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가치형성

[연속기고](8) 겨울 대중강좌 - 맑스로 보는 경제, 맑스로 읽는 경제학 2강

우리가 첫 번째 강의에서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시장경제라는 개념과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 즉 경제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고, 그것을 기초로 시장경제론이 갖는 여러 가지 인식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았습니다. 오늘 강의는 “노동과 가치형성”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여러가지 개념들을 여러분께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노동에 대해서 입니다.

1. 노동이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시장경제론에서 시장의 합리적 경제 주체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로빈슨 크루소는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데요, 시장경제론에서는 이런 로빈슨 크루소를 인간의 보편적인 유형으로 보고 있어요. 즉 태초부터 인간은 이러했다는 것인데요, 그와 반대로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태초부터 노동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출현이 어떠했는지는 여기에서 얘기할 문제도 아니고, 해답을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지구상에 인간이 처음 출현했다면 그것은 바로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었을까요?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생존하기 어려웠겠죠. 우리가 인간의 본성을 얘기할 때는 로빈슨 크루소 같은 형이상학적 인간보다는 노동하는 인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노동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개인으로서 인간을 볼 때 노동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수단입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노동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두 번째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노동은 가장 기본적인 생산요소입니다. 어떤 사회도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경제학에서 생산의 문제를 다룰 때 Q=f(K, L)라는 생산함수를 사용합니다. 이 식은 자본(K)와 노동(L)을 투입하면 Q라는 산출물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주류경제학적 관념에서도 노동은 생산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도 토지, 자본 그리고 노동이라는 생산의 3요소를 배우지 않았나요? 이 세 가지 중 토지의 경우에는 부존량이 일정하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적으로 보아 임의로 양을 줄이거나 늘리거나 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제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산함수 식에서 본 것처럼 주로 자본, 노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튼 노동은 자본만큼 중요한 생산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일 텐데, 바로 노동은 인간에게 자아실현의 수단이 됩니다.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 좀 이해가 쉽지는 않죠. 그러면 먼저 자아실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는 보통 어떤 상태를 자아가 실현되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변증법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헤겔의 용법을 빌려서 얘기하자면, 인간의 자아실현이란, 인간 내면의 세계를 외화시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여러분 내면의 의식이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서 어떤 왜곡도 없이 외화된다면, 즉 밖으로 드러난다면 그러한 상태를 자아가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연애를 할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잖아요. 즉 여러분들의 마음(의식) 속의 사랑을 드러내고 싶잖아요. 그래서 나무토막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각인형을 깎아주고 싶다고 해보죠. 만약 여러분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이 나무토막을 바라보면 그냥 아무 쓸모 없는 나무토막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무토막을 바라보면, 그 사람을 위해서 쓰여야 하는 대상이 되겠죠. 그래서 여러분이 나무토막을 주워서 여러분의 자의식 즉 사랑을 담아서 목각인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만들어 놓고 보니까 너무나도 흡족해요. 그러면 바로 자아가 실현된 겁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이라는 내면 의식이 일정한 물적 대상을 통해서 즉 목각인형을 통해서 외화가 됩니다. 즉 인간이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의식이 외화되는 과정인 겁니다. 그런데 이 내면 속의 의식이 외화되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전하기 위해 목각인형을 조각하듯이, 의식의 외화 과정은 고민하고 땀흘리는 노동시간이 필요한 것이죠.

이런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른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도 있어요. 동물에게는 자아실현과정이 없다고 할 수 있죠. 가령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마지막에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는 장면이 있잖아요. 동물들은 그 석양을 보면, 그냥 해가 져서 밤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인간은 석양을 보면서 어떤 감흥을 느끼고 자의식이 발동을 해서 언어와 문자라는 물적수단을 이용해서 시를 지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 시를 보고 스스로 흡족해 합니다. 이 순간 자신의 내면의 자의식이 성공적으로 외화(실현)됩니다. 즉 다시금 강조하지만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누구나 정신적 노동이든 육체적 노동이든 노동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해요. “노동하지 않고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지 않나요? 돈만 있다면 갖고 싶은 집을 사고 여행도 다니고 어떤 재화든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생각은 우리가 늘 쉽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저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앞에서 얘기한 자아실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몇 십억의 로또에 당첨되어서 여러분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해도 무엇 때문에 그런 생활이 가능해진 거죠?

결국은 돈의 힘 또는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거죠. 그것은 자아실현의 과정이 아니에요. 그 풍요로움은 여러분의 내면 의식, 잠재력으로부터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돈의 힘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상태가 되면 인간이 비참해 질 수 있습니다. 돈의 힘에 자아가 포섭됨으로써 오히려 자아를 상실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요. 실제로 로또 당첨자들 중 99%의 사람들은 당첨 이후에 오히려 불행해졌다고 합니다. 물질적 힘에 의존해서 삶을 영위한다고 하는 것은 자아실현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억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죠.

이와 같이 노동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서 노동자가 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서 공장 노동자가 되겠다는 사람 있어요? 노동이라는 개념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데 왜 사람은 노동하기를 싫어할까요? 오히려 노동을 혐오하고 가급적이면 노동을 안 하려고 해요. 왜 그런 것인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해요.

우선 노동이 힘들고 고된 것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도 대접을 못 받아요. 이것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죠. 노예제 사회에서도 노동을 했던 주체들은 노예인데, 지배계급은 노동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면서 노동하는 사람을 천대해요. 오늘 날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 자체가 천대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노동은 자아실현수단으로서 자발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노동하기 싫어하고, 노동자는 천대받고 무시를 받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이 억압받는 노동, 강제된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노동은 자아실현과정인데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서 노동은 더 이상 자아실현수단이 아니라 자아를 억압하는 과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어떤 특정한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쉽게 생각해보면, 그 조건은 여러분들이 노동의 주체로서 서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가 노동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 속에서 가능해지는 걸까요? 바로 계급사회에서 그렇게 됩니다. 이 계급사회에서 행해지는 노동은 강제된 노동이며 자아실현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노동을 하면 할수록 자아를 억압하게 되고 자신이 피지배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동은 기피대상이 되어버리죠.

그렇다면 계급사회가 없어지면 노동이 인간의 자아실현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러한 계급사회는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요? 이제부터 계급(사회)이 성립할 수 있게 되는 특정한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죠.

2. 사회의 기본구조

우리가 계급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몇 가지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생산양식, 생산력, 생산관계라는 개념들입니다. 맑스가 사회를 분석할 때 기본적인 인식틀로서 제시하는 개념이 생산양식입니다. 이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파악하려면 우선 생산력이라는 개념을 살펴봐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생산력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결합된 개념입니다. 어떤 사회이든지 일정한 생산력을 갖고 있으며 사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이 생산력의 차이는 사회가 보유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규모와 질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생산력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 관계가 바로 생산관계라는 개념이죠.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포괄하는 통일적인 개념이 바로 생산양식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회이든 일정한 생산력을 가지고 있고, 생산력을 매개로 생산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서로 조응하기도 하지만, 서로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생산력은 끊임없이 발전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발전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이 과정은 인간과 물질세계 사이에 나타나는 끊임없는 대립과 모순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라는 주체와 그를 둘러싼 물질이라는 객체의 대립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류사는 인간이 물질세계를 차츰차츰 지배해온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인간이 물질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시시대에는 하늘에서 번개와 천둥이 내리치는 것을 원시인들은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들은 천둥, 번개가 친다고 해서 하늘이 노했다고 하거나 자연을 무서워하지는 않겠죠. 바로 여러분들이 천둥과 번개가 왜 치는 것인지 이해하기 때문에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과정은 여러분들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를 의식 안에 포섭해 들어오는 과정, 즉 주체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세계를 주체화함으로써 물질세계를 이해하고 활용하게 되는 것이 인류의 발전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생산력의 발전과정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산력 발전과정이라는 개념은 협소하게 기계적인 개념으로 볼 수 없습니다. 생산력이 발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넓어진다는 것이고 주체화시킬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되어간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생산력은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서로 조응하기도 하지만 모순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생산관계가 발전하는 생산력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가 등장하던 시기인 봉건사회 말기를 생각해 보세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기계를 도입하여 공장제가 출현하는 등 생산력은 이미 자본주의 단계에 와 있었지만 생산관계는 여전히 봉건제적 생산관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즉 그 사회의 생산력은 새로운 생산양식을 요구하는 발전된 수준에 와 있는데, 생산관계는 그렇지 못해서 봉건영주나 귀족들이 이 생산력의 발전을 억압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발전된 생산력을 수용하면 자신의 계급적 토대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로운 생산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는 사회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일정기간 조응하기도 하지만 대립되고 모순되기도 합니다.

인류역사에서 인류가 경험한 생산양식에는 원시공산사회,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현재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생산양식의 이런 변화는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 사이의 대립과 모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도 또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행해갈 가능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어떻게 예측해 볼 수 있을까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은 엄청나게 발전되어 있어요. 단적인 예로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거의 200억의 인구를 먹일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즉 현재 65억의 전 세계 인구의 3배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는 기아나 기근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아나 기근의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것처럼 보다 나은 기술이 개발되면 이와 같은 기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기아라는 정치적 문제가 파생된 영역은 바로 생산관계의 영역입니다. 이 생산관계 자체가 지양되지 않으면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인류는 궁극적으로 기아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미래학자로서 제레미 리프킨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면 리프킨은 지금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해 있다고 봅니다. 즉 엄청난 규모의 생산력을 가지고 있어서 미국 국민들이 다 소비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상품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의 이윤 추구 행위는 경쟁적으로 생산과정에 기계를 도입하게 되고, 따라서 자동차 공장처럼 기계가 생산을 전담하게 되면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쫓겨난 노동자들이 어디로 갈까요? 결국은 햄버거 가게 같은 곳으로 갑니다. 어제만 해도 자동차 공장에서 자동차 만들던 노동자들이 햄버거나 굽고 부자들의 돈 몇 푼 받아서 사는 비참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죠.

리프킨에 따르면 미국에서 서비스업의 비중이 커지는 이유는 생산력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노동력이 점차 쓸모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리프킨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유지되는 한, 생산과정에서 쓸모없어진 인간들은 생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관계의 변화가 없는, 즉 자본가와 노동자가 있고, 자본가가 대부분의 부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희망이 없다고 해요. 아무튼 리프킨은 맑스주의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의 문제점들을 맑스주의적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한 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파괴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황입니다. 미국의 빅 3 자동차 회사가 파산지경에 이르렀잖아요. 기업이 파산되면 생산설비가 고철덩어리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억압하고 파괴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결국에 가서는 발전하는 생산력을 사회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일정 정도 발달된 생산력을 수용하게끔 했던 진보적 의미가 있었지만, 결국 인류사회에서 발전하는 생산력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단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응과 모순관계에 의해서 생산양식이라고 하는 것을 정의할 수 있어요. 이 생산양식 위에는 이 생산양식을 반영하는 하나의 정치적,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구조가 형성이 되는데 이것을 맑스는 상부구조라고 불렀습니다. 예컨대 봉건적인 사회 하에서는 봉건적인 정치, 법률, 이데올로기가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는 자본주의적 정치, 법률, 이데올로기 등이 있는 겁니다. 생산양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물질적 토대(base)를 구성하고 그 토대에 기초해서 여러 정치적,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토대와 상부구조를 모두 포괄해서 맑스는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상부구조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반영하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적 국가에서는 의회제도가 있죠. 반면에 봉건제 사회에서는 절대왕정이 있어요. 봉건제적 왕정에서 대의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질서로 변화된 것은 결국 의회제도가 새로운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정치질서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기계적인 관점이고 생산력주의이며 생산력 환원론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 정치 문제들을 토대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문제로 환원한다고 비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회를 파악하는 게 정말 쓸모 없는 걸까요? 어떤 이론체계가 불완전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아예 쓸모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죠.

사실 비판자들의 비판은 과학적 비판이라기보다 의도된 비판들이 많아요. 이데올로기적 누명을 씌우는 거죠. 시장경제론에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사회를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의 인식 틀에 비해서 맑스의 인식 틀이 열등하고 불필요한 건가요? 제 생각에는 이런 인식틀을 통해서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기계론적 환원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요약하자면 맑스주의에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중요한 개념은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입니다. 생산양식 개념, 특히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조응/모순이라는 명제를 통해서 계급이 어떤 조건 속에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한번 앞에서 말한 역사 발전의 다섯 가지 단계를 살펴보도록 하죠. 출발점인 원시 공산제사회는 오직 노동력만 있고 생산력의 발전수준이 미약했습니다.

즉 원시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외한 변변한 생산도구나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했겠죠. 어떤 원시 부락에 10명의 구성원이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이 10명의 구성원이 1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얻은 생산물을 구성원들끼리 서로 나눕니다. 어떻게 나누었을까요? 아마 똑같이 나누었을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일 10명 가운데 힘센 한 놈이 2사람 몫을 먹어야겠다고 하면서 한 명을 굶겨 죽였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이 원시 사회에서 한 명이 죽는다는 의미는 유일한 생산력인 노동력이 상실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 사회의 부락 내에서 생산물은 동등하게 분배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유일한 사회적 생산력인 노동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부락을 재생산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이 사회를 원시 공산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인간이 생산수단을 갖기 시작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여러 농기구와 함께 소를 길들여 쓰기도 하여, 결국 생산물이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잉여생산물이 나타나기 시작하죠. 과거에는 10명이 노동을 해서 10명이 먹을 만큼의 식량을 생산했었는데, 이제 15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을 합니다. 즉 잉여생산물로 5명분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 이것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이냐 하는 골치 아픈 문제가 제기됩니다. 처음에는 힘센 놈이 가져갔어요. 힘센 놈이 5명분을 다 가져가도 10명이 먹을 식량은 있으니까 힘센 놈은 이제 더 이상 노동을 안 하려고 하겠죠. 이제 그가 부락민을 지배하면서 잉여생산물을 착취하기 시작해요. 그 지배라는 것은 물리적, 정치적, 종교적 지도일수가 있는데, 이런 방식을 통해서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잉여생산물을 취득하게 되는 지배계급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제가 이 계급사회의 발생을 단순하게 설명을 했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계급의 발생은 결국 일정한 생산력의 발전과 잉여생산물의 생산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생산력 발전은 인류가 원시적 상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생산수단을 갖게 되는 것을 반영합니다. 이때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되고, 부락의 구성원들은 이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서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즉 원시공산제 사회가 노예제 사회로 가는 겁니다. 어쨌든 계급의 출현과 더불어서 인간의 노동은 피지배계급이 수행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됩니다.

3. 상품과 화폐

1) 상품의 역사성과 사회성

이제 자본주의 사회를 보기로 합시다. 노예제 사회에서 사회적 부를 대변하는 것은 노예였습니다. 누가 노예를 많이 소유하느냐가 부의 척도였어요. 노예제 다음의 봉건제 사회에서는 토지가 부의 척도였습니다. 그러나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측정하는 척도는 상품이라고 합니다. 맑스는 자본론 1권 1장의 첫 구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라고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부는 결국 상품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상품은 무엇이기에 부의 척도가 될까요? 따라서 이제 상품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맑스가 상품을 주목하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노동이 사회적 노동(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으로 되려면 상품판매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의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낸 생산물을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개인의 노동은 사회적 노동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은 부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노동이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봉건제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의 주인이나 지주의 명령이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을 조직합니다. 그래서 이를 보통 인격적 지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적 노동은 인격적 지배 혹은 경제외적 강제가 아니라 상품의 판매라고 하는 경제적 관계를 통해서 조직이 됩니다.

그 다음에 상품사회의 특징 한 가지를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옷 한 벌과 빵 다섯 개가 교환이 된다면 이것이 상품의 판매과정인데, 이 교환관계는 사회적 노동의 조직방식이 반영된 겁니다. 옷 1벌 만들기 위한 노동과 빵 5 개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이 일치하기 때문에, 상품교환이 나타나는 거죠. 그런데 보통 상품을 소비할 때 여러분들은 오직 상품과 상품사이의 교환과정만을 봅니다. 이 상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어떻게 노동이 조직되어 있는가를 보지는 않죠. 여러분들이 백화점에서 옷을 사는 경우 이것이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즉 상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일정량의 노동을 구매한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사람들은 상품을 산다고 생각하지 일정량의 사회적 노동을 구매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관계(교환관계), 오직 이 관계만이 사람들에게 인식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상품교환의 영역을 맑스는 자본주의의 표층세계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상품교환을 가능케 하는 그 이면의 세계, 즉 노동이 이루어지고 조직되는 세계들을 일반적으로 심층적 세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표층의 세계와 심층의 세계로 분리가 되는 것이죠.



맑스는 상품의 분석을 통해서 상품의 본질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다시 말해 표층을 걷어냄으로써 심층의 세계로 인식의 수준을 확장할 때에만 자본주의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의 표층세계, 상품으로 구성되는 세계를 이해할 때에만,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 노동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상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지요.

2) 상품의 사용가치와 가치

맑스는 상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라는 측면입니다.

상품의 사용가치(use value)라는 것은 상품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 유용성입니다.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말이 중요한데요. 주류 경제학에서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얻는 주관적인 만족감으로 정의하는 효용(utility)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책상을 예로 들면, 책상은 사용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상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주관적인 만족감과는 별개로 책상은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작업을 할 때 도움이 된다고 하는 객관적인 속성으로서의 유용성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책상이 뭔가 객관적 유용성이 있으니까 팔려서 책상으로 쓰이고 있겠죠. 즉 사용가치는 어떤 재화가 상품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어떤 재화가 사용가치가 없다면 시장에서 팔리거나 거래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교환가치(exchange value)라는 개념은 어떤 상품과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입니다. 예를 들어 옷 한 벌이 빵 다섯 개와 교환된다고 하면, 옷과 빵 사이에 1: 5라는 교환비율이 옷이 갖는 교환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장에서 옷 한 벌이 하필 빵 5개와 교환되는 것일까요? 가장 단순한 설명은 옷 한 벌이 빵 하나 보다 다섯 배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1:5로 교환된다는 것입니다. 즉 옷과 빵이 일정한 크기의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1:5라는 특정한 교환비율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가치(value)란 하나의 상품이 다른 상품을 구매하거나 획득하도록 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제 옷이 빵 5개와 교환되는 이유가 옷이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 마지막으로 가치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를 살펴봐야 하겠지요.

먼저 옷과 빵이 교환될 때 어떻게 일정한 교환비율 하에서 두 상품의 교환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우선 사용가치가 두 상품의 교환비율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사용가치는 옷이 갖는 객관적인 유용성이고 또 빵이 갖는 유용성이므로 만일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를 결정한다면 옷의 따뜻함이 빵의 배부름보다 5배 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비교는 불가능하죠. 이렇게 사용가치가 상품의 가치와 교환가치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상품의 교환과정에서 사용가치의 측면을 사상시키고, 즉 제외시키고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품의 사용가치(물적 속성)를 사상해버리면 두 상품에 공통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인간노동의 산물이라는 속성입니다. 옷도 빵도 모두 인간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두 상품이 교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옷을 만드는데 5 시간의 노동이 들어가고 빵을 만드는데 1시간의 노동이 들어갔다면 옷에는 빵보다 5배의 사회적 수고가 더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옷을 만드는 사람은 빵 장사에게 옷과 빵을 1대 5의 비율로 바꾸자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환비율을 결정하는 것은 그 상품의 가치인데, 그 상품의 가치는 상품생산에 투하된 노동이 결정합니다.

이것을 노동가치론이라고 하는데 사실 노동가치론은 맑스의 독창적인 이론은 아닙니다. 맑스 이전에 대표적으로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도 노동가치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스미스와 리카도를 열심히 연구해서 이들을 넘어선 자신의 독창적인 노동가치론을 전개합니다. 이런 점에서 추상노동 개념은 맑스의 독창적인 개념으로서 중요한 것이지만 다음 강의 때 본격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3) 상품과 화폐

이제까지 도대체 상품이 뭐고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것을 설명했는데 앞으로는 화폐의 문제를, 즉 상품으로부터 화폐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가치형태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가치형태는 단순한 가치형태,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가치형태가 있습니다.



단순한 가치형태는 옷 한 벌이 사과 5개와 교환되는 형태인데 이것을 왜 가치형태라고 부를까요? 옷 한 벌의 가치는 자신을 통해서는 표현되지 않습니다. 내가 만든 한 벌의 옷이 내가 만든 또 다른 옷 한 벌과 교환된다고 하면 여기서 가치가 표현될 수는 없죠. 그런데 옷이 사과 5개와 교환됨으로써 내가 만든 옷 한 벌의 가치가 사과 5개를 통해서 표현이 되는 겁니다. 결국 옷과 교환되는 사과 5개가 옷의 가치를 표현하는 가치형태가 됩니다. 그리고 이 교환비율은 앞에서 말했듯이 각 상품의 생산에 걸린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이러한 교환형태를 우리는 옷이 갖고 있는 단순한 가치형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옷을 가지고서 사과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들과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전개된 가치형태라고 합니다. 그러면 서로 모습은 다르지만 위의 그림에서 우변의 많은 상품들은 모두 옷의 가치를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즉 옷 1벌은 우변에 나와 있는 사과 5개를 통해서 표현될 수도 있고 차 10그램, 빵 3개, 금 2그램으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변에 나와 있는 상품들은 모두 옷의 가치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교환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옷과 우변의 상품들이 인간노동의 산물이라는 공통된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옷을 가지고서 시장에 간다고 해서 이 교환들이 성립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과장수, 차장수, 제빵업자, 금 생산업자가 내 옷을 사줄 때에만 이런 교환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머릿속에서 이런 교환의 계열들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실제로 교환이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즉 전개된 가치형태 하에서는 위의 교환과정이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옷 장수가 원하는 모든 상품을 구매할 수 있으려면, 전개된 가치형태의 좌변과 우변이 바뀌면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 가치형태입니다. 이제 시장에 나와 있는 모든 상품들이 옷 1벌과만 교환이 됩니다. 여기서 일반적 가치형태는 전개된 가치형태과 달리 좌변과 우변이 바뀌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개된 가치형태에서는 상품의 교환이 오직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했지만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다른 상품들과 옷이 교환되는 것이 이제는 필연성으로 나타납니다. 우변에는 옷만 있고 좌변에 모든 상품들이 위치합니다.

즉 모든 생산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들의 가치를 옷을 통해서만 표현하고 싶어 하고, 따라서 모든 생산자들은 옷과의 교환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 옷을 일반적 등가물이라고 부릅니다. 옷은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표현해주는 공통적인 가치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과 과수원 주인이 빵을 사려면 옷만 얻으면 빵을 살 수 있습니다. 사과 장수가 빵을 사기 위해서 사과 얼마가 빵과 교환될 수 있을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옷과의 교환에만 성공하면 옷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빵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관건은 사과와 옷을 교환하는 것인데 여기서 어떤 전도된 혹은 왜곡된 인식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상품 가령 사과 5개와 빵 3개가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사과생산에 노동시간을 5시간 투하하고 빵 생산에 3시간을 투하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옷이 일반적 등가물로서 교환을 매개하기 시작하면, 사과 생산자가 빵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노동 때문이 아니라 일반적 등가물인 옷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즉 빵을 구입하게 하는 힘이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옷의 힘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옷만 있으면 빵을 구입할 수 있게 되거든요. 그러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에 들어간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일반적 등가물인 옷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전개된 가치형태는 단순한 가치형태를 말 그대로 전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직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데 반해,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옷이 모든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기 때문에 옷만 있으면 모든 상품의 구매가 가능하게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따라서 가치의 원천이 노동이 아니라 옷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 등가물인 옷은 때가 타고 너덜너덜해지고 보관이 용이하지도 않으며 부피가 크며, 쪼개거나 나누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즉 내구성, 보관성, 분리가능성에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어떤 상품으로 찾아낸 것이 최종적으로 금입니다. 결국 일반적 등가물은 옷이 아니라 금 2g이 되면서 일반적 등가형태는 화폐형태로 바뀝니다. 이제 금 2g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상품을 구입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 금에 예컨대 파운드, 원, 달러 등의 도량표준을 매기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금이 화폐가 됩니다.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는 것은 화폐이고 모든 상품은 자신의 가치를 화폐를 통해서만 표현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도된 인식이 형성됩니다. 모든 상품생산자가 화폐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상품의 가치 원천이 노동이 아니라 화폐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경제학의 역사에서 ‘중상주의’는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중상주의자들은 “화폐가 곧 부이며 가치이다. 그러므로 화폐를 축적하라”라고 말했죠.

그런데 사실은 내 주머니에 화폐가 많아도 화폐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상품들이 없으면 화폐는 소용이 없지 않나요? 따라서 화폐는 가치의 원천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상품들입니다. 그리고 상품의 가치는 원래 노동이죠. 그런데 교환과정 자체를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가 매개하면서부터 화폐 자체가 상품을 획득하게 해주는 힘 즉 가치를 가지는 것과 같은 전도된 인식이 생깁니다. 이러한 전도된 인식을 화폐 물신주의라고 합니다.

물신주의 개념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이야기할 텐데요.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화폐 물신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화폐를 통해서 무엇이 표현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상품이 가치를 가지게 되느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죠. 따라서 교환과정을 통해 사회적 노동이 조직되고 배분된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집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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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주의 , 생산관계 , 계급사회 , 화폐 , 생산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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