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 강우근의 들꽃이야기

꿈을 빼앗기지 않는 봄맞이

[강우근의 들꽃이야기](74) 봄맞이

이번 겨울은 더 메마르고 춥게 느껴진다. 봄은 어디만큼 와 있나. 봄맞이가 자란 만큼 와 있으려나. 겨울 나는 봄맞이를 보려고 아파트 샛길 옆 해마다 봄맞이가 무리지어 자라던 곳을 에돌아가는데, 이미 거기는 콘크리트로 깔끔하게 새 단장이 되어서 시멘트 먼지만 폴폴 날리고 있다. 시멘트 먼지를 풀썩풀썩 일으키며 학원 버스가 지나간다. 옆 동네 학원가로 대형버스 여러 대가 학생들을 실어 나른다. 지난봄, 지어지고 나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이곳 아파트 가격마저 마구 요동쳐댔다. 덤덤하던 변두리 사람들 속을 들쑤셔 놓은 그 몹쓸 바람은 가슴에 꼭 저런 시멘트 먼지 같은 걸 남겨놓고 지나갔다.


이 겨울이 더 푸석거리고 으슬으슬 춥게 느껴지는 게 그 때문일까. 콘크리트로 발라진 새 길과 용산에서 벌어진 참사가 겹친다. 자본이 그려 보이는 꿈은 남의 삶을 부수고 그 꿈을 빼앗는 것이다. 그렇게 빼앗은 꿈조차도 허망하게 날아가 버린다. 그 꿈은 악몽으로 바뀌고 만다. 개발 바람은 모두를 공범자로 만들고 침묵하게 한다. 그런 침묵은 용산에서 벌어진 참사와 무관하지 않다. 봄맞이가 사라진 길에서 시멘트 먼지를 마시며 부끄러웠다.

봄맞이는 봄에 싹터 자라기도 하지만 여름, 가을에 싹이 터 해를 넘겨 자라는 두해살이풀이기도 하다. 봄맞이는 품이 크지 않다. 그래도 작은 품안에 작은 거미와 더 작은 노린재가 함께 겨울을 난다. 햇살이 따스한 날에는 거미나 노린재가 꼼실꼼실 기어 나오다 사람 기척에 놀라 허겁지겁 다시 품속에 숨어든다. 바람을 피해 땅바닥에 납작 붙어 겨울을 나는 봄맞이는 아이 얼굴만큼 예쁘다. 겨울바람에 발그레해진 아이 볼처럼 봄맞이도 겨울바람을 맞고 발그레해졌다. 겨울 들녘에 핀 꽃 같다.

봄맞이는 냉이나 별꽃처럼 이른 봄에 꽃이 피지 않는다. 꽃마리나 광대나물, 제비꽃보다도 늦게 꽃이 핀다. 그런데도 봄맞이를 보면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 오래 전 봄맞이꽃을 처음 봤을 때 인상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예쁜 제비꽃은 너무 익숙해져 있고, 광대나물은 닮은 꽃이 많아서인지 첫인상이 남아 있지 않다.

꽃마리는 봄이 깊어 가면 온 땅을 덮으며 무성해지고 만다. 봄맞이는 단순한 모양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우산을 펼친 듯한 모습을 한 번 보면 오히려 단순해서 잊히지 않는다. 봄맞이는 봄이 다 끝날 때까지 봄의 첫 느낌을 잘 간직한다. 봄맞이는 줄기잎이 없고 뿌리에서 돌려난 잎만 있다. 잎 사이로 뿌리에서 꽃줄기가 몇 가닥 자라 오르고 꽃줄기 끝에 우산살처럼 또 몇 자락 꽃자루가 갈라져 나와 꽃이 핀다. 꽃이 피어도 모습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꽃잎이 떨어지고 나서 다섯 가닥으로 갈라진 꽃받침이 더 커지는데 둥그런 열매가 맺히고 떨어져도 꽃받침을 마치 꽃인 양 계속 달고 있다.

아이들이랑 봄맞이 잎을 뜯어 배지를 만들었다. 봄맞이 잎사귀를 붙여 만든 배지를 단 아이들 얼굴은 벌써 봄을 맞이한 듯 했다. 배지 만드는 데 한두 잎이면 되지만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한 웅큼씩 뜯어 왔다. 그래도 괜찮다. 그런 정도 자극은 잡초들이 살아가는 데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일 테니까.

콘크리트 덮인 아파트 샛길에는 틈이 생기고 먼지가 쌓일 테고 다시 잡초가 자라날 것이다. 그런 곳이 잡초가 살아가는 곳이 아닌가. 개발로 무너진 삶의 폐허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자본에 맞서는 연대와 투쟁을 부르고 있다. 먼저 간 이들 소리가 들린다.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