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2016년 초 한국 엔터테이너 기획사 JYP 소속 걸그룹 ‘트와이스(Twice)’의 타이완 출신 멤버 쯔위가 한국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타이완의 청천백일기를 흔들었던 일이 ‘타이완 독립’이라는 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민감한 논쟁을 촉발했던 사건 말이다. 이 논란은 타이완의 독립파를 결집하고 중도까지 끌어모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친타이완 독립 분위기는 곧바로 실시됐던 타이완 총통 선거에서 친타이완 독립 성향을 내세운 민진당 차이잉원 후보를 큰 승리로 이끌었다.
『아이돌이 된 국가』는 이 일련의 해프닝에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네티즌의 ‘디바 출정’을 조명한다. ‘디바 출정’이란 2016년 차이잉원이 새 타이완 총통으로 당선된 직후, 소위 중국의 애국주의 청년(소분홍) 네티즌들이 차이잉원 페이스북 페이지를 비롯하여 친타이완 독립 성향 언론사들의 페이스북 페이지로 ‘출정’하여 댓글 테러로 페이지를 도배하고 ‘게시판 털기’로 서버를 다운시켰던 구체적 사건을 지칭한다. 저자들은 이 사건 속에서 중국 사이버 민족주의의 새로운 양상 -팬덤 민족주의- 을 발견한다. 이는 디바 출정 참가자들이 ‘전쟁 무기’로 사용했던 게시물, 댓글 속 밈, 이모티콘 등의 콘텐츠들을 살펴보면서 이루어지며, 독자는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학 전공자들인 저자들의 생동감 있는 비주얼 텍스트 분석 사이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출처: 도서출판 갈무리] |
엄숙한 민족주의 시위에서 재미있는 민족주의 퍼포먼스로
저자들이 묘사하는 ‘디바 출정’ 참가자들의 팬덤 민족주의적 표현은 마치 게임처럼 유희적이고 감상적이고, ‘축제’와 같다. 이는 기존의 중국 민족주의의 양상과 가장 차별되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책에 따르면, 2000년대 초기 중국의 반일 민족주의 시위 등에서 읽히는 지배적 정서는 분노와 우울이 대부분이었으며(39p), 이를 표현한 당시 신조어는 ‘펀칭(분노청년)’이었다. 그러나 2016년 중국과 타이완의 지정학적 갈등 속에서 차이잉원의 페이스북 페이지로 출정한 참가자들은 증오와 분노보다는 귀여운 이모티콘, 웃긴 패러디를 이용한 밈 등 여러 가지 텍스트를 무기로 활용했다. 이것이 책에서 ‘디바 출정’이란 사이버 전쟁의 목적이 적(타이완 사람들)을 진정으로 무찌르기 위한 것보다는 자족적인 “셀프 퍼포먼스”(284p)적 성격이 강한 일종의 플래시몹이었다고 분석하는 이유이다.
소분홍, 한국 대중문화의 팬덤이자 중국의 열렬한 애국주의자
이 책을 설명하는 주요한 키워드는 ‘소분홍’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팬덤 민족주의가 등장한 배경을 살피기 위해 ‘소분홍’이라 불리는 중국 청년들의 일상 문화에 주목한다. ‘작은 분홍’이라는 뜻의 ‘소분홍’은 중국의 젊은 민족주의적인 네티즌 및 애국 청년들을 일컫는 말이며, 이 책의 분석 대상인 ‘디바 출정’의 주요 참가자들이다. 책에 따르면, 한국의 여느 1990년대 생과 비슷하게 온라인 게임과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익숙하게 자란 ‘소분홍’은 여러 소셜미디어 활동에 능숙한 중국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다. 이들은 중국의 이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중국의 부상을 직접 목격하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며 성장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해외여행과 유학, 초국적 케이팝 팬덤 활동, 다국적 온라인 게임을 하며 전 지구적 감각을 익혀왔다. 중국 애국주의 청년들을 “중국 바깥을 경험하지 못하고 중국공산당의 애국주의적 교육에 ‘세뇌’당한 젊은이”로 치부하는 편견들이 깨지는 부분이다.
저자들이 ‘소분홍’에 대해 놀란 것은 ‘디바 출정’이 2016년 1월 20일 단 하루 사이에 결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신속했던 ‘소분홍’의 분업체계 형성 능력이다. 이들은 삼엄한 중국의 인터넷 방화벽을 뚫고 타이완 페이스북을 도배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인터넷 활용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저자들은 ‘소분홍’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계정을 관찰하고 그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들이 한국 아이돌 팬덤을 비롯해 여러 웹소설 커뮤니티와 게임판에서 ‘덕질 좀 해본 고인 물들’이었음을 발견한다. 즉 ‘디바 출정’에서 발휘된 이들의 놀라운 행동력은 “오랜 팬덤 활동으로 습득한 높은 수준의 미디어 리터러시, 그리고 숙달된 인터넷 액티비즘”(93p) 덕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평소에는 정치나 민족주의에 별로 관심이 없는, 덕질하는 한국 연예인 사진을 올리는 팬덤 계정을 운영하는 팬덤이었다. 그렇다면 평소에는 정치적이지 않았던 소분홍은 어떻게 ‘디바 출정’에서 애국 투사로 변신한 것일까? 즉 평범한 문화 소비자였던 이들은 어떤 계기로 민족주의를 만나고 또한 정치화되었는가? 저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소분홍’이 온‧오프라인으로 국경을 넘어 문화를 즐기는 도중에 끊임없이 ‘중국’ 혹은 ‘중국인 됨’을 맞닥뜨렸고, 이것이 이들의 강한 국가정체성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일례로 다국적 유저들이 즐기는 온라인 게임과 초국적 팬덤 활동 속에서 소분홍은 중국 시장과 중국인을 차별하는 대우를 겪기도 한다. 이 억울함과 분노는 이들이 더욱 같은 국적의 중국인끼리의 유대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로 책에서는 소분홍들이 중국 내에서 특정 해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게 만드는 ‘만리방화벽’이라는 인터넷 검열‧통제 시스템을 ‘넘어’ 타이완 내의 페이스북으로 출정했던 행동을 소개한다. 이 중국만의 특수한 인터넷 통제 환경 속 함께 “벽 넘기”(217p) 과정은 이들이 멀게 느꼈던 국경을 일상에서 생생하고 두텁게 접하는 경험이 되었고, 결국 자아 속 국가를 투사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책은 '소분홍'의 초국적 문화소비라는 일상적 경험이 평소에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이들이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획득하게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 연예인의 팬덤이면서 열렬한 애국 청년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은 매끄럽게 공존한다. 이는 애초에 ‘소분홍’ 세대의 문화 속에서 오락과 정치의 논리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덕질 좀 해본” 이들이 국가를 덕질할 때
결국 이 책을 덮고 나서 가장 인상 깊게 남는 메시지는 중국의 ‘소분홍’은 그들이 “아이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조국을 사랑한다”(283p)는 주장이다. ‘소분홍’의 “국가에 대한 애착은 아이돌에 대한 팬들의 애착과 매우 유사하다.”(283p) 책은 그 이유를 이들이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하위문화를 즐기는 방식 중 하나인 팬덤의 형식으로 민족주의를 실천”(24p)하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책에서는 그 하위문화로 한국 대중문화가 자주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한국의 문화산업이 가장 정교하게 아이돌과 미디어 제품의 생산과정에 팬덤을 결합시키기 때문”이다.(93p)
자신의 아이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옹호하는 것, 자신의 아이돌이 성공하도록 헌신해야 한다는 의무감 등의 한국 연예계 팬덤 문화 안에서 통용되는 문법과 기술은 이들이 국가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전의 중국 민족주의 담론에서 국가는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섬겨야 할 대상이었다면, ‘소분홍’ 세대에게 국가는 오락의 대상이며, 팬으로서 지지하고 보호하며 키우는 존재가 되었다. 이로써 이들에게 국가는 재미있는 덕질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아이돌인 것이다.
국경과 영역을 넘나드는 동아시아 문화산업과 정치 현상
이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책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문화와 정치 영역을 꾸준히 넘나들며 이야기를 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 책의 시작 지점부터(쯔위의 방송+차이잉원 당선), 분석 대상인 소분홍의 정체성(한국 대중문화의 팬이면서도 중국의 열성 애국주의자)을 넘어 책의 결론(팬덤+민족주의와 아이돌이 된 국가)에서 상세히 나타난다. 결국 책을 다 읽어갈 즈음에는 애초의 오락과 정치의 논리를 하나로 받아들였던 소분홍의 논리처럼 두 영역 사이 경계는 허물어진다. 경계의 넘나듦이 초국적 범위로 넓혀져 한국의 아이돌 산업과 팬덤까지 얽혀들어 가는 점 또한 한국 독자에게 흥미롭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부터 사드 배치, 2019 홍콩 시위, 미세먼지, COVID-19, 올해 초 베이징 동계 올림픽 등의 이슈로 대중의 혐중 정서가 깊어져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는가? 『아이돌이 된 국가』는 한국인들이 중국의 젊은 애국청년들에 대해 흔히 ‘정부가 세뇌시킨 중화사상에 찌든 젊은이’라던가 ‘저들은 왜 저럴까’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의 이해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편견을 넘을 수 있게 도와준다. 이 책은 독자들이 동시대 이웃나라 청년의 성장과 행동 배경, 심리 등을 따라가 그들을 가까이서 이해하도록 다리를 마련해주는 시의적절한 책이다. 또한 한국의 팬덤 정치적 경향에 비추어 생각할 거리 또한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