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속에서 꿈꾸는 세상

[박수정의 사람이야기](2) - 풍동에서 열린 변두리·인권·민중·영화제

9월 24일 경기도 고양시 풍동, 무너진 집들의 잔해 속에서 영화제가 열렸습니다. 그 영화제 이름은 '변두리 영화제'입니다. 인터넷 사회단체 게시판들에는 '변두리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알리는 글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현장, 펼침막에는 붉은 빛으로 '변두리 인권영화제'라고 써 있었고, 사회자는 '변두리 민중 영화제'라고도 했습니다. 어떤 이름이든 다 맞았습니다.

저녁 7시에 시작하는 영화제에 어떻게든 딱 맞추어 가고 싶었는데 넉넉하게 시간 잡고 길을 나서지 못한 데다가 생각보다 멀어서 시작 시간보다 40분 늦게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을 돌이켜 다시 출발하면 딱 맞춰 오련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제가 있다는 것은 바로 전날에야 알았습니다.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5월 그곳에서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졌지만 나는 인터넷 뉴스로만 보았습니다. 의자에 앉아 보고만 있는 게 불편했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열심히 그곳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들이 있는데 하면서 나는 그곳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싸움의 현장에는 가지 못하고, 누군가의 연대가 필요한 그 절박한 때에는 가지 못하고, 이제 그이들이 마련한 작은 영화제에 갑니다.

혼자서 가려니 쑥스럽기도 했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다른 이들과 함께 길을 나설 수도 있었으련만 달랑 혼자 갔습니다. 내가 사는 곳 구로에서 출발하니 전철을 4번이나 갈아타게 되더군요. 3호선 마두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몇 정거장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가더군요. 벌써 어두컴컴해졌습니다. 마을버스에서 내리니 안내글에 적힌 제과점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그 제과점이 있는 사잇길로 들어오면 된다고 했거든요. 쉽게 찾았다고 하고 얼른 발걸음을 놀렸는데 그 사잇길로 들어서자 시골에 온 것 같았습니다. 아니, 시골길이 아니라 갑자기 딴 세상에 온 것 같았지 뭡니까. 저 멀리 집들은 보이지만 형체만 보일 뿐 불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 양옆은 온갖 풀들이 자라나 있었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과연 내가 저 안으로 갈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나는 겁이 많거든요. 겁이 많기는 해도 그래도 간다 하고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다행히도 앞에 한 사람이 가고 있었고 저 안에서 이쪽 밖으로 걸어나오는 고등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간 집들, 여기가 사람이 살던 곳이었구나 짐작만 할 수 있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걷는데 땅바닥에 철판들이 깔려있었습니다.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그 소리는 크게 울려 깜짝 놀라게 합니다. 도대체 이 철판이 왜 여기에 깔려 있는 걸까? 그 궁금증은 금방 풀렸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철탑 망루 골리앗에서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24시간 규찰을 서는 풍동 철거민 대책위원회에서는 그 철판을 통해 사람들이 오는 것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한참 영화제가 진행되었을 테지 했는데 나한테는 다행으로 아직 영화제는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철탑 망루 골리앗이 서 있는 소망빌라 맞은 편 한 빌라 담벼락이 영화관이었습니다. 그곳에 영사막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로 '변두리 인권 영화제' 펼침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사람들이 모두 살았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마을마다 골목길에서 이런 영화제를 한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나 봅니다. 은박자리를 깔고 앉아 사람들은 영화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 많은 사람들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고 적고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안쪽으로 갈 생각은 안 하고 가까운 곳에 바로 앉았습니다. 참 고맙게도 옆에 앉아 계시는 분이 몇 마디 말을 걸어주시더군요. 이 자리는 아는 사이냐 모르는 사이냐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소통'이라는 것, 그리 무거운 게 아니란 걸 느꼈습니다.

8시 6분, 드디어 영화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맨 처음으로는 '아콤다'라는 밴드의 노래공연이 열렸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아콤다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여섯 명이 나와서 한 줄도 아니고 자기 서고 싶은 곳에 맘대로 서서 노래 부르고 연주하더군요. 악기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거운 생활 시간(예전 음악시간)에 가지고 갈 법한 실로폰과 피리, 탬버린, 멜로디혼이 그이들이 들고 나온 악기였습니다. 물론 기타도 있었습니다. 봉고도 있었고 유일하게 값나가는 악기일 것 같은 바이올린도 있었습니다. 어느 악기 하나 도드라지게 소리내지 않았습니다. 눈이나 손에 힘주어 연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노래도 목청 터져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구름처럼 부드럽게 그렇게 연주하고 노래 불렀습니다. 작고 여리게 흔들리는 그이들의 몸짓도 좋았습니다. 그이들은 이 영화제에 초대가수로 오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이곳 풍동을 찾았고, 오늘도 음식준비다 뭐다 몸으로 내내 움직이다 잠깐 손에 묻은 물 훔치고 나와 악기를 잡았습니다. 성능 좋은 조명도 없고, 음향기기도 없지만 좋았습니다. 가난한 무대가 오히려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앉은 자리 둘레를 바라보았습니다. 헐리다 만 집들, 부서진 집들, 새까맣게 타버린 차를 보면서 참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분명 저곳에 웃음과 눈물, 희망과 사랑 그런 것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아콤다가 연주하는 저 악기들처럼 각자 자신의 소리를 내고 삶을 연주하며 살았을 텐데……

노래가 끝나고 나서 풍동 철거민 대책위원회 채남병 위원장이 앞에 나왔습니다. "막연하게 주거권을 요구하며 투쟁하기 시작했는데 그 투쟁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게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돈이라는 것 때문에 삶의 자리가 무참히 짓밟히는 양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풍동에 남은 11가구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을 위해서 싸웠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들의 싸움은 그들만을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이들은 더 이상 "주택이 상품"이 되는 세상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이들은 잘못된 주거정책과 "삶의 자리가 상품이 되는 사회"와 싸우기 때문입니다.

영화제에서 처음 보여준 영화는 그 유명한 '상계동 올림픽'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안 지는 꽤 오래 되었건만 이제야 나는 '상계동 올림픽'을 봅니다. '변두리 영화제'에 오지 않았다면 다시 몇 년을 더 늦춰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86년부터 상계동에서 강제철거가 이루어졌는데 86년에만 10여 차례 강제철거가 이루어졌다고 영화는 말하더군요. 철거과정에서 4명이 목숨을 잃었다는데, 그 중에는 담벼락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어린아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에는 상계동에서 명동성당으로 다시 부천으로 옮겨 삶의 자리를 찾아야 했던 사람들의 삶과 투쟁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영화 안에서 해설자가 한 말 가운데 기억나는 말이 있어서 옮깁니다.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저분하고 못 살 것 같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살 만한 곳이다. 방값 싸고, 인정이 있는 곳인데 더구나 지하철이 생겨 더 좋아졌다고 했는데 개발한다는 말이 떠돌면서 복부인들이 나타나더니 어느 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와서는 나가라고 한다. 주인이 나가라는데 나가야지 하고 인근 집값을 알아보는데 다 올라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이곳 풍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 돈 없고, 힘없는 이곳 사람들은 이사가라면 가야지 하고 주변의 이사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벌써 집값들은 다 올라 이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풍동에서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0만원을 주고 살 수 있었는데 알아본 곳들은 최소한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40만원을 내야 한답니다. 주택공사가 철거민들에게 내세운 조건은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4인 가구 기준으로 약 7백만 원 가량의 보상을 받든지, 보증금 3천만원에 월세를 따로 내는 25평 공공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든지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를 내며 살던 사람들에게 25평 공공임대아파트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지 않겠습니까. 25평이 아니라 크기는 작더라도 주민들이 얻을 수 있는 아파트를 지어야하는 게 상식이고 도리이지 않을까요? 철거민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임대아파트를 지어줄 것과 공사기간 중 가수용단지를 조성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채남병 풍동 철대위 위원장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풍동 철대위가 요구하는 것은 아주 소박합니다. 더 이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길거리로 쫓겨날 수 없기에 우리는 이곳에 주민 실정에 맞는 영구임대아파트가 지어지고 그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가수용단지를 지어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주거권이 파괴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무주택 서민을 위한 주택정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주택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는 정부와 주택공사는 무주택 서민을 내쫓으면서 무슨 정책을 실행하겠다는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저분하고 못 살 것 같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살 만한 곳이다. 방값 싸고, 인정이 있는 곳인데"라는 영화 속의 말처럼 작고 누추한 집에서도 생명을 키우고 인정을 나누고 꿈을 꾸는 사람들이 우리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넓고 화려한 집에서만 피어나지 않습니다.

화면을 통해 본 상계동 주민들의 삶은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쫓겨나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살다가 다시 부천으로 옮겨 가건물을 세우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몇 차례 철거를 당하고 맙니다. 추운 겨울 어쩔 수 없이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살아야 했던 이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 삶을 사랑하는 얼굴이었습니다. 해맑게 웃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 땅바닥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카메라에 손짓을 하며 웃던 아이들의 얼굴은 좀처럼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무원들이 와서 그들이 애써서 지은 가건물을 뜯어내고 이를 말리는 주민들을 폭행하는데 그 중에서도 한 남자 고등학생에게 몰매를 가하는데 참 기가 막히더군요. 그 학생이 "너무 억울해"라는 말을 하며 땅을 치는 모습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두 번째 영화는 '계속 된다'라는 이주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이날 '변두리 영화제'는 풍동에 남은 주민들과 일산지역에서 사는 이주노동자들이 추석을 맞으면서 함께 영화와 음식과 마음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대책위와 꾸준히 활동을 함께 해온 투쟁과 밥, 피자매연대, 두리하나 공부방, 고양시 평화바람이 같이 준비를 했지요. 명동성당에서 투쟁하는 이주노동자 한 분이 나와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여기 이곳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무 투쟁 안 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멀리서 온 월곡동 철대위 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벽 뒤에 있는 그 무엇과 싸우는 것 같다. 사회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제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철거를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이사하는 게 아니라 쫓겨나고 강제로 철거를 당하는 사람들의 뒤에는 이윤을 극대화시키려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겉으로는 쾌적한 주거환경 개선과 무주택자들에게 주택을 공급한다는 개발사업이 오히려 부동산 투기의 온상이 되어 하루아침에 삶의 자리를 빼앗기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철거민들의 현실을 한번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서울 경기 지역만 해도 대여섯 군데에서 강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는데 우리 한번쯤 가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은 단지 포크레인으로 때려부술 수 있는 벽돌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물질만은 아닙니다. 집은 사람들이 숨쉬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죽는 곳입니다. 누군가 개발을 통해 돈을 벌 수 있을 때 앞으로도 계속 강제철거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 번째로 틀어준 것은 풍동 철거민들의 기자회견을 담은 '우리에게 쉬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입니다. 풍동 주민 중에 한 할머니께서는 그 전에도 인근 지역에서 강제철거를 당해 풍동으로 와서 13년을 살았는데 다시 강제철거를 당했다고 영상 속에서 말씀하시더군요.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철거를 당합니다. 그렇게 쫓겨나고 쫓겨나고, 아니 쫓아내고 쫓아내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아예 삶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걸까요?

풍동에 남은 주민들은 함께 삽니다. 열 한 집이 함께 산다는 게 말처럼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상 속에서 한 주민은 "처음에는 공동으로 생활하는 게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나름대로 적응이 되어 서로 이해하고 산다"고 하더군요. 채남병 위원장도 그럽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규칙을 정해서 공동생활에 적응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재미있고 신나게 생활을 하지요.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도심생활에서 잊어버렸던 시골의 정겹던 추억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그 생활을 저는 곁에서 보지 못했지만 보지 않았어도 그대로 믿깁니다. '존중', '아끼는 마음' '사람 사는 냄새'와 같은 말은 실천하지 않고는 그냥 할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1부 영화제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은 술도 한 잔씩 돌리고, 쫄깃쫄깃한 떡도 나누어 먹고, 고기찜도 나누어 먹었습니다. 먹으면서 말하고 싶은 사람은 나와서 말하고, 노래하고 싶은 사람은 노래하고. 함께 둘러앉은 사람 중에 천성산 도롱뇽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손 전화를 받더니 위에 망루에 계신 분이 "볼 수는 없지만 노랫소리가 들려 전화한다"고 했다는군요. 그 분은 망루에서 저쪽을 보면서 규찰을 서는 중이랍니다.

도롱뇽 친구들 중 한 사람이 앞에 나와 인사를 합니다. "사람과 동물 모두 자기 집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올챙이송'을 가사를 바꿔 불렀습니다. 노래 끝에 "포크레인 안돼!"라는 말을 하는데 그 노래를 들으면서 천성산도 포크레인으로 도롱뇽을 비롯해 그 산에 사는 생명들을 죽이고 있고, 이곳 풍동도 포크레인으로 삶의 터전을 싹쓸이 해버리고 정말이지 이 나라에서는 돈 되는 것을 위해서 돈 안 된다 싶은 것은 싹 다 밀어버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폐허 위에 핀 꽃처럼 이곳 풍동 무너진 집들 속에 사람들이 삽니다. 추석 명절에 이곳 주민들은 친척들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주민 대부분이 수배에 걸린 상태라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지만, 그이들의 마지막 공간인 철탑 망루를 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쯤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현재 어떤 상황인가 위원장으로부터 들어보았습니다.

"주택공사에서 협상을 하자고 합니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지난 4월 3일 1차 침탈이 있은 후 협상을 하자고 하더니 5월 8일 날 다시 침탈을 했거든요. 그래서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5월 사건이후 주택공사는 다른 방법으로 철대위를 와해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즉 물리력으로는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자 각종 협박과 분열책동을 일삼았습니다. 북파공작원 단체를 철대위 주변에 감시시키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한테 '저 사람들은 몇 억씩 돈을 달라고 그런다'고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는 빨갱이라고 하면서 유언비어를 유포하지요. 그것은 자신의 부도덕함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고 공권력과 합세해서 또다시 침탈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제 1부가 끝나고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2부에서는 자유롭게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서 밤새 본다는데 나는 밤 12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에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제법 차가워진 밤 공기가 몸을 춥게 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습니다. 행사 중간에 누군가 "참 아름다운 밤입니다" 했는데 딱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송년 변두리 영화제는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열려도 풍동 철대위 문제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어 축하의 의미로 송년 변두리 영화제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시월입니다. 작년 시월에 이곳 풍동에 강제철거가 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을 앞두고 길거리로 내쫓겼던 일이 벌써 일년이 되어갑니다. 일년은, 싸우는 이들에게 일년은 보통 사람들의 일년과 다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채남병 위원장의 말을 옮깁니다.

"고립감 같은 것이랄까요. 물론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 제 사회 민중단체들. 그러나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못 만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곳 풍동 철거민들 모두는 승리를 해야겠다는 어떤 일념, 그리고 주거권을 쟁취하면 더 큰 해방감과 더 큰 기쁨으로 세상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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