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아직’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동아시아 과학

[박석준의 의학철학이야기](7) - 전근대 사회와 한의학의 탄생3

5절 전근대 한의학의 황로학적 특징

주나라의 易인 『주역』은 소위 고대적 중국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 사상적 근원이 된다. 『주역』은 역사상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주역』의 모습은 전국시대의 『주역』이다. 그러나 『주역』에는 전국시대에 발전한 陰陽이나 五行의 사상이 없다.1) 특히 오행은 주나라의 문화권에서는 배척하던 것이었다. 음양오행사상은 非周文化圈에서 연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비주문화권은 바로 산동성 북쪽을 포함한 발해만 주위의 여러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齊나라였다.2) 이곳은 周 문화와는 다른 黃老學이라는 독자적인 문화가 성립한 지역이다.3) 바로 여기에서 음양과 오행이 결합하여 음양오행이라는 동아시아 고유의 사고체계가 탄생했던 것이다. 황로학은 이를테면 해안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소위 내륙문화라고 할 수 있는 주문화와 여러 측면에서 차이점을 갖고 있다.

황로학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지만 황로학은 人事를 중시하는 주문화에 비해 자연(우주)과 사회, 그리고 몸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한다. 인사를 중시하는 전통에서는 의학이 발전할 수 없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의학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황로학에서의 天은 우주, 자연, 역사, 인생 등을 포함하며 이는 氣象이나 物象을 통해 드러난다. 황로학에서의 ‘천’은 이를테면 자연의 질서다[自然天]. 그것은 사람의 자의적인 뜻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질서는 예를 들어 봄여름가을겨울, 風寒暑濕燥火, 자연에서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사람은 그 스스로 자연의 하나로서 이러한 질서에 따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유체계 속에서 건강은 자연의 흐름에 따를 때 얻어지는 것이다. 4) 반면 주문화에서의 ‘천’은 역사적 의지나 사회적 운명을 말하며 그것은 ‘덕(德)’이나 백성의 ‘民心’ 등으로 드러난다[人格天]. 맹자는 마음[心]을 다하면 性을 알 수 있고 ‘성’을 알 수 있으면 ‘천’을 알 수 있다고 했다.5) 결국 주문화에서 ‘천’은 도덕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천’은 사람의 마음과 같은 수준에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뭄이나 홍수, 유행병, 전염병과 같은 재해가 일어났을 때 이를 곧바로 정치적 상황과 연결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상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災異論이다. 재이론은 흔히 미신이라고 치부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글은 재이론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릇 하늘과 인간은 한 가지 기로 되어 있고, 기가 통하기 때문에 感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應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 상서란 하늘의 기쁨이며, 變이란 하늘의 노함인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과 노함이란 하늘의 기쁨이나 노함이 아니라, 바로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노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노함은 임금님의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임금님의 하시는 일이 至善이 아님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기쁜 마음은 和氣를 낳아 이 화기가 위와 아래에 충만할 것입니다.” 6)


첫째, 재이론은 황로학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지만 자연과 사회, 그리고 몸의 보편적 연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연관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사회에서도 자연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재이를 곧바로 정치와 연결시킬 수 없다. 재이론은 자연과 사회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분리하여 보지 않는 전근대적 사유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셈이다.

둘째, 재이론은 주로 왕권과 臣權 사이에서의 정치투쟁의 수단이었다. 재이론이 논의되던 시기의 천문이나 의학 등의 문헌에서는 재이를 정치와 직결시켜 설명하지 않는다. 재이론은 대개 역사서와 같은 정치 문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7) 당시의 사람들이 미개하여 자연이나 몸에서의 재이를 정치와 직결시킨 것이 아니라 주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천’의 의지가 자연이나 몸에서 드러난 것으로 해석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민심 조작용으로서 재이론이 역할했던 것이다. 황로학의 전통 속에 있는 한의학에서는 유행병이나 전염병의 원인을 자연 질서 자체의 어그러짐이나 자연의 질서를 어긴 사람의 잘못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황로학을 道家와 法家의 결합이라고 평가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로학은 자연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정치에서는 엄격한 법의 질서와 힘에 의한 질서의 유지를 강조한다. 정치 역시 하나의 자연적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일견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 곧 법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황로학에서의 자연은 대상화된 자연의 법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와 같은 차원에서 파악된 것이며, 사람 역시 그러한 질서의 하나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법 역시 자연의 질서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주문화에서는 禮를 중시하고 德을 숭상한다. 법은 일정한 사회적 틀[刑]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강제하지만 예는 일상생활을 규제하며 덕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까지 규제한다. 물론 황로학에서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황로학에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비울 것을 요구한다.8)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외부의 대상에 의해 내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연의 질서를 올바로 볼 수 있고 거기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비해 ‘예’와 ‘덕’은 항상 타인에 대한 것이다. 내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修身]은 자연의 질서와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집안[家]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齊家]이며 나아가 나라 사람들을 다스리고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治國平天下]. 몸을 다스리는 원리와 집안을 다스리는 원리,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모두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것은 예에 따르면서 덕을 키우는 것이다.

황로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성의 포용에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그 발생 초기에서부터 공자로부터 ‘怪力亂神’으로 불렸으며 맹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제나라 동쪽 野人들의 말’이라고 하였다(『맹자』 「만장」 상). 육로에 비해 자유로운 해상교통을 통해 해안문화는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그런 과정에서 경제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풍부한 문명도 함께 발전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주문화권에서는 왕도가 무너지니 제자백가가 분분히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로학은 바로 그러한 다양성을 포함하여 용광로와 같이 새로운 사상을 융합해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황로학의 結晶이 바로 한의학이었다.9)

6절 한의학의 탄생

한의학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 맥락에서 형성되어 발전되어 온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농경사회와 그에 기초한 봉건제의 세계관과 방법론을 통하여 성립한 것이 바로 한의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의학은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향하며 이론의 유기적 정합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이 한의학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까지에는 외부와의 교류가 없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근대로부터 하나의 국가가 오늘날의 근대적 민족국가로 일직선상의 발전을 해온 것이 아닌 것처럼 한의학 이론의 형성과정에는 다양한 종족과 나라 사이에서의 경합과 융합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본고에서는 한의학의 탄생이 지리사회학적인 융합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은 농경문화인 황하와 양자강지역에서 발생한 의학10) 과 유목문화인 북방의 의학11) , 유목문화를 계승하면서 농경문화를 집대성한 발해만을 둘러싼 지역의 의학12) , 인도의학 등이 융합되어 주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과 일본에서 발전된 의학체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의 중심은 발해만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의학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융합과 더불어 의학은 인류학적 역사의 총체적 산물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한의학은 단순한 인류의 의학적 경험을 종합한 경험의학이 아니다. 그것은 장구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온 인류의 경험과 이론을 종합한 것이다. 북방의 유목문화가 쌓아온 유산과 주문화로 대표되는 농경문화의 유산이 발해만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융합되어 나타난 결정이 바로 한의학이다.

한의학은 춘추전국시대 해안문화의 황로학이라는 토양 속에서 발원하여 한나라, 특히 後漢 때에 현재와 같은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거기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무수한 임상경험이 있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인물은 잘 알려진 扁鵲13) 이다. 편작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미 그 때에 한의학의 기본적인 진단법이 어느 정도 완비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14) 치료에서는 침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문헌의 기록으로는 외과적인 수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경험과 이론이 축적되어 『황제내경』을 이루게 된 것인데, 대체로 진한시대에는 한의학의 이론과 더불어 임상에 관한 대부분의 기본적인 내용이 정리된다.

한의학에서 쓰이는 약재를 本草라고 부르는데, 이는 약재의 상당 부분이 식물이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약재로 쓰이는 것은 식물만이 아니고 동물과 광물은 물론 몸의 배출물이나 몸의 일부(예를 들면 머리카락이나 치아 등)도 사용된다. 그럼에도 약재를 가리키는 말로 본초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한의학이 기초하고 있는 농경사회가 식물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던 사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16) 이러한 약재에 관한 지식은 東漢 시대에 『神農本草經』이라는 책으로 집대성된다.17)

한편 남부 지역에서는 고온 다습한 지역적 특성상 각종 전염병이나 유행병이 많았고 이런 사정으로 외부의 나쁜 기운에 의해 생긴 질환의 진단과 치료를 집대성한 『傷寒雜病論』이 나온다. 이처럼 한의학은 다양한 문화와 풍토 속에서 축적된 경험을 황로학이라는 틀 속에서 융합해낸 총체적인 이론 및 임상체계다. 여기에는 독자적인 진단 체계18) 와 변증 체계, 그리고 치료체계가 있으며 치료의 방법으로는 침구와 약물요법은 물론 기공이나 방중술, 음악과 미술,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방대한 체계인 것이다.

한의학은 그 출발에서부터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그리고 해안문화를 아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계를 이룬 이후에도 불교의학(아유르베다 의학), 한의학과 출발을 같이 했지만 독자적인 체계를 이룬 도교의학,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근대 서양의학과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근대 서양의학과의 만남은 한의학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근대 서양의학이 거의 모든 면에서 전근대의 한의학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화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강화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도입되었지만 불교는 기존의 문화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교는 그것이 도입된 지역의 전통 문화와 융합되어 새로운 모습의 불교로 재탄생하는 면모까지 보이고 있다. 유목민의 국가인 金元시대에는 오히려 한의학이 더욱 융성하여 전근대의 한의학 이론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 金元四大家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온 근대 서양의학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일신을 강요하였으며 기존의 전통문화를 배척하고 나아가 말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의학은 ‘아직까지’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동아시아의 과학이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라는 관점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탈근대를 말하면서도 거기에는 근대의 입장에서 보는 전근대만 있을 뿐 전근대를 전근대로 보는 시각은 없다. 한의학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근대를 전근대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19) 이는 근대 서양의학의 담당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전근대의 전통 속에서 근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특히 한의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한 시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한의계의 변화는 자신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근대서양과학 일변도의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0)

제도적, 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전통을 갖고 있는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는 의료가 다원화 되어 있다. 이는 스스로 근대화를 이룬 나라에서조차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또 어떤 면에서 그것은 해결되어서도 안 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만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또 하나의 의료제도로 존재하는 한국의 한의학의 역사를 올바로 아는 일은 오늘날의 의료제도와 미래의 의료에 대한 전망에서 불가결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의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7절 철학적 사유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개념의 혼란

모든 개념과 이론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실천되는 사회의 산물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든 이론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차원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이때 그 실천은 항상 총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실천은 자연과 사회와 사람의 몸이라는 조건을 항상 동시적으로 포함하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 사회와 몸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깨졌을 때는 더 이상 그 사회에 적합한 이론 혹은 실천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한 정책이나 간단한 기술에 불과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거기에는 항상 자연과 사회와 몸에 대한 관계가 동시적으로 실현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정치나 경제 이론 혹은 그 이론에 기초한 실천이 단순히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만 기반하고 있다면, 그래서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관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 그 이론이나 실천은 머지않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파괴하여 이론이나 실천 자체가 파기되든가 아니면 자연 혹은 사회, 나아가 몸이 파괴되는 수밖에 없다.

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실천을 의미하는 의학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생명복제나 안락사와 같은 문제가 의학의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의학 자체가 사회적인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잘못된 혹은 일정 定度를 넘어선 실천의 결과로서 윤리문제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의학 이론이나 실천 자체에 이미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할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이 마르고 나서 우물을 파고 전쟁이 나서야 무기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면 그러한 가능성을 미리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역사는 단순한 史實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총체적 연관을 분석함으로써 현재를 되돌아보고 나아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철학적 사유구조를 알아보는 것은 한의학이 과거의 사회에서 실천되었던 총체적 연관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을 통하여 현재의 한의학과 또 하나의 의학 체계인 근대 서양의학의 모습,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살펴보고 현재를 되돌아보면서 미래 의학을 발전적으로 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구조의 차이는 번역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과거의 역사에 접근할 때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전근대를 보는 근대의 시각을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연구는 일정한 틀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서양의 과학(science)이라는 말이 초기에 ‘格物’로 번역되었던 것처럼 모든 과학적 연구는 일정한 틀을 전제로 한다. 격물이란 物을 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상을 일정한 액자, 틀 속에 넣는 작업이다.21)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연구자 자신이 일정한 틀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반성적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 틀은 사회적으로는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단계에 의해 규정되며 주체의 측면에서는 그것을 적용하는 주체의 실천적 입장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틀 자체의 진리성은 역사적이며 상대적이다.22)

번역의 문제는 이러한 틀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전근대 의학에 없었던 ‘신경’이라는 번역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알아보기로 한다.

飜譯은 말 그대로 뒤집는 것이다. 뒤집어서 뜻을 가리는 것,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은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는 번역의 대상이 되는 언어가 특정 시대와 사회라는 바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쏘싸이어티society’라는 말은 오늘날 ‘社會’로 번역된다. 물론 社와 會는 기존에 있던 말이지만 ‘사회’처럼 연용해서 쓰인 예는 드물며 더욱이 오늘날의 사회라는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社’는 원래 토지의 신을 의미하여, 새 왕조를 세우면 반드시 토지의 신인 ‘사’와 곡물의 신인 ‘稷’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社稷은 곧 국가를 의미했다. 행정단위로는 25家 또는 사방 6里를 ‘사’라고 했다. 조선 중기 한 ‘家’의 구성원 수가 100-200명을 상회하기도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미암 유희춘의 경우) 그런 ‘가’가 25개씩 모여 있는 ‘사’는 매우 큰 조직인 셈이다. 또 사회에서의 ‘會’는 원래 고기와 같은 음식을 담아 요리를 할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하며, 여럿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는 데서 모인다는 말로 뜻이 넓어졌다. 이처럼 ‘사’와 ‘회’는 각각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23)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전근대 사회에 도입된 ‘사회’라는 말은 근대적 개인의 결합을 기반으로 한 관계에서 형성된 관계를 말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전근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근대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번역어들이 당시에 이해되기 힘들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근대에서의 사회는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家’의 결합이었고 그것도 봉건제를 바탕으로 하는 결합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自’나 ‘己’라는 단어는 있었지만 그것은 독립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가’에 속한 구성원으로서의 개별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나를 가리키는 ‘我’ 자의 어원은 낫처럼 생겨서 벨 수 있는 무기인데, 글자 속의 ‘戈’는 적이 아니라 아군 혹은 공동체 내의 배반자를 처단하거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쓰였던 무기였고 동물을 犧牲으로 쓸 때도 썼다. 희생 역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我’는 오늘날 나를 의미하는 글자지만 원래의 의미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글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전근대에서 ‘가’를 떠난 개인은 있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의 ‘호적을 판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호적에서 빠지는 것은 곧 사회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적인 죽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전근대 ‘사회’에 근대적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가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

‘자연’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전근대 문헌에서 자연은 오늘날의 ‘네이춰nature’의 번역어가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 자연스러움이라는 의미로, 여기에는 오늘날의 자연도 포함되지만 그것은 좁은 의미의 자연만이 아니라 人事 등을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외부에서의 충격이나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동을 하면서 거기에 일정한 법칙, 곧 道를 실현하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그 실현이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러므로 ‘道法自然’이라고 하면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도는 자연에서, 스스로 그러함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전근대의 ‘자연’은 명사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도 주체인 나와 분리된 대상이 아니다. 곧 ‘자연’은 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근대의 ‘자연’은 이를테면 내 몸 속으로 들어온 자연이며 내 마음까지 투영된 자연이다. 이에 비해 ‘네이춰’는 주체와 대립하는 대상이면서 정신과 대립한다.

氣의 경우는 번역의 어려움이 더 크다. 우리는 ‘氣’를 그냥 ‘기’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vital force’ 혹은 ‘vital energy’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영역에도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氣’를 ‘기’라고 그냥 말하는 것보다는 한 단계 올라선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역된 용어는 적어도 기를 외국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외국어로 인식하는 것과 자국어로 인식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외국어로 기를 보게 되면 적어도 기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설혹 기 본래의 의미는 알 수 없거나 일면적인 이해에 그친다고 해도 대상을 대상화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氣’를 모국어로 보게 되면 ‘氣’ 본래의 뜻과 기존의 모국어로서의 기의 뜻이 뒤섞이게 되어, 마치 ‘nature’를 자연이라고 번역하면서 본래의 ‘自然’이라는 뜻을 혼동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점에서는 ‘氣’를 차라리 ‘Ch'i’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이하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사송령, 「음양오행학설사」(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신지서원, 1993), 475 쪽.

2) 사송령이 지적한 것처럼 제나라와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초(楚)나라였다. 초나라는 노자의 나라이기도 했다. 사송령, 앞의 글, 469 쪽.

3) 황로학에 대해서는 김희정의 앞의 글과 박석준, 「한의학 이론 형성기의 사상적 흐름에 대하여」(김교빈, 박석준 외, 『동양철학과 한의학』, 아카넷, 2003) 참조.

4) 이에 비해 근대 서양과학에서는 자연과 사회와 고립된 몸에 필요한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과 같은 영양소를 섭취하거나 외부의 병을 일으키는 병인을 없애거나 막는 데에서 건강이 주어진다고 보고 있다.

5) 맹자를 황로학이 유행했던 직하학자의 한 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맹자는 일부 황로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결코 황로학에 동조하지 않았다.

6) 『중종실록』 권31, 중종 12년 12월 정사. 대사간 이성동 등이 중종에게 올린 상소문 가운데의 앞부분이다. 박성래, 「전통적 자연관」, 『한국사』 27(국사편찬위원회, 1996) 47 쪽에서 재인용.

7) 『명종실록』에는 “流星이란 백성이 떠나고 흩어지는 조짐이니 임금은 이런 비상시를 당하여 일대 각성해야 할 것”이란 기록이 나온다. 박성래, 앞의 글, 23 쪽에서 재인용.

8) 『管子』 사편은 초기 사상을 대표하는 중요한 저작이다. 박석준, 「관자 사편의 정기설 고찰」(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원 석사논문) 참조.

9) 이상 황로학의 특징에 대한 것은 앞의 사송령의 글 472-473 쪽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여 재해석한 것이다.

10) 이는 훗날 『황제내경』과 『상한론』의 구성에 편입되는, 다양한 편차를 갖는 일차 자료들을 말한다. 石原明은 황하문명권에서 『소문(素問)』(음양오행), 『영추(靈樞)』(침구)가 나오고 양자강 문화권에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약물), 강남문화권에서 『상한론(傷寒論)』(경험의학)이 나온 것으로 보고 있지만(石原明, 『漢方』, 中央公論社, 1963, 제2장 참조) 『소문』과 『영추』를 아우르는 『황제내경』은 황하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존재하던 일차 자료를 종합 정리한 제나라에서 『황제내경』의 내용과 기본적인 골격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황제내경』의 기본적인 내용이 제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저술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황하나 양자강 지역의 문화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황제내경』을 종합 정리할 수 있는 철학이 없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서로 배타적인 철학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한의학 이론이 형성되던 전한(前漢) 시대의 ‘중국(中國)’은 한족(漢族)의 주(周)나라를 중심으로 한정된 영역, 곧 ‘세계의 중심나라’가 아닌 ‘안에 있는 나라’였다. 춘추전국시대는 다양한 민족의 다양한 나라들이 경쟁하는 시기였으며 한(漢)나라에 의한 ‘통일’은 결국 한족에 의한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의미한다.

11) 티베트 의학과 몽골의 의학이 중심이 된다. 몽골의학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중국이라는 관점에서 서술된 한계는 있지만 伊光瑞, 『內蒙古醫學史略』(中醫古籍出版社, 1993) 참조.

12) 이는 주로 춘추전국 시대의 제(齊)나라와 연(燕)나라의 의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학의 바탕은 바로 황로지학(黃老之學)이다. 황로학에 대해서는 김희정, 「황로사상의 천인상응관 연구」(서강대 종교학과 박사학위논문)를 참조하고 발해만 지역의 문화적 특성에 대해서는 우실하, 『전통문화의 구성원리』(소나무, 1998) 참조.

13) 편작은 BC 307년 경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노우 요시미츠(1987), 동의과학연구소 옮김, 『몸으로 본 중국사상』(소나무, 1999, 53 쪽) 참조. 기록에 나타난 편작의 활동 시기는 350년 이상이 된다. 춘추시대의 사람인 것은 분명하나 그 이상은 확정하기 어렵다. 또 편작이 활동한 범위 역시 상식을 넘어선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는 많은 경우 편작이라는 전설적인 명의를 가탁(假託)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편작의 고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제나라의 노국(盧國)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4) 편작의 주요한 진단법은 망진(望診)과 맥진(脈診)이었다. 한의학의 진단법에는 망문문절(望聞問切)이라고 하는 사진(四診)이 있다.

15) 『신농본초경』에 실린 약재는 모두 365 종인데, 그 중 식물이 252 종, 동물이 67 종, 광물이 46 종이다.

16) 반면 유목사회의 의학에서는 동물성 약물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1745년에 간행된 藏族의 『晶珠本草』에는 漢族의 본초에 비해 광물성 약물과 더불어 동물성 약물이 많이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동물성 약물의 분류가 角類, 眼類, 舌類, 齒類, 肝類, 心類, 血類, 小便類처럼 매우 구체적으로, 또한 전문적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蘿達尙 主編, 『新修晶珠本草』(四川科學技術出版社, 2004) 참조.

17) 한의학에서는 약이나 음식은 그 작용의 정도 차이일 뿐 그 근원은 모두 같다고 본다. 음식과 약재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고의 5장과 6장 참조.

18) 이에 대해서는 본고의 4장 참조.

19) 이와 연관하여 한의학의 입장에서 본 근대와 전근대의 시각 차이에 대해서는 박석준, 「한의학에서는 무엇을 보는가」(『과학사상』, 2003년 겨울, 통권 제47호) 참조.

20) 이는 한의대의 커리큘럼이나 교재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도 없이 한의학계에서 나오는 논문의 대다수가 근대 서양과학의 방법론에 입각한 것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분명하다.

21) 이를 山田慶兒는 필터(filter)라고 부른다. 山田慶兒(1982), 박성환 옮김, 『중국과학의 사상적 풍토』(전파과학사, 1944) 1 필터론 「중국의 문화와 사고양식」.

22) 따라서 오늘날 무규정적으로 사용되는 ‘과학’이라는 말은 역사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으로, 다시 말하자면 ‘근대 서양과학’이라거나 ‘전근대 동양과학’과 같은 한정적 개념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23) 이 사회라는 말이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일본의 1868-1877년 대였다(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번역어 성립사정』, 일빛, 2003, 1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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