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이 불러온 정치적 혼돈

[요즘 경제]

인플레 감축법에 얽힌 정치적 실타래

“한국산 전기차 심각한 타격”, “WTO 제소”

갑자기 갈등 섞인 단어들이 언론의 한 면을 장식했다. 미국이 지난 8월 16일 발표한 인플레이션 감축법 이야기이다. 이 법안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친환경에너지 산업 지원과 의료보장 확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7,400억 달러, 약 960조 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정투자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화석에너지 가격 폭등 현상에 대응하고, 의료비를 절감하겠다는데, 왜 언론에선 보호무역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일까?


이유는 인플레 감축법에 담긴 방대한 내용 중에서 전기차 보조금 기준이 국제적 갈등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법안에 따르면 미국 및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채굴, 가공된 핵심 광물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해 만든 배터리를 탑재하고, 북미 지역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만 세제 혜택을 주게 돼 있다. 현재 한국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는 전기차들은 이 법안의 혜택을 볼 수 없다. 더구나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니켈, 코발트, 망간 등 핵심 자재를 90% 이상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기차 조립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는 것을 넘어서 중국과의 공급망 관계를 완전히 끊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전기차 보조금법안은 전기차 배터리 재료공급의 80%를 차지하는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퇴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포석 중 하나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인플레 감축법일까? 현 미국 바이든 정부가 인플레이션에 발목 잡혀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40%대에 머무는 바이든 정부로서는 인플레이션 문제가 최대 현안이다. 실제 지난해부터 정치권에서 격돌하기 시작한 인플레이션 논쟁은 중요한 재정정책의 방향을 좌우했다. 지난해 가을 바이든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3조 달러 규모의 ‘사회복지 교육 지출 예산’이 의회에서 부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올해 봄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안보 문제 등이 이슈로 떠오르면서, 사회복지 교육 예산이 빠진 채, 국가안보, 핵전력 강화, 나토 지원 같은 국방예산이 대폭 증액되는 방향으로 극심했던 예산안 논쟁이 마무리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의회를 통과한 인플레 감축법은 바이든 정부의 정치적 재반격으로 볼 수 있다. 의료복지 재정을 늘려 돌아선 지지층을 규합하고,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초당적 어젠다를 기반으로 에너지 산업 재편을 선도할 산업정책을 추진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중국에 대한 전략적 견제에 있어선 여야가 따로 없는 미국의 정치적 상황은 WTO 협정 위반 소지가 매우 큰 전기차 보조금법안을 밀어붙이도록 만들었다. 미국이 그동안 내세웠던 자유무역의 깃발을 스스로 꺾어버린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 감축법을 홍보하기 위해 11월 중간선거 전에, 전국 23개 주(州)를 방문하는 행사를 30개 이상 추진하고 있다. 이런 반격의 결과 바이든 정부의 지지율은 소폭 상승했는데, 최근 몇 달간 이어진 유가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상황과 맞물린 결과로 설명된다.

미국만 살아남을 건가?

그런데 인플레이션을 두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이런 정치적 공방과 역습은 국제적 위기로 폭발한 에너지 및 식량 위기를 해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미국 스스로 자국의 정치적 공방 속에서 보호무역주의적 가치에 편승하면서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 공조 체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유럽은 에너지 위기와 기후위기가 겹치면서 엄청난 민생고에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의 의존도가 높은 유럽은 천연가스 가격이 올해 초 대비 4배까지 치솟아 산업생산은 물론 민생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받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서방과 러시아와의 외교·안보적 갈등이 원인인데, 독일로 향하는 천연가스를 무기화해 서방의 대러시아 공조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푸틴의 계산에 따라 에너지 위기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번 겨울에 유럽은 에너지 위기가 절정에 이를 것이라 예상된다.


이렇게 전쟁이 하루바삐 종식돼야 함에도 시계추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장기화하면서 전쟁으로 인해 파생된 위기와 갈등이 점차 만성화되고 있다. 미국이 진정 전쟁을 끝낼 의지가 있다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에만 열을 올릴 게 아니라, 지정학적 군사 안보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근본적인 핵심 갈등에 대해 진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인다. 러시아를 전쟁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할 의도가 더 커 보인다. 이는 대러시아 제재가 러시아를 항복하게 할 정도로 강력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이것을 의도하는 것이든 방치하는 것이든 결과적으로 전쟁의 장기화에 한몫하고 있다.

국제결제망(SWIFT)에서 러시아 퇴출 조치가 발표될 때만 해도 마치 러시아의 대외무역이 봉쇄돼 경제가 붕괴하고 루블화가 폭락할 것이라 예상했다. 러시아 외환보유고의 60%에 달하는 달러 및 유로 자산이 동결되면 말 그대로 러시아는 외환위기에 따른 국가부도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는 예상과 달랐다. 국제결제망 퇴출 조치에서 러시아산 에너지 부문은 예외 조치를 두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원유 수출에 큰 지장이 없었다. 특히 중국이나 인도는 서방과 달리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배제할 정치적 외교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경제의 가장 큰 축인 에너지 산업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를 고립시켜 국제정치 무대에서 퇴출하고 싶지만 러시아산 에너지는 갖고 싶은, 서방국가들의 이중적 태도는 에너지 위기에 따른 인플레이션 사태 속에서 대러시아 제재 틀을 무디게 만들었다. 오히려 에너지를 무기화 한 푸틴에 의해 유럽의 에너지 위기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 경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커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반면 석유 가격 하락으로 미국은 에너지난에서 점차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급격한 금리인상 조치로 달러화는 20년 만에 초강세를 이루고 있는데, 그만큼 미국의 수입 물가는 낮아지고 인플레이션 압박은 줄어들고 있다. 금리인상에 따른 경기침체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나, 지금의 미국 고용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물론 불안정 노동의 확산에 따른 민생고는 여전하지만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올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달러화 대비 통화가치가 하락한 다른 국가들은 미국처럼 석유 가격 하락의 효과를 충분히 보진 못하고 있다.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이 이를 상쇄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1,340원대까지 치솟은 환율 때문에 수입 물가 상승 압박은 줄지 않고 있다. 심지어 최근 유가 하락 상황에서 사우디가 원유 감산 조치를 발표하는 등 세계는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점차 예상할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글로벌 차원의 위기 대응은 이렇게 계속 엇박자를 낼 것이다. 왠지 이번 인플레이션 위기에서 미국만 탈출하고 나머지 나라는 정치적 혼돈과 경제적 불안정 속에 허우적대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신흥국 30%, 경제적 빈국들의 60% 정도가 현재 통치체제가 위협될 정도로 사회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이런 글로벌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발표된 미국의 인플레 감축법은 겉으로는 기후위기 대응을 내세우고 있지만, 반대로 국가 간 협력 체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미국 중심의 전기차 산업이 흥한다고 해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기후위기 현상이 없어질 리 만무하지 않은가. 일례로 작금의 에너지 위기는 화석연료 감축 정책의 일환으로 세계가 같이 추진했던 탈석탄 정책을 거꾸로 만들고 있는데, 심각한 전력난을 겪은 중국은 지난해부터 폐쇄했던 탄광을 다시 열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은 국제 공조 체제가 절실한 사안임에도, 패권국들의 자국 이익 중심의 태도로 위기 대응은 실종됐고, 정치적 수사만 남은 상태다.

신자유주의 쇠퇴와 혼돈

‘경제기술동맹’, ‘칩(chip)4 반도체동맹’에 이어 ‘전기차 보조금’에 이르기까지 최근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전략은 기존 세계질서의 급격한 변화를 방증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여 년 동안 지속돼 온 신자유주의 쇠퇴 국면 속에서 점차 두 개의 진영으로 분할되어 가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미국 주도의 국제결제망 러시아 퇴출 조치는 중국에 대한 러시아 경제의 종속 현상을 낳으면서 결과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있다. 위안화 석유 결제를 추진하는 사우디는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중동 패권의 경쟁자인 이란을 견제하고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가치이념동맹 성격의 블록화 전략은 미국 이익 중심을 포장하는 미사여구에 불과하다는 점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다. 동맹국을 압박해 미국에 공장을 짓게 만들고,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에 기대서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는 태도가 어찌 패권국의 모습일까?

1차 세계대전 이후 헤게모니를 상실한 영국은 대공황을 거쳐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세계적 위기를 통제하지 못했다. 미국도 이런 과거를 반복할까? 일단 그렇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패권국들의 전면전은 공멸의 핵전쟁을 의미하므로 서로가 피할 수밖에 없다. 또한 미국과 중국 모두 서로에 대한 경제적 관계를 일거에 단절할 수 없다. 그만큼 미·중 경제는 상당히 융합된 상태다. 그러므로 예상되는 위기의 경로는 패권국 주변국에서 벌어지는 대리전에 가까운 갈등의 폭발이다. 이것이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어떤 형태로 드러날지 모르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장기화하고,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현상을 보면, 이런 패권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국들의 정치 경제적 혼돈과 갈등은 점증할 것이라 보인다. 이런 패권국들과 지리적으로 맞닿고 있는 한반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지금은 세계사적인 정치의 위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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