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고 하는 게 정답 같다

[양한승의 정세이야기](1) 정세를 논하라?

[편집자주] 양한승 씨는 ‘평등평화, 자유로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연대공동체’를 모색하는 사회변혁운동가로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시인으로 또는 정치활동가로 사회운동을 하다가 현재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 [양한승의 칼럼]을 시작한다. 이 칼럼은 필자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피로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짜증을 주기 십상이다. 글을 다시 쓰라는 “선수들’의 추천과 정세를 논하라는 ‘현장감독’의 담백한 지시다. 글쎄. 흔쾌히 응하고 통화를 마치고나니 아차 싶은 게, “어, 고공의 아파트 독방에서 뭘 알지?” 하는 자각이 머리를 때린다. “의욕은 남아 있나?”, “흐름이 느껴지긴 하는가?”


퇴근

어제 7시 지나
여의도에 들렀다.
패거리 져 남자를 때리고 있었다,
병든 시골간부였다.
남자 어깨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고
구둣발만이 춤추며 바람을 가르고서 울부짖었다..
나는 동지에게 말했다 - 보는 게 좋다!
당신의 실제 일꾼을!


2003년 1월, 민주노동당이 내게 부여한 작은 임무를 마치면서 쓴 소회를 짧은 시로 담은 것이다. 그리고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이 공백은?”


대리주의와 혁명운동 사이

* 1991년 - 의회를 노동자 중심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

1) 한국은 노동자계급 조직이 중심이 돼 활동한 대중정당의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
2) 작은 개량이라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파쇼 민주주의 제도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점
3)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취물들이 붕괴돼 가면서, 혁명이 먼 미래의 일로 생각되었다는 점

* 그리고 2003년 - 사실상 탈 의회 운동을 선언하고 나온 이유

1) 의회 진출 경험의 결과 대리주의의 한계가 뚜렷이 폭로되었다는 점
2) 반파쇼 민주주의 기반이 거의 안정적으로 구축되었다는 점
3) 소련 경험의 내셔널리즘 성격을 확인하고, 그렇다면 참된 공산주의 혁명운동은 실패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위기가 정점에 달한 오늘날 더욱 시급하게 요구됨

* 2010년 - 혁명운동의 본격적인 궤도 진입을 위해 준비된 현재의 내 인식

1) 저성장 속의 물가불안이 만성화한 이후 자본주의는 해체돼가고 있다.
2) 국제적인 노자 대립전선을 가시적인 형태로 단단히 구축해야 한다.
3) 대리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완벽한 부르주아 지배형태의 하나다.
4) 노동조합도 대리주의 형식의 하나며 제한 없는 투쟁의 방해물이 되었다.
5) 총회와 평의회 등 직접조직을 통해서만 혁명투쟁의 성공이 가능하다.
6) 능동적으로 조직된 집단행동에 비밀스러운 작풍은 어울리지 않는다.
7) 노동자 국제당을 목표로 한 혁명세력의 재조직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2009년 9월, 낙서로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이 무슨 일을 하긴 한 것이다. 생각의 변화와 나름대로의 정리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똥이라도 군말 없이 싸는가?” 스스로 하는 이 질문에 만족스런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낙서는 계속 되고 2010년 6월 어느 날,


별을 던지는 사람

하나.

아주 오래전 제1회 전태일문학상에 중편소설을 써서 보낸 적이 있다. 정보기관에서 분류한 내 직업코드가 소위 ‘시인’이지만 나는 한 번도 작가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학은 단지 지난 활동을 정리하고 평가하는 기억저장의 수단일 뿐이었다. 이후 잡지사에 잠깐 근무했던 일로 ‘언론인’이라는 딱지가 또 붙었지만 나는 그냥 레닌의 전통아래 사는 공산주의 사회운동가로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놔두었다. ‘정당인’으로 분장한 민주노동당 3년 활동을 포함해 그 어떤 것도 나를 포섭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직업혁명가를 바람직한 형태로 생각하지 않으며 긍정보다는 부정의 면모를 많이 발견한다.

문학상 응모는 그 초기 활동이었다. ‘전태일’이라는 타이틀이 좋으니 소설의 형식을 빌린 후미진 대도시 한 곳의 체험과 인식을 기록했다. 제목은 ‘별을 던지는 사람들’. 낭만적 지하조직, 광주학살 소문의 악몽, 불구화한 연애 등 주로 투쟁현장의 젊은 고뇌를 다룬 소설의 결론은 이렇게 맺었다. 야학교사였던 주인공이 계급의식을 심어주고 의식화시켰던 그리고 서로 만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여성 프롤레타리아가 예의 사랑하는 낭군의 품을 떠나 이별을 선택하는 것. 주체적인 노동자의 자기 길이었던 이별은 우리 사회 세 가지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도록 했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와 남성 가부장권력 그리고 지식인의 허위의식!

다시 찾은 원고 ‘별...’은 책장 밑에 숨겨놓았다가 몇 년 후 지병의 낙심 중에 미련 없이 태워버렸다.

둘.

강박에 시달리는 후배 J와 엊그제 의견 일치했듯, 우리의 문제는 역사적 계급인 혁명주체에 있다. 말기 자본주의 사회가 명백함에도 그 대체세력인 노동자들은 떠오르는 아이디어의 주역으로 무대중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야심에 가득 찬 뒷골목 지식인 분파의 임상실험적 지도력 행사에 여념이 없는 좌익 정치조직들이 참다운 사회주의 혁명정당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관찰된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에서 무계급사회는 태동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먼 어디서라도 새로운 문명의 유행으로 이 땅에 전해져 자극을 받을 순 있는 것일까? 면밀히 살피건 데, 이 또한 기대하기 어려운 무기력한 지구촌이다.

지식인의 교재는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 지도지침에 철저히 따르는 순결한 노동자가 그립다. 이제 지식인의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2세기에 걸친 고질적인 혁명주체 문제가 풀린다. 노동자에 대한 지식인의 배신은 학문실천의 왜곡이기에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지식인에 대한 노동자의 배신은 자기 본분을 각성하여 찾은 생활의 미덕이다.



사실상 생애 처음으로 이념과 그 이념을 실현할 주체 문제에서 현실의 함정을 절감하였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극단의 불안’을 이마빡에 달고 사는 철부지 시절의 자아에서 단 몇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땅의 척박함은 자연인의 분해를 포함하고 있다.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저만치에서 망각의 사자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하, 사회혁명은 미완의 스케치처럼 역사의 실루엣일 뿐이었구나! “영원한 것은 푸른 소나무..”

그러나, 하기에, 전대미답의 길을 개척하는 기쁨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섭리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팅빈 노선을 포함하며 정체되지 않는다. 나를 끌어당기는 암흑물질은 생명과 무생명의 경계도 없이 그 끝을 거부하며 점점 더 빠르게 우리의 의지를 확장한다. 참세상이 고맙다. 이제 네가 동심원으로 그려질 것이다. 불구자의 신명난 마당이 못될 이유가 없다. 끈을 묶고 목을 가볍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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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보니 반갑습니다. 용기를 내심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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