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호명,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청년세대’ 만들기

[정치칼럼] 강남3구, 대경, 60대 이상과 최초로 ‘선거연합’한 청년세대


서울, 부산 등에서 실시된 보궐선거가 수구정치세력의 완승으로 끝났다. 한편에서는 그 결과를 두고 이명박정권이 등장하게 된 17대 대선 시기의 상황-이른바 ‘맨붕’-이 떠오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노무현정권의 몰락이 겹쳐진다. 탄핵에 직면한 노무현정권이 자신을 구제해준 촛불봉기의 대의를 뒤로 하고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 구애하다가 지지세가 빠지며 17대 대선을 치르기도 전에 실질적인 승패가 결정됐던 기억 말이다. 이후 정치적 존재감을 잃은 민주당은 선거에서 연패하며 무력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은 패배의 이유를 ‘중간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진단하며 계속 우측으로 행보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무능’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그들을 구제해 생기를 넣어준 것은 박근혜정권을 퇴진시킨 촛불봉기였다.

그런데 그 봉기를 ‘혁명’으로 규정하며 적자를 자임해 온 문재인정권과 민주당이 지난 보궐선거에서 완패하며 다시 정치적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면에 이르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선거결과가 보여주듯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에 있는가. 아니다. 잘 알고 있다시피 그들이 말하는 ‘혁명’은 ‘정권교체’와 동의어였고 그런 의미의 언술은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김대중/노무현 정권 등장 과정에서도 애용되었다. 그렇기에 집권 이후 그들은 대중들에게 약속했던 장밋빛 정책들을 언제 그랬냐는 듯 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임의 근인은 그처럼 반복된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은 채, 그들이 무언가 주기를 바라며 계속 추종, 지지해 온 이들에게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선거는 최선이 아닌 차선,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상식으로 자신들의 행태를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상식이야말로 지배세력들의 이해와 욕망을 고상하고 우아하게 꾸며놓은 언술이 아니던가.

대통령 문재인이 ‘저도 페미니스트입니다’,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겠습니다’고 역설한 것과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인 것에 실망하여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페미니스트’, ‘사람’이 의미하는 것을 역사특수적 관계들과 분리해 자의적으로 규정, 해석하고 그 위에서 그 이상의 무엇을 바라다 실망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몽니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굳이 규정하자면, 그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위에 서 있는 ‘온정적 가부장주의자’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경제관계를 포함한 제반 사회관계들 및 그 안에 내재해 작동하는 권력관계들을 (재)조직하고 운영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런 질서 속에서 고통받는 대중들에게 ‘참고 살면 언젠가 해 뜰 날이 올 것’이라고 위무할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그 고통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해결할 수는 없다.

이미 경험해 오지 않았는가. 그들은 김대중 정권 시기부터 법, 제도적 개입을 통한 재벌규제로 공정한 시장경쟁질서를 구현하겠다고 역설해왔지만, 그 질서자유주의적 언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이라는 그들의 오랜 슬로건은 지금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그들이 어찌 ‘비정규직 제로’라는 공약을 위해 자신을 조금이라도 던질 수 있겠는가. 말 많은 검찰개혁은 어떤가. 거기에서 국가의 억압적 기구들이 서로 더 많은 권한을 갖고자 다투는 ‘관료정치’ 이상의 그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또한 그들이 누차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으로 호명했던 사실, 그리고 보궐선거의 와중에서 표를 얻기 위해 마지못해 사과했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단순한 말의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페미니즘’이 어떤 것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내 주는 증거가 아니었던가.

사정이 이렇기에 문재인 정권과 집권 민주당을 심판했다는 지난 보궐선거를 뒤늦게나마 다시 돌아보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2030’의 행태가 중요한데, 이 사회의 현재-미래를 책임질 세대로 묘사되곤 하는 그들이 정권심판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 평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문재인 정권에 등을 돌렸나? 그 이유는 주거(부동산), 일자리, 그리고 페미니즘 문제 등에 대해 효과적인 정책을 구사하지 못하여 그런 자원들, 기회들에 대한 접근가능성을 더 악화시키거나 편파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라는 것, 정의와 공정을 앞세우면서도 ‘내로남불’하는 집권당, 특히 ‘586’에 실망했기 때문이라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 물론 논의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대강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공정,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는 그들의 선택이 바로 ‘국민의 힘’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아무리 실망이 크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의 왼쪽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 여전히 박정희, 전두환 등 ‘공개적 독재체제’의 상징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지주로 세우고 그들의 길을 삶의 향도로 삼는 이들, 그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사면을 요구하면서까지 부와 권력이 넘쳐흘러 어찌할 줄 모르는 재벌 및 그 총수의 안위를 노심초사 염려하는 이들, 성평등이라는 말만 들어도 까무러칠 정도인 자들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 자신이 스스로 ‘보수’라 참칭하고, 그들을 보수로 불러야 자신들이 진보의 위상을 점할 수 있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그 참칭에 맞장구쳐주기에 그들이 진짜 ‘보수’인 줄 알고 선택을 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그 정치세력이 문재인정권에 가졌던 불만의 목록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기에 그런 것인가.

‘2030’의 선택이 지닌 정치적 의미

그렇기에 그 인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 ‘2030’의 선택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불러내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그들은 기존 ‘보수-수구 독점의 정당 체제와 정치 구조’를 더욱 견고히 만드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수구정치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진보적, 급진적 사회정치세력들 앞에 더 견고한 장애물을 세우는 것이고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 스스로가 그 장애의 일부가 될 것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둘째, 그들이 자신들의 행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공정, 정의’가 보수자유주의와 수구 정치세력들이 주장하는 것 사이의 그 어느 지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정의, 공정 등은 기존 질서의 경계, 그 밖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는 그 어떤 긍정적 연관성도 없음이 확인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의 상징처럼 된 ‘영끌’이라는 기표는 기존의 질서 안에서 오직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경쟁하고자 하는 그들의 초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 주고 있을 뿐이다.

셋째, ‘2030’은 그 동안 한국정치에서 ‘개혁’, ‘진보’를 대표하는 세대로 호명되던 청년세대가 수구정치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으로 호명된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해를 위해 그동안 수구정치세력을 일관되게 지지해온 ‘전통적 지역 및 세대들(서울의 강남3구, 대구경북, 60대 이상)’과 적극적으로 ‘선거연합’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청년세대’이다.

이제 이 지점에 이르면 왜 보수, 수구 정치세력들, 그리고 그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는 미디어들, 이데올로그들이 이번 선거의 승패와 무관하게 너 나 할 것 없이 ‘2030’을 호명했는지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굳이 부연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첫 세대에 해당되는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목표로 하는 ‘자기경영의 주체 만들기 프로젝트-모든 개인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기업가’로 만듦으로써 ‘공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제거해 버리고자 하는 프로젝트-의 첫 산물이라는 점에서 ‘정치’와 가장 거리가 먼 세대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가 기존의 질서들, 즉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가부장체제, 반생태문화적인 질서들에 포섭되어 착취, 수탈, 배제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삶과 몫을 다루는 것이라는 점, 바로 그 지점에 공정, 정의가 거처한다는 것을 성찰, 자기화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이는 ‘2030’이 내세우는 공정, 정의가 ‘자기경영의 주체’로 태어나기 위해 투여된 자원-자기계발을 위해 쏟은 물리적, 정신적 자원들-에 비례하여 주어지는 법, 제도적 차원의 기회보장을 의미한다는 점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지하철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등의 채용과 관련하여 그들이 보인 행태는 그 전형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 ‘386’을 호명했던 것처럼 ‘한국판 신자유주의 아이들’인 ‘2030’의 호명은 좁게는 그들을 앞세워 청년세대들 안의 진보적, 급진적 부분을 제어, 고립시키고 넓게는 그 나머지를 기존 질서에 더 적극적으로 포섭시켜 그 질서를 안정적으로 재생산시키고자 하는 담론적 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우일 수도 있지만, ‘2030’을 그저 이해하고 보듬어 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론적, 실천적으로 대결하고 넘어야 할,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쟁투의 대상임을 재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누가 자임하여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그들과 이야기하고 대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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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레기네

    그저 설득도 이해도 못시키면서 청년층 개새끼 우리가 선이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혁사에 가까운 글이네

  • ㅇㅎ

    설득 많이 되는데 (끄덕끄덕)

  • 노민해

    2030의 보수화는 2030이 기댈 혹은 함께할 계급적 좌파세력이 없거나 그들에게 보이지 않은 탓 아닐까요?

  • 지나가다

    쓰레기네..왜 당신을 설득하고 이해를 시켜야 해,,,,
    님은 머리가 없나..열심히 공부하고 실천하면서 당신이 나이든 세대들을 설득해야지,,,그게 청년세대가 할 일이야...다른 이들한테 해달라고 하지 말고,,,어린아이가...ㅣ

  • ㅇㅇ

    우파더러 보수꼴통 친일파를 아가리만 열면 울부짖는 몸에서 쉰내나는 늙은이 아가리진보 좆팔육 자칭 진보대학생 애미터진 새끼들은 왜 이리 역겨운 소리만 골라하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빨갱이가 왜 없어? 전쟁이래 북한은 한번도 변한적 없는 세계 최악의 개쓰레기 추악한 국가임에도 죽어라고 북한 사랑하는 좆팔육 시대착오적 민좆주의에 눈깔 돌아가고 반미에 친중하는 새끼들이 널렸는데?

  • ㅇㅇ

    좆팔육 씹새끼들은 가장 역겨운게 지들보다 늙은 사람들은 늙었다며 꼰대라고 지랄을 하고, 젊은 사람들은 세상물정 모른다며 지랄을 한다, 현실은 니네 씹새끼들만 우물안 개구리에요 개새끼들아

  • ㅇㅇ

    운동권 늙은이 씹새끼들이 싹 다 뒤져야 나라 정상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