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말레이시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가족은 다른 중국인들과 함께 쫓겨나서 영국인들이 만든 ‘뉴 빌리지’로 갔습니다. ‘뉴 빌리지’라고 불리는 그곳은 철조망과 울타리로 둘러싸여있고 심지어 철조망에 전기까지 흐르고 있는 그야말로 정말 ‘새로운 마을(뉴 빌리지)’이었습니다. 전기 철조망 주변에는 깊은 도랑도 파져 있어 외부 세계와 우리를 갈라놨습니다. 여성들은 마을 출입 허가를 받기 전에 알몸 수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수용 시설에서 사는 거주자들은 말라야 전역의 산과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1948년과 1950년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저는 막내였죠. 우린 가난했고 생활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일본인들이 말레이시아를 떠나자마자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바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병석에 누우셨고 다시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불운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병이 생겼다는 미신을 믿으셨죠. 그래서 어머니는 저를 멀리 입양 보내셨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시절이 어렵고 또 제가 여자아기였기 때문에 양부모 찾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결국 저는 맘씨 좋은 여성에게 입양되었는데, 이미 저를 입양하기 전에 2명의 여자아이를 입양한 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딸 하나와 아들 셋의 친자를 슬하에 두고 있었죠. 그녀는 저를 ‘데릴 며느리’로 데려간 것이어서 후에 저는 그 집 막내아들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 할머니와 함께 있는 관 수이 리안 |
6살인가 8살에 저는 CPM(말라야공산당)이 우리 동네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오빠가 벌써 당원이자 게릴라 멤버로 동네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정부군과 CPM 게릴라들 사이에 교전하는 소리를 듣곤 했지요. 우리 집은 경찰서 바로 옆에 있어서 양어머니는 우리 잠자리 아래에 공습 피난처 같은 걸 마련해 두셨습니다. 양어머니 역시 CPM의 지지자였습니다. 어머니는 게릴라 동지들을 위해 음식을 사서 오빠를 통해 전달하곤 했습니다. 또 아침 일찍 새 신발을 신고 나가서 그 신발을 게릴라 동지들에게 주고서 낡고 찢어진 신발을 신고 밤에 돌아오셨죠. 그 시절에 혁명 운동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우리 마을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혁명 운동의 한 부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정부군의 저격으로 사망한 오빠
오빠는 한 게릴라 부대에 음식을 전달하다가 정부군에게 저격당해 죽었죠. 정부군은 오빠를 속옷만 입혀서 트럭 뒤에다 죽은 개처럼 매달아서는 우리 마을 밖 10킬로미터나 끌고 갔습니다. 집으로 돌려보낸 오빠의 사체는 훼손되어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오빠도 바로 체포되어 CPM의 일원이라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년을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말라야에서 추방당한 이들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 푸조로 가길 요청했습니다. 둘째 오빠는 지금도 거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후 어머니에겐 셋째 아들만 남게 되었죠. 미래 남편인 그 사람은 그때 당시 여전히 어렸습니다. 그러나 13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고무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면서 한 달에 고작 1달러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육받을 기회는 전혀 없었지만 굉장히 생활력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우리 초가집이 낡고 썩자 자신이 건축 공사장에서 노역을 하고 그 대가로 건축자재를 얻어와 새집을 지어주었습니다.
임시 정부 시절
임시정부 기간 동안 우리가 갇혀 지내던 캠프에서는 오전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말레이 군인들이 중국인 캠프를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어린 소녀들이었던 우리는 소녀들에게 치근덕대는 말레이 군인을 굉장히 경계했습니다. 이 캠프 안에는 정보원과 첩자가 많았습니다. 어떤 날에는 갑자기 모두 집밖으로 나오게 한 뒤, 모든 집을 수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색출해낸 반역자들을 트럭에 싣고 CPM 거점으로 의심되는 지점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런 사건은 내 어린 시절에 자주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도 한번 이렇게 체포된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와 저는 어머니가 어디론가 실려 갈 때 엄청 많이 울었었죠. 어머니가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는 무일푼에 겨우 죽으로 연명했었습니다.
청년 활동가로 거듭나다
10살에 되어서야 겨우 학교에 갔습니다. 5년간 공부하면서 마지막 해에는 야간반에서 공부했었죠. 이후 저는 재봉사가 되었죠. 그 무렵부터 여러 정치 정당과 그 지부 조직들이 말라야 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말라야 중국인 연합(MCA), 노동당 등이 있었죠. MCA는 특히 우리 지역에서 활동이 많았는데, MCA 당원 중 다수가 과거 CPM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CPM이 지하로 숨으면서 거점을 태국과의 국경지역인 북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신 MCA에 가입했습니다.
내 나이는 어렸지만 당시에 MCA의 고위 지도부와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합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부유한 자본가들이었고 그래서 저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동당에 더욱 끌렸고 결국 학습 모임에 가입했습니다. PPP(민중진보정당)같은 다른 정당 역시 활동을 했었죠. 이런 정당들의 당원이나 지도부들 중에는 과거 CPM의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동당의 당원 대부분은 좌파 경향의 학생과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노동당에서 조직한 학습 모임에서 우리는 무지함, 순박함, 탄압과 착취에 대한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때 어리고 순진해서 교사들이 너무너무 열심히 가르쳤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 그리고 압제자와 억압받는 자의 차이에 대한 교육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수많은 진보적인 노래들을 부르고 작곡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노동당 활동
저는 열성적인 활동 당원이 되었고 웅변대회에 참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글을 암기하고 좌파 학생들에게 연설 요령을 지도받았습니다. 저는 굉장히 열심히 연습했고 저를 가르친 선생님도 그 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비록 제가 너무 떨리는 나머지 제가 연설 내용을 잊어버리긴 했지만 상까지 받았지 뭐예요!
제 연설의 주제는 우리가 왜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에 반대해야 하는가였어요.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이유는 보다 정교하게 우리를 통제하려는 영국의 신제국주의 음모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싱가포르가 이미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되었었죠. 영국의 중재로 사바와 동부 사라왁은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에 말레이시아 반도를 결합했습니다. 저는 당시 당 지도부 후보자가 되는 훈련을 서서히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노동당 지역 지부 중 한 곳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정부는 우리 위원회 구성원을 한명씩 체포했고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1965년인가 1966년 무렵, 우리는 모든 당 지부에 여성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좋은 지도자가 아니었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의 잦은 체포 작전으로 노동당의 모든 지도자와 간부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동당 페락 지부의 여성 위원회 의장이 되었을 때 지도부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어서 무척 어려웠습니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우리들은 상황을 호전시켜야만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우리 지도부 중 몇몇이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은 우리의 작업을 비밀리에 지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 정치적 상황은 정말 긴장되고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거리 행진을 했고, 발언자들은 검거를 피하기 위해 발언 후에는 즉각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거리 행진 때마다 정부는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위해 조직한 문화적 활동에도 정부는 진압 경찰을 보내서 최루가스를 쏘아댔습니다. 탕 바오 광이라는 당원은 건물 벽에 투쟁 구호를 썼다가 진압 경찰의 구타로 죽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조직화를 위해 실내 당 대회를 가지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대회에 저는 한 부서의 대표자로서 청중들 속에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진압 경찰이 대회 장소로 들이닥쳐 최루가스를 발포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경찰 구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부의 진압은 무자비했습니다. 그들은 정당의 당 대회도 금지한 것입니다!
제가 참석했던 마지막 당 대회는 1967년이 시작될 즈음 감옥에 수감되기 전이었습니다. 정당 지부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 대회에 참석했고 긴장이 아주 고조되었습니다. 참석한 모두는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진압 경찰이 우리를 둘러 샀습니다. 그러자 대회 진행자와 거리 행진 책임자가 갑자기 체포를 피하기 위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대신해 진행자가 되었죠. 그리고 행진이 이어졌는데, 그때 거리행진은 천명이 넘는 큰 행진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구호를 외치면서 대오를 이끌었습니다. 그 후, 우리 간부들 모두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더 이상 공개된 대회를 가질 수 없었는데, 정부가 모든 영역에 ISA(국가보안법-재판 없이 무기직역 형에 처해짐)를 발동시켜 사람들을 체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노동당은 스스로 해산야만 했습니다.
체포되다
제가 체포되던 날 밤, 경찰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문을 열자마자 경철들이 들이닥쳐 저를 침대에서 끌어내려서는 바로 수갑을 채웠습니다. 어머니는 경찰이 저를 데려갈 때 울면서 경찰에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정말 용감하셨는데요, 어머니는 경찰서까지 따라오셔서 큰 목소리로 경찰들에게 계속 호통을 치셨습니다.
저는 체포된 사람이 저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경찰서의 철장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경찰 트럭은 그날 밤 사이렌을 울리면서 모든 곳에 있었습니다. 한편 나의 동지들과 나는 내내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화장실만큼 작은 철창에 따로따로 한명씩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있던 철창에서 이전 수감자들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벽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놨습니다. 저는 우리 지도부와 계획,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심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정말 말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 심문이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한 달 뒤, 그들은 저를 석방했지만 매일 경찰서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고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하로 숨어들다
어머니는 제가 석방되자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석방되고 얼마 후, 저는 지하 활동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는 시골로 향하는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다시 떠나는 것에 무척 슬퍼하셨고 우시면서 집에 있으라고 사정하셨습니다. 제가 떠난 후 어머니는 홀로 사셨습니다. 제가 형제들 중 집을 떠나는 마지막이었죠. 어머니는 제가 떠난 후 항상 우셨습니다.
전국자유전선을 구성하다
우리는 시골에서 스스로를 조직하면서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네다섯 명의 지하조직 당원이 ‘거점’ 또는 세포조직을 구성하고 함께 살면서 일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훈련 중 하나로 닥쳐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후에 저는 벼 농작 농부들의 조직화를 돕기 위해 먼 지역을 이동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주석 광산에서 일하면서 고무를 가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로 살아가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육체노동자로 일해 왔기 때문에 농부들과 하나가 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운동을 위해 젊고 잠재력 있는 활동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농부들에게 진보적 사상을 심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다른 혁명 지역을 개발하느냐의 시작이었습니다.
지하조직 활동은 말라야 전국자유전선(MNLF)을 구성하면서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도부는 CPM과 동맹을 위해 노력했고, CPM과 동맹의 방식은 그 지도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조직원들은 게릴라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MNLF 이름으로 우리는 말레이시아 전역의 수많은 동지들을 양성하고 훈련했습니다. 대중들은 매우 협조적이고 우리를 존중했으며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MNLF는 또는 지하 활동으로 만든 문건을 출판했는데, “불타는 들판”, “붉은 동녘”등이 있었습니다. 이 문건을 살포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조직 채널을 활용하는 독창적인 방안을 고안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
도망자로서의 삶 때문에 어머니와 오래도록 헤어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서 훌쩍 버스를 타고 언니 집으로 갔습니다. 동지들에게 말도 없이요. 거기서 며칠간 묶으면서 어머니에게 저를 보러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머니를 다시보자 너무 행복했고 그 감정은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절대 울지 않으셨고 매우 강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한번 울었거든요.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간 제 친구들과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우리는 이틀 밤낮을 함께 했고 돌아가는 길, 버스정류장에서 어머니와 작별 인사 하는 내내 저는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다시 만날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로 어머니는 홀로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분명히 우셨을 것 같아요. 우리가 만나는 내내 어머니는 한 번도 활동을 그만두라고 부탁하지 않으셨어요. 저의 생모와 양어머니 모두 제가 게릴라 활동을 하는 줄 모르고 돌아가셨어요. 저 역시도 그분들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오길 양어머니께서 얼마나 학수고대 하셨는지 제 맘은 아직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함께 나눴습니다.
화려한 인생
제 인생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정글에 남겨졌지만 우리 삶은 소박하면서도 충분한 먹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영웅적이고 환상적인 뭔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혁명을 성공하진 못했지만 우리 자신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활동가가 된다는 것과 게릴라가 된다는 것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게릴라에 참여하면서부터 제 삶에서 그것은 분명해 진 것이 있습니다. 저의 존재는 제 군대의 생존과 직결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고 그래서 추상적인 혁명이론을 터득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게릴라가 되고서 얻은 모든 경험으로 이제 전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습니다. 혁명적 투쟁이 바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혁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번역]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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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