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의 밥상머리 평화

[INTERNATIONAL3] 팔레스타인에 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음식

  나블루스 시장의 채소 가판
[출처: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들을 빼앗겼다고 봄조차 빼앗길쏘냐

2020년 2월 8일, 베들레헴의 드 헤이샤 난민촌의 IBDAA 문화센터(1)에 짐을 풀었다. 오후 늦게 도착하기도 했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어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못 하고 근처 채소와 과일을 파는 가게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샀다.

팔레스타인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 기온이 낮지 않고 촉촉하게 자주 비가 내리는 덕에 2월의 채소가게가 풍성한 느낌을 준다. 알록달록 싱그러운 과일들 사이에서 그리 크지 않아 오히려 새콤달콤해 보이는 딸기 한 팩을 집어 들었다. 원산지를 확인해보니 가본 적 없는, 팔레스타인에 와 있는 동안 더욱 가보고 싶어진 ‘가자’다. 뉴스로 전해 들은 가자의 소식은 온통 이스라엘의 봉쇄와 공습으로 겪는 어려움과 고통인데 이렇게 싱싱함으로 가자를 만나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이후 들려오는 소식은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습, 공습, 공습 그리고 민간인 사망 소식들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규모 공습 뉴스와 함께 어린이 17명을 포함한 민간인 사망자 최소 22명 등 총 49명의 사망자와 36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

우기의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성서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디나 풍요롭다.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라는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 구절이 그대로 딱 들어맞는다. 자주 내린 비로 촉촉하고 기온은 10℃를 내려가지 않아 온화하며 여름에 먼지 풀풀 날리던 흙 역시 맨발로 밟고 싶게 폭신하고….

  요르단 계곡의 2월 [출처: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어디든 싱싱한 채소들이 넘쳐나고 꼭 시장에 가지 않더라도 들판에는 나물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우리네 마트처럼 채소들이 깨끗하게 세척돼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싱싱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밀키트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우기의 팔레스타인에 간다면 절로 요리 욕구가 솟구칠 것이다.

그렇게 풍요로운 2월에, 우리는 가자에서 생산한 딸기를 맘껏 즐길 수 없었다. 딸기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 갑작스럽게 정전이 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 문제가 생겼나 싶었지만 바깥을 살펴보니 베들레헴 전체가 암흑이었다. 정전을 대비해 발전기를 준비해둔 대형 건물들에서만 간간이 불빛이 새어 나오고 나머지는 암흑이었다. 우리는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가자에서 생산한 딸기를 먹었다. 평소 먹는 딸기보다 작고 새콤했는데 싱싱함만큼은 최고였다.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으니 그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정전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와봤다. 사람들은 익숙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자동차들은 그대로 어두운 거리를 달렸고,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곳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거리를 다녔다. 전기가 꼭 필요한 사람들은 이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편리함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이기심은 성찰해 볼 일이지만 하루 일을 마무리하고 편히 쉬어야 할 이 시간에 전기가 없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많은 것을 내려놓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그 후 몇 번의 정전을 더 경험했고 두 번째부터는 처음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가자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이 이스라엘의 봉쇄와 점령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농업노동자위원회연맹(UAWC)(3)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폭격이 있을 때마다 수백 개의 농업용 하우스가 부서지고 토질이 저하되며 농업용수를 저장하는 댐이 오염되거나 돌무더기에 파묻힌다. 가자의 농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보며 생계 또한 막막해진다고 한다. UAWC의 보고서에 따르면 가자지구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의 과수가 불태워지고 뽑혀 나간다. 자신의 땅에서 올리브를 수확하던 농민은 구타를 당하고 자신의 땅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며, 이스라엘의 불법 정착촌 건설로 많은 땅이 파헤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환대와 유혹에 넘어가고야 마는 빵과 밥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길거리에서 흔히 공용 우물을 만나게 된다. 특히 건기에 이 지역에 있다면 물은 절대적일 것이다. 거리에서 이 우물을 만날 때마다 덥석 다가가서 물을 받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무조건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생존에 꼭 필요한 물을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를 두지 않고 원주민과 여행자, 방문자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나눌 수 있는,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는 문화와 정서는 항상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바스티아의 공용 우물 [출처: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팔레스타인을 다니면서도 자주 이런 우물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번도 물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목이 마르지 않아도 자주 이 물을 마실 걸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배척당하지 않고 환대받는 느낌, 공용 우물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나블루스의 피타 가게 [출처: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팔레스타인에서 아침 산책은 특별한데, 꼭 동전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나가야 한다. 어디서나 흔하게 피타(빵)를 만날 수 있지만 특히 아침에 여기저기 빵집에서 굽는 피타 냄새를 맡으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곧 거대한 아침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피타 굽는 냄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특별해 보이지 않는 멀건 밀가루 반죽을 동그랗게 만들어 그저 화덕에 척척 구워내기만 하는 데도 그 매혹적인 냄새라니. 근처에서 팔라펠(4)이라도 튀기고 있다면 유혹은 절정에 달한다.

거기다 우리 돈 몇백 원만 있으면 그 따끈하고 고소한, 단숨에 하나를 다 먹어버리고 마는, 어느새 텅 빈 손이 돼 황망함을 안기는 피타를 두 개는 먹을 수 있다. 여기에 팔라펠을 주머니에 넣듯이 쏙 넣어 먹거나 양상추, 토마토, 오이절임, 타히니 소스 등을 넣으면 간편한 주식이자 간식으로 손색이 없다. 하나를 먹고 나면 꼭 하나를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아주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라는 것이다.


2014년에 52.64M/T(메트릭톤)이었던 밀가루 수입량이 2018년에는 185.05M/T으로 증가했고 2021년 95.65M/T으로 감소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일까? 아니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일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밀가루 양이 줄어든다면 주식인 피타를 어떻게 구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냥 먹어도 좋고, 소스가 있다면 더 좋고, 팔라펠만 넣으면 부러울 것이 없는 고소한 피타 굽는 냄새가 오늘도 팔레스타인에 평화롭고 평등하게 넘쳐나길 비는 것은 너무 순수한 바람일까? 세계 식량 가격 상승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들이 도착하고 있다.(5)

우리는 흔히 목축업을 하며 유목 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빵, 정착 생활을 하며 벼농사를 하는 곳에서는 밥이라고 생각하는데 팔레스타인은 빵 못지않게 밥도 주식이고 맛도 좋다. 쌀 종류와 요리 방법이 다양하며 우리네의 흰밥과 다르게 알록달록한 밥이다. 씹는 맛도 좋고 색이 예쁘니 먹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식당에서 먹을 때는 큰 그릇에 한 밥(볶음이나 스튜 형태)을 한 접시씩 덜어주는데, 집에 초대 받았을 때는 이 큰 그릇이 밥상 한가운데 놓이고 각자 먹을 만큼 덜어 먹는 식이었다. 미리 각자의 공기에 밥을 퍼주는 데 익숙한 우리는 어색할 수도 있지만, 나는 어울려 먹는 것이 좋았다. 요즘이야 된장찌개, 김치찌개, 전골도 각자의 앞접시에 덜어 먹지만 예전에는 우리도 큰 그릇 하나에 머리를 맞대고 함께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 더 먹으라며 권하는 문화도 좋고 먹고 싶은 만큼 덜어 먹는 것도 좋았다. 수북이 쌓여있는 캅싸(6)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먹고 나면 든든하니 정말 좋았다.

  요르단 계곡의 심각한 상황을 이야기할 때도 작은 의자를 테이블 삼아 커피가 나오고, 일하는 중 새참으로도 커피와 차가 나왔다. [출처: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관계의 시작은 다섯 가지 커피 맛

팔레스타인에서 ‘커피 한잔하시겠어요?’는 우리의 ‘언제 밥 한번 먹자!’와는 다른, 진짜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 혹은 힘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일하는 중, 일이 끝난 후 등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커피와 차를 함께하는 시간들이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집은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중동 속담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 환대의 문화가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더라도 우선 커피나 차를 내주고, 마치 ‘자,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는 듯하다. 사람들과 마셨던 수많은 커피와 차들이 떠오른다. 커피 맛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도 많았고, ‘이 커피를 어떻게 다 마시지?’하며 속으로 안절부절못할 때도 있었고, ‘한 잔 마시고 더 마시지 않겠다고 거절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커피는 쓴맛, 단맛, 신맛, 짠맛, 고소한 맛이 있다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금 어떤 맛의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 커피 맛은 다양하고 삶은 계속된다. 이제 팔레스타인에선 곧 우기가 시작된다.

(1) 1994년에 설립되었으며 팔레스타인 난민촌 거주자들이 다양한 사회, 문화 및 교육 활동을 통해 창의성과 리더십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이다. 최대 42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2) https://www.ochaopt.org/poc/2-15-august-2022
(3) The Union of Agricultural Work Committees(UAWC) : 팔레스타인 내무부의 팔레스타인 협회 및 비정부 기구 법률 1호에 따라 1986년에 설립된 비정부 농업 기구. 농지 개발, 여성 농민의 생계, 비상 대응 및 기타 농업 개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설계 및 구현하는 단체. 무역을 담당하는 자회사인 MGO(Mount Green Olives)는 2006년부터 한국의 민중 교역 협동조합 ‘피티쿱(PTCoop)’과 다양한 협력 활동을 하고 있다.
(4) 병아리콩을 고수 씨, 양파 등과 함께 으깬 상태로 만든 다음 작고 동그랗게 뭉쳐서 튀긴 크로켓. 중동 지역에서 많이 먹는 음식으로 샌드위치 재료로 많이 쓰임.
(5) Fears that wheat stocks could run out in the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y within three weeks. https://reliefweb.int. Oxfam. 2022. 4. 11.
(6) 중동지역의 쌀밥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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