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의 표상, 김조이

[혁명을 꿈꾼 여성들]

2008년 8월 13일 조임정 씨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 모친과 관련된 통보를 받았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김조이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건국포장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대한민국 건국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과 위훈은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조 씨의 모친인 김조이가 ‘건국포장’으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김조이는 이승만의 정적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의 배우자이자 동지이다. 당초 ‘죽산 조봉암 선생 명예 회복 범국민추진위’는 독립유공자포상을 신청하면서 건국훈장을 기대했지만 이보다 훈격이 낮아졌다.

  1935년 서대문형무소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김조이(1904-?)는 경남 창원군 웅천면 성내리에서 부친 김종태와 모친 배기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재형이 조선왕조 마지막 창원 군수를 지낸 탓에 살림이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조이가 항일운동에 뜻을 세운 것은 당시 조선 민중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던 3·1운동의 영향이 컸다. 1919년 웅천 우시장에서 펼쳐진 4·3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역유지였던 할아버지가 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회합 장소로 자기 집을 제공했고, 김조이도 주기선, 주녕옥 등의 여성들과 함께 웅천교회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4월 3일 웅천면에서는 수천 명의 민중이 참여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수십 명의 사람이 연행되면서 해산했다. 김조이에게 3·1운동은 앞으로의 혁명적 활동을 위한 선행 학습이 된 셈이었다.

김조이는 고향에 있는 사립학교인 계광학교를 졸업했다. 계광학교는 민족교육의 산실로 알려진 곳이다. 김조이는 계광학교 졸업 후 학업을 계속하고자 서울로 떠났다. 비무장·비폭력의 만세 시위로는 독립이 요원하다는 것이 3·1운동의 교훈이었다. 고향에 남아서 운동하기보다 장기전으로 돌입할 사상과 대중 조직이 필요했다.

김조이는 직접 학비를 벌면서 동덕여학교를 다녔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는지, 나름의 목적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조이는 경성여자고학생상조회에 참여해 돈을 벌었는데, 이 상조회는 1922년 20여 명의 신진 여성들이 중심이 돼 여자고학생을 구제하고 서로 돕자는 취지로 창립된 단체다. 단체는 연극회, 강연회 등으로 후원금을 모으기도 하고 여아용 모자, 운동복, 간호부복, 천막 등을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 재정을 꾸려나갔다. 단체는 또한 지난 5월호 《워커스》에 소개한 정종명을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전파하고 있었다. 김조이에게 사회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사상적 무기가 됐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매우 큰 전환점이 다가왔다. 평생의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인 조봉암을 만난 것이다. 조봉암이 소속한 신흥청년동맹과 여자고학생상조회가 전국 순회 강연회를 하면서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됐다. 1924년 2월에 결성한 신흥청년동맹이 사회주의 선전 및 조직 확대를 위해 순회 강연단을 편성했는데, 강연단에 조봉암이 포함돼 있었다. 강연 주제는 청년 문제와 여성해방이 중심이었다. 1924년 4월 인천공회당에서 열린 신흥청년동맹 결산강연회에서 김조이는 김은곡이라는 가명으로 강연에 나섰다. 제목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억함’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30일 김조이의 고향 집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조봉암이 유명 인사여서 이들의 결혼 소식이 〈동아일보〉 7월 1일 자에 단신으로 실리기도 했다.

  김조이(맨 왼쪽) 등이 창립한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종로구 낙원동 사무실. 〈조선일보〉, 1925.12.19.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여성 코뮤니스트’로 거듭난 김조이는 1925년 1월 21일 화요파 공산주의 그룹의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16~26세의 여성들로 구성된, 여성해방운동을 지향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다. 창립 당시 회원 수는 82명. 학생이 56명으로 가장 많았고 교사 9명, 무직 8명, 간호사 8명, 기자 1명 등이 있었다. 허정숙, 정달악, 주세죽, 우봉운, 배혁수, 김필순, 박정덕, 한동죽, 한보희 등 쟁쟁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당시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등이 결성돼 사회주의 운동이 최고조에 접어들던 때였다. 강령은 ①무산계급 여자 청년의 투쟁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꾀함 ②무산계급 여자 청년의 단결력과 상부상조의 조직력으로 여성의 해방을 기하고, 당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함 등이었다.

이 단체는 여성해방 서적 연구·토론, 여성 노동자 위안 음악회, 무산아동학원 설립, 여성문고 설치, 학술강좌 개최 등을 추진했다. 창립 후 첫 사업으로 국제부인데이(國際婦人day, 세계여성의날) 기념 간친회를 개최했다. 이는 조선의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조선여성운동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계무산부인운동으로 추진돼야 함을 주장한 것이며, 동시에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잇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었다. 김조이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주의 진영에서 역량 있는 활동가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증명하듯이 1925년 4월 ‘적기(赤旗) 시위사건’에 연루돼 잠시 검거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주의 진영은 조선공산당 창당 전 ‘전조선민중 운동자대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 탄압으로 무산됐고, 이를 항의하기 위해 단성사와 우미관 앞 등 두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 민중들이 포함된 시위대는 “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항하자”,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만세”, “무산자 만세” 등의 구호가 적힌 붉은 깃발(赤旗)을 앞세우고 종로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이것이 ‘적기 시위사건’이다. 이 시위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 조봉암이었는데, 경찰이 출동하자 급히 피신해 검거를 모면했다. 시위를 함께 주도했던 김조이는 시위 도중 연행됐으나 다음 날 훈방됐다.

김조이는 그해 11월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입학생 중 남성은 18명이었고, 여성은 김조이를 비롯해 고명자(1904-?)와 마산 출신 김명시(1907-1949) 등 3명이었다. 창원과 마산이 이웃이어서, 김명시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김조이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애썼지만, 결국에는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는다. 1931년 9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부 지시로 김조이는 김복만 등과 함께 몰래 귀국한다. 아울러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주도한다. 〈동아일보〉는 1932년 2월 3일 “모종(某種) 사명 띠고 김조이 잠입?”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김조이가 시골 마을 부인으로 변장해 다닌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경찰이 크게 견제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32년 8월 일명 ‘제2태평양 노사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돼 함흥경찰서에 검거됐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함남 공청 사건(함경남도 공산 청년 사건)’이라고 불렀다. 2년여쯤 구금됐다가 기소돼 1934년 12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진 김조이는 1937년 9월 출소했다.

참고로 태평양노동조합은 1927년 상해서 만든 프로핀테른 산하 조직으로서, 각국의 노동조합을 국제적으로 연결하려고 했다. 프로핀테른(Profintern,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은 코민테른의 외곽 조직으로, 1921년 7월 3일 창립됐다. 그리고 ‘태평양 노사사건’은 식민지 조선에서 좌익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던 것을 말한다. 즉, 김조이는 함남지역에서 좌익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김조이는 출소한 뒤 조봉암과 재결합해 1939년, 함께 창원 웅천 집을 찾았다. 조봉암 역시 신의주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김조이와 비슷한 시기 출소했다. 조봉암은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인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임원들이 검거됐을 때, 중국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감옥으로 이송됐다. 그는 상해에서 도피 생활을 하면서 첫사랑인 김이옥을 만났고, 함께 살며 딸 조호정을 낳았다. 김이옥은 그가 신의주 감옥에 있을 때 사망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조봉암과 김조이 부부는 곧 인천에 정착했고, 상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봉암은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했고, 김조이는 활동을 지속했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인천 대표로 참석했고, 12월 조선부녀총동맹에 가입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부녀총동맹 대의원으로 참석해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30일, 김조이는 인공치하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된다. 서울을 못 벗어난 그는 ‘반역자’, ‘배신자’로 몰리며 남동생 김송학과 함께 강제 납북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의 행적이나 생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로서 한 때는 여성해방 운동을 이끈 주역이었던 김조이의 삶은 파편으로 남아있다. 치열하게 투쟁하고 사랑했을 그녀의 삶을 더 크게 상상해 본다.

〈참고문헌〉
김삼웅, 『죽산 조봉암 평전』(시대의창, 2014)
박태균, 『조봉암 연구』(창작과 비평사, 1995)
윤선자,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여성운동과 ‘맑스걸’”, 『여/성이론』(3)(도서출판 여이연, 2000.12.)
이동욱, “[소외된 역사, 경남 여성독립운동] (6) 진해 김조이”. 『경남도민일보』(2019.2.13.)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http://sajeok.i815.or.kr/search/index/q/김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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