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불꽃, 김명시

[혁명을 꿈꾼 여성들]

2019년 MBC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년을 맞이해, <기억하여 기록하다>(기억·록)라는 3분 캠페인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역사 100년을 되돌아보며 기억하는 의미로 100회에 한정해 1년 동안만 방영했다. 여기서 소개된 인물들은 실로 다양해서 낯익은 인물과 낯선 인물이 교차했다. 수많은 인물이 인상 깊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김명시(1907-1949)였다. 국악인 송소희가 김명시를 기억하는 노래 ‘비나이다’의 선율과 애절한 목소리가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1933년 조선공산당 재건 혐의로 공판 중이던 김명시 [출처: <동아일보>, 1933.9.26.]
김명시는 1907년 경남 마산 동성동(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189번지에서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마산 어시장에서 행상하는 어머니 김인석의 밑에서 자랐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마산 3.1 독립운동에서 상처를 입어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사망했다. 오 남매 중 오빠 김형선(1904-1950)과 남동생 김형윤(1909-?)도 당대의 유명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다.

삼 남매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김명시의 정의감은 어머니로부터 받았는데, 어머니 사망 이후에는 오빠 김형선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여운형과 가까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 당시 매우 유명했던 거물이었다. 김명시가 나중에 모스크바로 유학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사회주의 사상도 심어줬다.

가정 경제는 매우 열악했지만 배움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넘쳤다. 김명시는 1924년 마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교를 중퇴해야 할 만큼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배움을 중요시하던 오빠 김형선도 돈이 없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간이 농업학교에 들어갔다가 한 학기 만에 중퇴할 정도였다. 대신 1925년 7월에 김형선이 활동하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마산 제1야체이카(기본조직)에 배속됐다. 그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김명시의 모스크바 유학길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마산에서 부산으로 가서 밀항선을 타고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에 갔다. 다시 상하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거기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갔다. 몇 달이나 걸린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후 김명시는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에 능통하게 됐고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면서 스베츠로바, 김희원, 김휘성, 김휘연 등 열 개가 넘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전장을 누볐다.

공산대학은 1921년 모스크바에 설립해 1920년대 한인 소련 유학생 제1세대를 배출한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당시에 많은 조선인이 공산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졸업 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다. 공산대학은 전문적인 혁명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인기가 있었다. 공산대학은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동방부가 관할하던 곳이어서 코민테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일본이나 미국 유학과 달리 공산당에서 학비를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공산대학에 도착하기까지 필요한 여비와 일상 생활비까지 모두 공산당에서 지급했다. 따라서 공산대학에 재학 중인 기간에는 다른 비용이 필요 없었다. 공산대학은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작은 부분까지 지원했다.

김명시는 1927년에 상하이로 파견돼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김명시 일행은 상하이로 들어가면서 최초의 ‘제비’가 됐다고 한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 것처럼 조국을 떠나 혁명이론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김명시는 상하이에서 여성들을 조직해서 당에 가입시키고 교육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인 홍남표, 조봉암과 함께 중국공산당 상하이 한인특별지부를 결성했다. 이와 함께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 동양의 식민지 나라들의 운동가 300여 명을 규합해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했다. 이때가 1928년 6월이었다. 특히 상하이에서 만난 무정 장군과는 해방 이후까지 투쟁의 인연을 이어간다.

1929년 10월에는 홍남표와 함께 만주 길림성 아성현으로 가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따라 조선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고 현지 중공 한인지부를 건설했다. 또 현해구에서는 ‘재만조선인반일제국주의대동맹’을 조직해 집행위원이 됐으며, 기관지인 <반일전선>을 제작했다. 특히 1930년 5월 이립삼(李立三)의 좌경주의 노선에 따라 대규모 봉기를 준비해, 5월 30일 자정 300여 명의 조선인 무장대가 하얼빈 시내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공격해서 커다란 타격을 줬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걸어서 간신히 상해에 도착한 김명시와 홍남표는 박헌영, 김단야 등과 함께 기관지 <꼬뮤니스트>를 제작하는 등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착수한다.

1932년 3월에는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아 귀국한 김명시는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상하이에서 보내온 <꼬뮤니스트>와 지하 신문 <태평양노조> 등을 비밀리에 배포하고 인천지역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당시 오빠 김형선은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총책을 맡아 <꼬뮤니스트> 배포망을 조직하고, 그 배포망을 통해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고 불과 몇 달 만에 재건조직이 발각됐다. 김명시는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피하려고 시도했지만 1932년 5월 동지의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체포됐다. 이때 조봉암, 홍남표 등 주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도 같이 체포돼 재판받았는데, 1932년 8월 29일 기소된 운동가들이 무려 7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은 김명시에게 징역 6년을 언도해 총 7년을 복역했다.

신의주형무소는 매서운 추위로 옥살이 자체가 지옥이었다. 조봉암은 손가락 여덟 마디를 잃을 정도였고, 김명시도 이때 걸린 동상으로 평생을 고생했다고 한다.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김명시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이후 천진과 북경 등 일본 점령 지구에 파견돼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인 김원봉이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결성한 무장 독립부대다. 하지만 중국 국민정부의 협조를 거부한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의용군을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조선의용대는 조선 독립 동맹의 항일 독립군을 말한다. 당시 사령관은 무정, 정치위원은 김명시였다. 김명시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던 시기다. 일설에 의하면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던 모습에 ‘백마 탄 여장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밤, 김명시는 일본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다. 그리고 12월에 귀국했다. 해방 조국으로 돌아온 후 그의 존재는 더욱 널리 알려졌다. 해방 후 종로 거리 개선행렬에서 그가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에 이어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시민들이 ‘김명시 장군 만세!’를 불렀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조선의 잔 다르크 김명시 [출처: <동아일보>, 1945.12.23.]

그녀는 조선부녀총동맹 간부,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과 4월 서울지부 의장단에 이어, 1947년 6월 29일 '민주여성동맹' 대표를 역임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다. 1945년 12월 23일 <동아일보>는 “부하 2천 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약하여 무훈을 세운 우리 조선의 ‘짠타크’요 현대의 부낭인 연안독립동맹의 여장군 김명시 여사”라고 칭송했고, 같은 기사에서 김명시는 “조선 사람은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 뭉치가 되여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위한 좌우 협력을 강조해 주목받았다.

1946년 3월 8일 국제부인일을 기념해 조선부녀총동맹 주최로 축하식을 거행했는데 이에 참석해 국제부인일의 의미에 대해 강연했으며,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 기념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그리고 3년 후 그의 마지막 소식이 전해진다. 1949년 10월 10일 부평경찰서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효석 내무부 장관은 ‘김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이고 유치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사로 남아 있다. 민족해방 투쟁에 운명을 걸고 온갖 고초를 이겨낸 불굴의 여성 혁명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믿기 어렵다.

그리고 73년이 지나 또 하나의 소식이 전해졌다. 국가보훈처가 올해 광복절을 맞아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로 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사회주의자인 김명시 장군이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창원시는 2020년 김명시의 생가터가 있는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김명시가 다닌 성호초등학교로 향하는 오동서1길 돌담 골목 70여 미터에 ‘김명시 장군의 학교길’을 개장하고 생가터에 표지판을 세웠다. 골목에는 김명시 장군을 소재로 벽화길을 만들었다. 꿈과 희망을 안고 학교로 향하는 모습 등으로 김명시를 현대적 여성으로 디자인해 벽화를 그렸다.

김명시의 인상비평이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여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왼몸이 혁명에 저젔고, 혁명 그거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독립신보>, 1946.11.21.)

<참고문헌>
김국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연구(1924~25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2012년 10월.
안재성, <명시>. 미디어창비. 2019.
윤은주 엮음, <새벽의 빛 - 창원 여고생들이 기록한 독립운동가 김명시>. 학이사. 2022.
허정도, <도시의 얼굴들>. 지앤유. 2018.
민족문제연구소, “비운의 여장군 김명시.”(2017.2.22.) https://www.minjok.or.kr/archives/86874
<독립신보>(1946년 11월 21일)
<동아일보>(1932년 8월 29일)
<동아일보>(194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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