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설의 장기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오”
“분명하지가 않다. 잘 모르겠다.”
“당신의 말은 너무 신중합니다.”
“무슨 신중, 신중하지 않다, 나는 정말 잘 모르겠고 경험이 없다.”
위의 대담은 모택동이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와 1960년 다시 만나 나눈 이야기의 편린이다.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의 장기계획을 묻는 스노의 말에 모택동은 시종일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대장정과 연안시절을 통해 이미 평생지기가 된 두 사람, 스노는 혁명 이후의 중국에 오고 싶어 했고, 모택동은 1960년 그를 중국에 불러들인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말뜸은 다름 아닌 중국 사회주의의 건설과 관련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모택동. 스노는 그의 솔직한 답변에 당황했고,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듯이 사회주의 건설 또한 모택동이라면 비록 이제까지 난관 속에 있지만, 장기적인 기획의 일환이므로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거듭 그에게 밝힌다. “잘 모르겠노라고.” 모택동은 이 대담을 지난 번 소개한 1960년 확대중앙공작자회의에서 민주집중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인용한 바 있다.
모택동과 모택동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운동의 목적은 당과 간부들의 사상과 행동을 혁명화하고 대중의 사상의식과 사회주의 정신을 고양시켜 국가 특히 농촌의 사회.경제 생활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그리고 ‘수정주의적’ 경향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막강하던 모택동의 지도력도 모택동 특유의 대중운동으로 인한 혼란을 원치 않았던 당 관료층에 의해 운동의 취지와 목적이 무색해지게 된다.
모택동식 대중동원에 의한 문화혁명의 기치,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통한 주체의 일신과 재편의 노력이 관료의 저항은 물론 대중의 무관심으로 거듭 실패했을 때, 모택동과 모택동주의자들의 절망과 공포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택동의 정치적 좌절, 마이스너의 말대로 20여년의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이 세우고 이끌었던 당을 더 이상 자신이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은 모택동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혁명기구에서 보수적인 관료기구로 변해버린 중국공산당,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도 그것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 혁명의 빛나는 승자였지만, 사회주의 건설에서는 엄연한 패자였던 모택동, 일련의 경제계획의 실패 속에 맞닥뜨린 정치적 실각이라는 현실 앞에서 모택동은 권력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서 모택동은 결코 우회로를 택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기획의 부재를 토로하면서 다시 시작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정말 숨기지 않았다. 자신은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없으며 농업이면 농업, 그 토양과 식물작물재배 등 구체적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 있다는 것, 따라서 이에 대해 학습하고 있으며 학습을 통해 새로운 구도를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 1960년 5월 전국기계공업기술혁신전람회에서의 모택동, 상해 |
그러나 이제까지 사회주의 건설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경로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원칙까지 저버린 것은 아니다. 모택동은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소련의 선진경험을 배우되, 그것을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중국적 현실에 적용하고 새로운 자기경로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당의 작풍은 그러한 탐구와 조사보다는 당장의 성과에 급급하고 관료주의의 만연 속에서 기계적인 행위들만이 성행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모택동은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비판과 자기비판은 일종의 방법이고, 인민 내부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며,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만약 충분한 민주생활이 없다면 진정한 민주집중제는 없고, 비판과 자기비판이라는 이러한 방법을 실행할 수 없다. 우리들은 현재 많은 곤란이 있지 않은가? 군중에 의거하지 않으면 군중과 간부의 적극성을 발동하지 않는다면 곤란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군중과 간부에게 이런 정황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군중.간부와 마음을 교감하지 않는다면,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을 말하게 할 수 없게 한다면 그들은 당신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감히 의견을 내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의 적극성을 발동할 수 없다. 나는 1957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집중이 있고 민주가 있고 기율도 있고 자유도 있고, 통일의지도 있고 개인 심정의 펼침이 있는 생동활발한 그러한 정치국면을 조성해야 한다고. 당내외 모두 이러한 정치국면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정치국면이 없으면, 군중의 적극성은 발동될 수 없는 것이다. 곤란을 극복하는데, 민주가 없으면 이룰 수가 없다. 물론 집중이 없으면 더욱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가 없다면 집중도 없는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 모택동이 몸서리를 치며 추구하고자 했던 또다른 진리는 사회주의 사회에도 계급투쟁이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각 역사단계는 이처럼 잘못 처리된 일이 있다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이러한 사실은 아주 많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역시 그러한 잘못을 피하기 어렵다. 정확한 노선에 의한 영도의 시기이든 잘못된 노선에 의한 영도시기이든 모두 그것을 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별은 있다. 정확한 노선이 지도하는 시기에는 잘못 처리된 것이 발견되면 곧 살펴 구별할 수 있고, 평반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배상하고 사과할 수 있고, 그들의 심정을 풀어줄 수 있고, 다시 새롭게 대두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노선이 지도하는 시기에는 이렇게 할 수 없고, 단지 정확노선을 대표하는 사람에 의해 적당한 시기에 민주집중제의 방식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국내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는 이미 소멸되었고, 지주계급과 자산계급의 경제기초는 이미 소멸되었으며, 현재 반동계급은 이미 과거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다. 가령 이미 1949년 인민공화국 건립 당시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반동계급의 잔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잔여에 대해서 결코 경시할 수 없다. 반드시 계속해서 그들과 투쟁해야 한다. 이미 뒤집힌 반동계급이 복벽을 기도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부르조아 분자는 산생될 수 있다. 전체 사회주의 단계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은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계급투쟁은 장기적이고 복잡하며, 때로는 심지어 격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위의 지도하에 군중노선을 실행하는 것이 특히 전체 반동계급의 전정에 대해서는 반드시 군중과 당에 의거해야 한다.
▲ 모택동의 대중들 |
“이미 타도된 반동계급이 아직도 복벽을 기도하고 있고, 사회주의사회에서 새로운 부르조아 분자는 산생될 수 있으며, 전체 사회주의단계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은 존재하고 있다.”
이 글에서 모택동이 토로하고 있는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자신이나 당 지도부들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에 대해서는 더욱 경험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11년, 마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에드가 스노와의 대담을 소개한 것이다. 스노에게 털어놓았던 솔직한 마오의 심경, "중국전설의 장기계획이 불투명하다, 정말 잘 모르겠다"
자본주의는 16세기로부터 36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왔건만, 사회주의는 이제 불과 11년을 경과했을 뿐이다. 그 짧은 세월, 마오에게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 특히 사회주의경제의 튼튼한 기초 구축이란 쉬운 일로 보이지 않았을 터, 그는 사회주의 경제선성에 100여 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장도를 가는 데 있어서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어떤 원칙과 태도로서 가야할 것인가. 마오는 그즈음 당의 상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어떤 새로운 정치국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오늘날 마오가 대중의 힘을 믿고 대중적 지지에 의해 관료사회와의 싸움을 벌였던 마오식 문화혁명의 양면성으로 평가해온 바이다.
이즈음에서 마오는 유방의 한나라 건국과정을 회고한다. 초패왕 항우와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고 천하제패의 고지에 이른 유방은 경포라는 장수의 끈질긴 추격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장안으로 개선하는 도중, 고향인 패에 들렀다. 오랜만의 금의환향이었다. 젊은 시절에 그는 이곳에서 건달 생활을 하여 많은 비난도 받았지만 이제 황제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고향의 옛 친구와 부호들을 모두 불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무르익고 술기운이 돌자 깊은 감회에 젖어 축(筑: 현악기의 일종)을 치며 '대풍가(大風歌)'를 지어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뿐 아니라 고향의 소년들 120명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합창하게 하였다.
큰 바람 불어닥쳐 구름은 흩날리고(大風起兮雲飛揚)
위엄이 해내에 떨쳐 고향에 돌아오다. (海威加內歸兮故鄕)
이제 어떻게 용맹한 병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거나. (安得猛士兮守四方)
여기서 큰 바람은 난세를 뜻하는 말이고, 구름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영웅 호걸들을 가리킨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영웅호걸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다투다가 이제 자신의 위엄을 천하에 떨치고 금의환향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다름 아닌 어떻게 천신만고 끝에 얻은 천하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단순한 방어의 의미가 아니라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천하질서를 이루어 천지가 자신에게 복속하여 명실공히 강고한 봉건제국을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유방은 우선 용맹한 사나이들을 얻어서 사방을 철통같이 지키게 해야겠다는 각오부터 다진다.
이 '대풍가'는 항우의 '해하가'와 자주 비교된다. 항우가 해하에서 한군에 포위되어 사면초가의 비운에 처했을 때 항우는 그 패배의 책임을 그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시운이 불리하여 하늘이 자신을 망치게 하려고 한다는 등의 말로 다른 곳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는 반면, 유방의 '대풍가'는 난세의 큰 바람이 불어닥치자 구름이 되어 하늘을 날고 다른 구름의 도움을 받아가며 천하를 평정하고 금의환향하였다고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날을 위해 용맹한 사나이들을 얻어 길이 천하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하를 거머쥔 중국지배자다운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 2004년 중국 CCTV에서 방영된 ‘한무대제’의 한 장면 |
하夏 왕조의 정치는 충후忠厚했으나, 충후함의 병폐가 백성들을 촌스럽고 무례하게 하였으므로, 은殷왕조는 그 대신에 공경함을 숭상하였다. 그러나 공경함의 병폐는 백성들로 하여금 귀신을 미신迷信하게 했기 때문에 주周왕조는 대신 예의를 숭상하였다. 그런데 예의의 병폐는 백성들을 가식적이고 무성의하게 만들었으므로, 이 가식적이고 무성의한 폐단을 바로잡는 것으로는 충후함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하, 은, 주 삼대의 치국원칙은 마치 반복하고 순환하는 듯이 끝났다가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었다. 주 왕조에서 진秦 왕조에 이르는 기간의 병폐는 지나치게 예의를 강구한 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진 왕조의 정치는 그 병폐를 고치지 않고 도리어 형법을 가혹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한 왕조가 흥기하여, 비록 전대의 폐정을 계승했으나, 그 폐단을 개혁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피곤하게 하지 않게 했으니, 이는 하늘의 계통天統을 얻은 것이었다. 조정은 매년 10월 제후들이 입경하여 황제를 조현하도록 하였다. 또 황제가 타는 어가는 노란 비단으로 지붕을 만들고 쇠꼬리로 만든 기를 왼쪽에 장식하게 하였다.
사마천은 한고조 본기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유방의 한나라가 전대에 비해 백성의 뜻을 얻고자 노력했으며, 내부질서를 공고히 하는 봉건체제의 기틀을 마련해갔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이 대풍가를 기백이 담겨 있다고 평가하며 자주 낭송하였다 한다. 사람들은 한 고조의 천하통일의 위업처럼 모택동 역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했기 때문에 이심전심 승리감과 자신감을 교감했기 때문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한 왕조가 흥기하여 전대의 폐정을 계승했으나, 그 폐단을 개혁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피곤하지 않게 했다는 사마천의 평가이다. 새로운 중국천하를 얻은 모택동, 그에게도 숱한 동지가 있었고, 백성이 있었다. 그는 특히 중국혁명의 농민혁명적 성격을 잊지 않았고, 농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국혁명의 완결이라고까지 보았다.
그러나 사실상 사회주의 중국에서 농민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 모택동과 중국 혁명의 주역들은 농촌소비에트라는 근거지운동을 통해 혁명의 거점을 마련하고 이후 사회주의 국가체제 정비의 기틀을 다져왔다. 그러나 정작 혁명 이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농업생산력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회생산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농업으로부터 여타 경제건설의 자금을 충당해내는 가운데 중국 농민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내내 지속적인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농촌에서의 인민공사와 도시 중심의 대약진운동의 실패, 대기근 속에서 농민과 농촌의 처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지만, 어떠한 단계적 해결도 보지 못한 채, 문화대혁명 당시 도시의 광풍과 달리 숨통이 틔어져 있었던 격절과 격리의 시공간으로 놓여있었던 현상 유지의 측면을 대비하여 인생지사 새옹지마를 노래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오늘의 중국에서 농촌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해체상태와 상대적 박탈감, 그리하여 대도시의 거리를 유랑민공으로 떠도는 육신들. 그들 농민들이 그 풍비박산이 난 일생에도 새날을 달구던 그 빛나던 노동과 혁명의 단꿈, 세끼 밥을 처음 먹어본 날들의 감격으로 당신을 초혼할 때, 마오주시(毛主席), 쏟아지는 빗속을 찢어진 도포를 입고 영원히 길을 찾아 떠나는 당신의 형상으로 오늘의 중국과 당신을 흠모하는 애절한 눈빛들이 홀연히 그 길을 따라 나설 수 있을까요?
▲ 베이징에 있는 모택동과 중국혁명역사자료 판매점 광경 |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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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담 님은 성공회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