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 내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9) 퀴앙 린(1955년 말레이시아 이포 출생)

퀴앙 린은 작지만 강하다. 남성 동지들은 그의 강인함과 육체적인 인내력에 경외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퀴앙 린’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퀴앙 린은 ‘날아다니는 화살과 적에게 쏟아지는 폭탄으로 가득찬 정글’이라는 의미이다. 퀴앙 린은 건강했던 젊은 날의 전부를 말레이시아와 태국의 정글에서 게릴라 전사로 살았다.

"군대는 사회의 총체입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지요. 실패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있어요. 강한 사람도 있고 착한 사람도 있고요. 함께 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많은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부딪혀야 한다는 걸 의미해요. 우린 우리의 차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삶을 위해서 합심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인내를 배웠어요. 깊은 동지애가 없었다면 그렇게 길게 견디지는 못했을 거예요. 군에서 식료품 나르는 일을 했을 때 매우 힘들긴 했지요.

그래도 나는 여성으로서 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나는 남성동지보다 결코 일을 적게 하지 않았어요. 저는 자존심을 얻었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왜냐하면 남성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나는 남성 동지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어요.“


내 고향은 말라야공산당(CPM)의 혁명 기지였어요. 제 어머니는 고위 당원의 제자였고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공산당과 함께 종종 자리를 같이 하곤 했어요. 전 막내딸이었어요. 부모님에게는 6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오빠 세 명에 언니가 두 명이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일본의 말라야 점령기간 동안 많이 고생하셨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나와 가장 친한 큰 오빠는 어린 나이에 지하조직원이 되어 혁명 투쟁에 가담했어요. 저도 인민에게 봉사한다는 오빠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오빠는 동지들을 집으로 데리고와 이웃에 공작을 할 수 있도록 했지요. 오빠의 동지들은 운동에서 동조자들을 모으로 당원들을 조직했어요. 저도 이렇게 해서 조직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어요. 당시 나는 아직 조직원이 아니었거든요. 나는 ‘대기 당원’이었어요. 당원으로서의 삶에 먼저 적응을 해야 했어요.

당은 저에게 점점 더 많은 과제를 주었어요. 나는 당원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밀사 일을 했어요. 그리고 결국 내가 사상적으로 확고하다는 것이 인정이 되어 당원으로 승인이 되었어요. 1972년경에 지하조직인 해방조직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1976년에 정글로 들어가 게릴라가 되었어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요.

난 겨우 초등학교 졸업이었고, 14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어요. 지하조직원으로서 내 일은 편지와 메시지를 당에 전달하는 것이었어요. 겉으로는 고무추출대 세우는 일을 했지요. 역시 동지였던 언니와 같이요. 전, 16살인가 17살인가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어요. 여전히 당을 위해서 종종 편지와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지요. 건설 현장일은 어려웠어요. 그 당시에 모든 일은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거든요. 기계가 거의 없었어요. 모래박스를 옮기고 시멘트를 만들기 위해서 통에다 그걸 부었어요. 이게 보통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어요. 시멘트가 준비되면 우리는 이걸 또 부어서 벽돌을 쌓는데 썼어요. 당시에는 하나의 네 명의 다른 여성 동지들과 함께 하나의 세포 그룹으로 살았어요. 우리는 함께 살면서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팀으로 일했으니까요. 동료들이 동지였어요.

세포 조직원으로서의 삶

우리는 각자 세 명 내지 네 명의 세포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이 세포단위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함께 살았어요. 선배 동지들은 우리 임무를 지도했어요. 우리는 큰 조직의 작은 일부 처럼 움직였어요. 설사 오빠와 제가 같은 조직에 속했다고 해도, 우리는 명령, 소통 라인이 달랐어요. 이런 라인들은 넘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수평적인 소통은 안된다는 거지요. 한 라인이 정부에 의해 파괴되거나 무너지게 되어도 다른 라인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오빠와 저는 거의 만나지 못했어요.

우린 서로 하는 일도 숨겼어요. 그래서 다섯 명 중 네 명이 같이 살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임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해야 할 일상적인 일들이 있었어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오의 붉은 책(the Little Red Book of Chairman Mao)을 암송했지요. 이건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도한다는 의미예요. 우리는 우리 모두의 단점을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오래된 습관과 사고를 버리고 모범적인 조직원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대중사업

대중들은 우리가 다르다고 느꼈어요. 낯설어 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대중들은 우리를 매우 사랑했어요, 우린 대중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지하조직원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대중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완전히 일체화되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서로서로가 가족들과 같았어요. 문제가 생기면 서로서로 도왔지요. 혁명운동의 일부로 우리는 좀 다르게 행동했죠. 우리는 거리의 평균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보였어요. 우리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쉬웠어요. 아마도 이 때문에 우리의 정체가 쉽게 폭로된 것 같아요. 대중들은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매우 친절했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열려있었지요. 할 수 있으면 우리의 모든 자원들을 공유했어요. 우리는 말과 행동 모두 진보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설사 우리가 성격이 나쁘거나 고집이 있다거나 등등 개인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죠.

가족을 떠나

우리 가족은 가난했어요. 큰오빠가 가족 전부를 부양했어요. 근데 일하다가 갑자기 죽었죠. 오빠는 정글에서 도시로 통나무를 운반하는 운전사였어요. 어려운 일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하다가 죽었어요. 오빠가 죽자 새언니가 가족을 먹여살려달라고 나를 붙잡았어요. 이게 나에게는 큰 고민이었어요. 전 가족에 대한 책임과 당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고민을 해야 했어요. 이때가 1974년이었어요.

결국 나는 새언니에게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나는 이미 당의 일부라고 말했어요. 나는 개인적인 이유로 투쟁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요. 내 가족은 심지어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안타깝게도 새언니도 4년 후에 죽었어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짐을 지는게 힘들었나봐요. 사인은 피부암이었는데 부자 사장을 위해서 고무 농장에서 일하다가 암을 얻었던 것 같아요. 살충제를 뿌리는 일을 했거든요. 전 사실 새언니가 언제 죽었는지도 몰라요. 그 때는 이미 게릴라 부대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21세에 게릴라에 가담하다

당시 당은 많은 새 당원을 조직했어요. 저는 당시 당이 마지막으로 조직했던 부대 소속으로 훈련을 받았어요. 그 때 백 명이상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훈련을 받았어요. 우리 교실만 50명에서 60명 정도였습니다. 1976년이었어요. 당은 무장 투쟁을 더 확장하기로 결정했어요. 우리는 정규 군대 훈련을 받고 정치이론도 학습했지요. 훈련하고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열대 우림에서 일도 해야 했어요.

정글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 느낌은 말로 할 수 없었어요. 가족들을 뒤에 남겨두고 어머니에게 인사조차 못했거든요. 엄마는 내가 싱가포르로 일하러 간줄 아셨어요. 엄마가 이 사실을 아시자 내 결정을 오빠가 조장했다고 화를 내셨대요. 엄마는 항상 혁명을 지지하셨지만, 자기 딸이 그렇게 된다는 건 힘든 일이었지요. 이런 나의 선택 때문에 엄마와 멀어졌어요. 그래서 전 엄마에게 많은 가책을 가지고 있지요. 당시 엄마에게 사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어요. 엄마는 우셨을꺼고, 난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테니까요.

군은 완전히 저에겐 다른 세계였어요. 나는 군인으로서 전투에서 싸워야 했거든요. 심지어 죽음도 내 마음을 가르지는 못했어요. 저는 제 자신을 혁명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타일이나 벽돌 하나로 생각했어요. 가족에 대한 사랑은 군에서 내 동지들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는 많이 달랐어요. 나는 동지들과 많이 가깝다고 느꼈어요. 오랜 동안 같이 살고 일했으니까요. 우리는 서로서로 매일매일 보고, 어려움도, 삶도 죽음도 함께 겪었지요.

군대 생활의 즐거움

우린 정글에서 살면서 많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전투가 거의 없었거든요. 우리는 매일매일 싸울 필요가 없었지요. 개별 임무와 역할을 하기만 하면 됐어요. 서로서로 군에서 느낀 연대와 우애는 말할 수 없이 깊었습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함께 했어요. 집단적인 삶이었지요. 정글에서 삶의 조건은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행복했어요.

정글생활 마지막 무렵에는 창군기념일인 2월 1일, 창당기념일인 4월 30일과 같은 기념일, 열사 기념일, 명절 등이 있으면 우리만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으니까요. 우리는 테이프에 우리 노래를 녹음해서 중국 후난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 보내기도 했어요. “혁명의 소리”라는 방송국이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정글 안에 우리만의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기도 했어요. 우리는 이런 방송을 너무너무 기다리곤 했어요.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흥을 돋웠어요. 매일 밤 중국에서 온 비디오테이프를 보기도 했어요. 이건 1980년대 이후부터 가능에 가능해 졌어요. 매일 아침 운동을 함께 하기도 하고, 평화로운 시간에는 야구와 탁구를 즐기기도 했어요.

즐겁지도 않았던 시간도 있지요. 예를 들어 비판시간에 일부는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비판하기도 했지요. 저는 허영심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저한테 더 잘 맞는 군복으로 사이즈를 바꿔달라고 했거든요. 장거리를 움직일 때 옷 사이즈가 크면 불편하거든요.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모양으로 머리카락 자르는 걸 더 좋아했는데, 이걸 두고 허영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군에 있는 모든 여성들은 1970년대 중국의 홍위병이 했던 단순한 머리스타일을 하도록 권장을 받았어요. 군내에서도 생활방식이나 세상을 보는 데 차이가 있었지요. 특히 도시에서 온 사람들과 시골에서 온 사람들 간에요.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결국 정글에서는 아무데도 도망갈 데가 없어, 붙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삶에서 작은 일에 너무 계산적이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지도자들과 당 간부 들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제 경험상 아예 비판하지 않는 것이 나았어요.

여성으로서의 자부심

여성으로서 우리는 남성과 똑같은 동기부여, 능력, 투쟁의 의지가 있었어요. 내가 몸집은 작아도 남성동지들만큼 바르게 뛸 수 있었지요. 사실 일부 남성동지들 보다 빨랐지요! 이렇게 말하긴 하지만 보통 남성들은 육체적으로 여성들보다 더 강하고 산을 더 잘 넘고 능선도 잘 타긴했어요. 빨리 걸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게릴라 군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능력도 있어야 해요.

민첩함과 유연함도 요구하지요. 느리거나 우둔해서는 안돼요. 특히 전선에서 전투를 하는 사람들은 강해야 하고 동시에 민첩해야 하지요. 빨리 달리고, 구르고 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건 열심히 노력한다면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지요. 저는 혁명 투쟁을 통해 이런 장점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요.

저는 제가 식료품뿐만 아니라 무거운 화물들을 옮기는 등 많은 일에서 남성 동지들과 똑 같이 일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더구나, 등에 군장을 지고 남성 동지들과 같은 속도로 달리기도 했지요. 여성으로서 우리는 동기부여와 능력, 투쟁의지를 남성들과 똑 같이 가졌어요. 이것이 바로 군에서 모든 육체적 요구들을 견디도록 해준 정신입니다.

공산주의를 믿다

그 때 젊고 순진하긴 했지만, 난 공산주의자들이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고 중국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전 말레이시아가 중국과 같이 되었으면 하고, 언젠가는 식민지배에서 해방되기를 바랬습니다. 저는 제가 인민에 봉사하고, 공산당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수 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랬어요. 저는 많은 진보적인 영화를 보고 진보적인 책을 읽었어요. 저는 훌륭하고 유용한사람이 되어 싶었어요. 그래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저에게는 말라야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어요.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예선의 일반적인 여성들처럼 살까 생각도 했지만 저는 제 삶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저의 생각과 이념은 군에서 시험대에 오르곤 했어요. 저의 생각과 이념은 그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졌어요.

사실 제가 지하조직원으로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사랑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때가 18살인가 19살인가 그랬는데, 옆집 아들에게 끌렸어요. 그는 제가 뭘하는지 몰랐어요. 우리는 서로 너무나 사랑했지요. 전 그와 당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어요. 당에도 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동안은 비밀스럽게 만나기도 했고요. 저랑 함께 살고 있던 여성동지가 결혼을 하고 운동을 떠나는 일이 있었어요. 그 동지와 같은 길을 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이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당이 저에게 정글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했을 때 저는 그에게 메시지를 남기지도 않고 그를 떠났어요.

군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한 번도 산을 오르거나 강을 건너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반에는 가시덤불에 빠지기도 했어요. 저 같은 도시 사람들에게는 힘들었지요. 우리는 큰 덤불을 넘어 나무뿌리와 하천을 뛰어넘으면서 장거리를 걸어야 했어요. 다르게 걷는 법도 배웠어요. 다리를 올리면서 걷는 거요. 사실 몸집이 작은게 항상 열대 정글에서 약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연성이 핵심이지요. 등나무가 앞에 있으면 걸으면서 몸을 숙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짐들이 등나무에 걸리게 되거든요. 등나무는 모든 곳에 낮게 걸려 있어서 매우 민첩하고 빨리 움직여서 언제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무 둥치에 걸려 매달려 있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산에서 정찰일을 해야했고, 멧돼지 같은 동물을 남성들과 똑같이 사냥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동물 덫을 놓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했어요. 저도 멧돼지, 새, 원숭이 같은 걸 잡은 적이 있어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물들에 의지해야 했어요. 우리는 모든 동물을 먹었어요. 코끼리, 큰 뱀, 거북이 다요. 우리는 산에서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어요.

저는 힘들게 훈련을 받았어요. 혁명투쟁은 저를 시험대에 올려놓았고, 좋은 동지가 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인민에 봉사한다”는 생각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빈말일 뿐이지요.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정있게 구는 것은 인민에 봉사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저는 이런 정신을 우리가 산을 떠난 후에도 계속 일하면서 유지를 하고 있어요. 저는 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돕고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혁명투쟁은 저를 변화시켰고, 교육 시켰습니다.

전투병

저도 대열을 이끌기도 했어요. 대열 선두에서 먼저 뛰어나가 적이 있는지를 보는 거지요. 적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제일 먼저 싸워야 하는 사람으로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어요, 전 최전선에서 전투하는 군인으로서 카빈 미사일 발사기를 들고 다니기도 했어요. 5, 6킬로그램 정도 무게였지요. 저의 대원 한 사람은 그 카빈총으로 비행기를 떨어뜨리기도 했어요. 우리는 비행기 앞에서 한 지점을 겨냥해 총을 쐈어요. 바로 우리가 쏜 총에 맞을 수 있게 하려고요. 비행기는 폭발했지요. 비행기는 우리 총알보다 빨라서 우리는 바로 앞에서 총을 쏴야만 했어요. 그러면 적은 융단폭격으로 복수를 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항상 대중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어요. 대중은 우리에게 정보를 주고 음식과 장비를 주면서 지지해 주었습니다.

젊은 남자와 결혼하다

군에서 사랑에 빠지는 건 쉬웠어요. 남자와 여자들이 가까이 지냈으니까요. 저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싶었어요. 그런 사람과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30세가 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예요. 저의 남편은 당시 10대였어요. 열네 살이나 어렸죠. 남편은 태국에서 태어났고, 중국계입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 3년간을 같이 동거했고 현재는 두 딸이 있어요. 우리가 신랑과 신부가 된 건 놀라운 일이지요. 우리는 일을 함께 하고 장정을 함께 하면서 가까워졌어요. 우리는 같이 노래도 불렀어요. 전 남편을 위해 노래집을 하나 쓰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는 그림 도구들을 저에게 선물했어요. 제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나이차이로 인해 우리 관계는 누이와 동생의 관계 같았지요. 많은 동지들이 처음에 우리 결혼을 반대했지만, 우리는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썼고 승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식은 매우 단순했어요. 우리는 사탕 두 묶음을 사서 선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담배도 사서 담배를 피는 남성 동지들에게 2개비씩 주기도 했고요. 당은 우리에게 차(茶)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당은 우리를 위해서 달걀도 사서 각각 동지들이 달걀 두 알씩을 받았습니다. 결혼식에서 우리는 결혼을 선언하고 신랑이 우리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투쟁에서 함께 했는지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우리는 조그만 오두막으로 보내졌고, 이 오두막은 혼자인 남성 여성동지들을 위한 것이었어요. 커플들을 위한 오두막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머무르기 위해 순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가 산을 떠나 얄라 시티에 정착한 이후부터 저의 남편과저는 떨어져 살았습니다. 남편은 마을에서 집을 돌보고, 작은 땅덩이에서 일을 해요. 고무나무를 길러요. 그리고 저는 두 딸과 함께 도시로 나왔어요. 학교에 보내려고요. 그래서 우리는 10년간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그가 마을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게 안쓰럽기도 해요. 그 사람을 위해서 밥을 해 주는 사람도 없어요. 내 일과 아이들로 인해 요즘에는 마을을 돌아가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공휴일이나 명절 같은 때에 집에 가려고 하고 있어요.

미래를 향한 희망

저의 희망은 두 딸을 잘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세끼 식사를 할 수 있고 지붕이 있는 집이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우리는 딸들을 교육시킬 만큼의 수입을 고무 추출을 통해 얻고 있습니다. 지금은 돈도 모으고 있고요. 저는 딸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우리 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혁명당이 더 이상 존재하지는 않지만 딸들이 언젠가는 유용한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로서 저는 그들의 정신적 지주일 뿐입니다. 저는 딸들의 학교 공부를 도울 만큼 충분히 교육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가 집을 떠난 지 20년 입니다. 그 때 이후로 말레이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989년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저는 처음으로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다행이 저는 저의 집주소를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편지를 받자마자 저를 보러 오셨어요. 그 때가 1990년이었습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본 것이었지요. 20년 만에요.

우리는 좋았던 옛날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손주들을 키우며 보냈다고 이야기 했어요. 저의 큰 오빠와 새언니가 죽고 다른 언니와 새언니들은 감옥에 갔으니까요. 정말로 어머니는 우리 때문에 너무 힘들게 사셨어요. 어머니를 돕지 않았고,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가 겪었던 어려움들을 듣는 것뿐이었어요. 그리고 1996년 84세로 세상을 떠나셨죠.

<번역-변정필 기자>
덧붙이는 말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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