, ‘기후 붕괴’를 우려하고 ‘기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기후활동가들의 절망은 커져만 간다. 이와 함께 이들의 요구와 행동도 급진화 돼 간다.

[출처: 멸종반란한국]

실제로 국회에서 ‘2050 장기저탄소발전전략 (LEDS) 공청회’가 열렸던 지난 11월 19일, 한 무리의 멸종반란한국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목을 국회 정문에 걸어 잠그는 행동을 벌였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정치권의 직무유기를 규탄하고 기후 위기 주범인 재벌을 살리고 고탄소 산업-에너지 구조의 존속에 우선 순위를 두는 2050 탄소 중립 목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먼 미래의 탄소 감축 목표 대신 “지금 당장 급진적 탄소 감축을 위한 혁명적 변화”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날 한국 기후운동 사상 최초로 11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해외에서도 불만의 목소리는 크다. 지난 12월, 파리협약 5주년을 맞아 청소년 기후 파업을 주도했던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 ‘1.5를 위해 투쟁하라’(#FightFor1Point5)란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들은 국제사회 지도자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며 기후 위기 대응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며 모두의 안전과 정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더 강한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레타 툰베리는 “우리 민중(we, the people)”을 운동의 주체로 호명하며 아래로부터의 행동만이 희망이라 강조했다. 이들이 내건 목표는 “급속하고 근본적인 체제변화”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부나 기업, 시민사회가 화석연료의 의존에서 벗어나 재생 에너지로 전환하자고 이구동성 외치고 있는데, 왜 기후활동가들은 체제변화를 이야기할까? 2015년 파리협약과 2018년 IPCC 특별보고서의 제안이 보수적이고 안이한 예측에 기초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멸종반란한국도 국제사회의 대응이 “영구동토층의 해빙으로 인한 메탄 유출 등 예측하지 못한 온실가스 추가 발생 요인의 계산이 배제된 셈법”에 의존하고 있다며 확률론에 기댄 대응을 ‘반생명적’이라 비판했다.

그런데도 각국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기 짝이 없다. 툰베리는 정부와 기업이 “창조적 회계”를 통해 수치 놀음을 하며 빠져나갈 구멍만 만들고 있으며, 그 결과 파리협약 이후의 5년이 “지구상 가장 뜨거웠던 5년”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생물 종의 멸종, 영구 동토층 해빙, 열대우림의 파괴는 계속되고, 기후재앙 피해는 여전히 빈자들이 떠맡는 부정의가 지속하고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란 구호가 들려온다.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현 체제로는 기후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기에 탄소 중립을 위해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체제변화’ 혹은 ‘변화된 체제’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기후-생태 위기를 낳은 인간 중심주의와 무한 성장주의를 대체하는 생태주의 체제다. 인간은 너무 오랫동안 동물을 포함한 자연환경을 이윤과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혹은 수단으로 삼아왔다. 우리는 이것의 결과를 기후 위기와 감염병 시대에 이르러 배워가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체제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적 관계 재정립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파괴를 야기하는 과잉 생산- 소비 패턴을 벗어나야만 한다. 생태주의 체제는 사회적 필요에 따른 필수 재화의 생산을 중심으로 덜 생산하고 덜 쓰는 사회경제 체제다.

모두가 가난해지자거나 모든 성장을 멈추자는 뜻이 아니다. 파리나 바르셀로나 등에서 추진된 ‘15분 도시’의 사례를 보자. 이는 자전거로 15분 이내에 집과 일터, 학교와 시장 등을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지역 공동체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리듬을 찾고자 하는 시도다.

파리는 더 나아가 시내 차량 통행 제한, 디지털 광고판 퇴출, 대형 토건 사업 중단, 공공주택과 도시농업 확대 등을 통해 물신주의적 풍요가 아닌 새로운 풍요의 개념을 모색한다. 경제의 로컬화를 통해 생산과 소비를 줄이지만 모두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는 강화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충분한 부가 축적되어 있다. 생태적 경계 안에서 경제 운용의 방식과 얼개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모두가 풍요롭게 사는 사회체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둘째는 구조화된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평등주의 체제다. 기후 위기 극복과 불평등 해소를 함께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불평등이 기후 위기 극복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대량 생산을 통한 값싼 에너지와 재화, 식품(특히 육류)의 공급이 빈곤 유지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빈곤 철폐 없이는 생태 파괴적인 대량 생산체제의 전환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빈곤과 삶의 불안정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동의와 참여도 어렵게 한다.

이런 이유로 버니 샌더스는 ‘21세기 경제적 권리장전’을 통해 생활 임금이 보장된 일자리, 의료, 교육, 주거, 깨끗한 환경, 그리고 노년의 안정이 권리로 보장되는 체제가 미국 그린뉴딜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로나19로 촉발된 재난연대세, 기본 소득, 참여소득,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보장, 탄소 배당금 등을 둘러싼 논의는 평등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첫걸음이다. 더 나아가 새로운 평등 체제는 근원적 수준에서 인류를 구조화된 불평등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체제는 민주주의 체제다. 한국 사회의 정책 결정은 국가 관료와 민간 기업, 그리고 이들과 연결된 소위 전문가들이 밀실에서 진행하는 박정희식 모델을 벗어난 적이 없다. ‘협치’나 ‘공론화’는 이미 정해진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외피로만 활용될 뿐, 정작 중요한 정책 결정에선 아래로부터 의견이 수렴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끊이지 않는 민중들의 고공농성, 장기투쟁, 오체투지, 단식 등이 그 증거다. 몸을 축내며 미친 듯이 싸워야 말할 기회가 열리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부재는 기후 위기 대응에도 장애가 된다. 관료나 재생 에너지 사업자가 주민을 배제하고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주민 수용성 절차를 밟으면 저항이 일어나고 전환은 늦어진다. 배제되고 대상화되는 건 재생 에너지 시설이 들어설 지역 주민만이 아니다. 에너지 전환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노동자들도 똑같은 처지다. 당장 문 닫게 될 사업장은 수두룩한데 정책 결정권자 누구 하나 노동자와 상의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저항은 피하기 어려우며, 전환은 당연히 지체될 수밖에 없다. 급속한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도, 전환 이후 에너지 체계의 관리를 위해서도 분권과 자율, 민주적 참여와 통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필수적이다.

기후 위기와 경제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는 지속가능성의 위기다. 그리고 이는 기후, 환경, 사회적 부정의를 구성 요소로 삼는 현 체제가 위기에 처했음을 드러내는 징표다. 체제변화 없이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는 이유다. 지금껏 기후운동은 위정자들을 향해 기후 위기를 제대로 인식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체제 위기를 위기로 제대로 인식하라고 요구할 때다. 이를 돕기 위한 우리의 역할은 체제 위기를 가중하기 위해 운동의 역량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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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철(독립연구자,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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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민주주의의 부재는 기후 위기 대응에도 장애가 된다. 관료나 재생 에너지 사업자가 주민을 배제하고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주민 수용성 절차를 밟으면 저항이 일어나고 전환은 늦어진다. 배제되고 대상화되는 건 재생 에너지 시설이 들어설 지역 주민만이 아니다. 에너지 전환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노동자들도 똑같은 처지다. 당장 문 닫게 될 사업장은 수두룩한데 정책 결정권자 누구 하나 노동자와 상의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저항은 피하기 어려우며, 전환은 당연히 지체될 수밖에 없다. 급속한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도, 전환 이후 에너지 체계의 관리를 위해서도 분권과 자율, 민주적 참여와 통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