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야 겨울이다

[유하네 농담農談]

  겨울을 만난 유하와 세하 [출처: 이꽃맘]

달팽이도 쉬어가는 겨울

“엄마, 달팽이는 어디로 갔어? 달팽이는 비를 좋아하는 데 달팽이는 눈도 좋아해?”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세하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묻습니다. 달팽이는 어디로 갔다고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추운 겨울이니까 어디서 쉬고 있겠지. 따뜻한 봄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합니다. “그럼 달팽이는 죽은 거야? 나 어제 달팽이 집 봤는데 달팽이가 없더라고.” 세하가 질문을 이어갑니다. 참 어려운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어디 따듯한 곳에 모여 자고 있을 거야” 하니 “아! 겨울잠 자는구나. 유치원 선생님이 그러는데 곰은 겨울잠을 잔대. 달팽이도 겨울잠을 자는구나” 합니다. 유하네도 겨울이면 잠이 길어집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유하네 밭은 해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의 길이에 따라 노동시간이 정해집니다. 해가 길어지면 자연스레 밭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면 일찍 집으로 들어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추워진 날씨에 식물들도 씨앗을 남기고 휴식에 들어갑니다. 씨앗 속에서 추운 겨울을 쉬며 힘을 모은 식물들은 따듯한 봄에 새싹으로 살아납니다.

나무도 땅도 식물도 쉰다

겨울에는 땅도 쉬어갑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땅이 서서히 얼어갑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 호미 끝 하나 들어갈 수 없이 딱딱해지죠. 마치 일 년 내 고생한 땅이 ‘인제 그만!’을 외치는 것 같습니다. 땅은 겨우내 얼고 녹고를 반복하며 부드러워집니다. 쉼을 가지며 봄을 준비합니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흙은 더 부드러워지고 갈라진 흙 사이로 새로운 힘이 모입니다.

얼마 전 코로나로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과 집 인근의 섬강변을 산책했습니다. 고니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큰 백조들이 앉아 있는 멋진 강입니다. “우와 백조다!” 아이들이 소리치니 “동물원에서만 보던 백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우리 동네 진짜 멋지다”하고 답합니다. “나 어제도 학교 버스 타고 가다가 봤는데”하고 세하가 으스댑니다. 강 주변 나무들을 보며 유하 아빠가 “겨울나무도 멋지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를 보면 편안히 쉬고 있는 것 같아”합니다. 유하는 “가지만 있는 게 하나도 안 멋져, 빨갛게 노랗게 단풍도 들고 해야 예쁘지” 합니다. 유하 아빠가 “겨울에 쉬어야 봄에 새잎을 만들지. 새잎이 나와야 단풍도 드는 거고. 지금 나무들은 내년을 위해 쉬고 있는 거야. 아빠도 겨울에는 푹 쉬어야겠다”하니 “아빠는 맨날 쉬는 거 아니었어?”하고 유하가 웃습니다.

비닐이 만들어낸 사시사철 푸른 채소

비닐하우스 농사가 많아진 요즘은 땅도, 씨앗도, 농민도 겨울이라고 쉴 수가 없습니다. 사시사철 푸른 채소를 만들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비닐하우스에는 휴식이 없습니다. 한 식물을 키워내고 힘을 잃은 땅에는 비료와 퇴비가 뿌려집니다. 땅이 스스로 힘을 회복해 식물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퇴비와 각종 화학비료의 힘으로 식물이 키워집니다. 까맣게 퇴비가 뿌려지고 커다란 트랙터가 지나다니며 딱 식물이 클 만큼의 깊이만큼만 땅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석유를 태우며 강제로 난방을 하고 불을 환하게 켭니다. 식물이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사시사철 자라게 만듭니다. 수입이 적고 불규칙한 농민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아니 이제는 당연해진 선택입니다. 이렇게 비닐하우스에서 키워진 채소들 덕에 제철 채소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겨우내 땅바닥에 딱 붙어 파란 잎을 지키고 6월이 돼야 빨간 열매를 맺는 딸기는 이제 겨울이 제철이라 합니다. 땅이 아닌 하우스 안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 물을 통해 쉽게 영양소를 빨아들입니다. 대부분의 딸기 농가들이 수경재배를 하죠. 한겨울에도 6월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 난방을 합니다. 빨갛고 커다란 딸기가 먹음직스럽지만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마트에 진열된 딸기를 보며 세하는 “엄마가 딸기는 여름에 먹는 거라고 했는데 왜 딸기가 있어”하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농한기가 사라진 농촌

봄부터 가을까지 온종일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농민들에게 농한기는 다음 일 년을 위한 쉼이었습니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농한기. 이웃집과 함께 따듯한 아랫목에서 일 년 내내 고생한 허리를 지지며 고구마며 가래떡을 구워 나눠 먹는 농한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한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그려보는 농한기가 사라졌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부추를 키우는 동네 선배 농부는 오늘도 하우스 안 새파란 부추에 물을 주고 있겠죠.

겨울이면 해콩으로 메주며, 청국장을 만들어 파는 유하네에게도 농한기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2월이면 대추나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밭 주변 정리도 해야 하니 1월 정도가 농한기입니다. “겨울에 쉴 수 있다는 게 농민의 최고의 장점 중 하나인 것 같아” 텔레비전에서 2모작, 3모작을 하며 쉼 없이 일하는 베트남 농민들을 보며 유하 엄마가 말합니다. 유하네는 이번 농한기에 커다란 종이를 펴 놓고 밭 그림을 그릴 계획입니다. 제철에 맞게, 식물이 자라는 시기에 맞게 어떤 작물을 키울지 1년의 그림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노동자도, 농민도 쉴 수 없는 한국

도시 노동자들도 쉴 수가 없습니다. 사시사철 돌아가는 공장과,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수 없는 도시의 불빛 때문에 농민에게도, 노동자에게도 쉼이 사라졌습니다. 새벽에 배송한다는 채소를 키우기 위해 농민은 쉬지 못 하고, 이 채소를 배송하기 위해 택배 노동자들은 밤낮이 바뀐 삶을 삽니다. 하루를 쉬면 하루만큼의 일당이 사라지는, 하루를 쉬면 하루만큼의 삶이 팍팍해지는 자본주의 세상 한국에서 쉼은 사치입니다.

그래도 이번 겨울은 모두에게 쉼이었으면 합니다. 코로나가 준 강제적 쉼일지라도, 하루하루가 불안한 쉼일지라도 쉬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암에 시달리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는 김진숙 씨에게도, 더 이상 죽어갈 수 없다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요구하며 국회 차가운 바닥에서 단식을 하고 있는 산업재해사망 유가족들에게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사드 기지를 온몸으로 막고 있는 성주 소성리 주민들에게도, 어디선가 힘들고 답답한 현실과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따듯하고 편안한 쉼이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새싹을 만들어 낼 힘을 만들 쉼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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