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부터 영화는 나에게 쉼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 영화를 즐겨봤다. 자정쯤 집에 와서는 피곤해도 영화 한 편을 보고 잤을 정도였다. 당시는 비디오 대여점이 유행하던 때여서 좋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일과 관련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 쉼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나와 엮여 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거리를 두고 보는 조율이기도 했으니까. 더구나 내가 영화를 즐겨보던 90년대는 무한 소비의 시대로 감각적 영상과 이미지, 스토리텔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은 일정하지는 않다. 영화에 따라, 나의 상태에 따라, 세상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어떨 때는 영화에 풍덩 빠져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마르지 않는 샘처럼 펑펑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해소(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으로는 정화됨!)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왜?’, ‘정말?’이라는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며 영화에 저만치 거리를 두고 보기도 한다. 얼마 전 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후자에 가까웠다.
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해야하지?
보통은 영화에 대한 내 느낌과 생각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서 영화에 관한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본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후배와 보는 거라, 영화를 잘 고른 건지 걱정도 되고 해서 예매 후 몇 개의 감상평을 보고 갔다. 그래서일까? 영화 초반부터 몰입되지 않았다. 영화의 스토리를 알고 있어서인지, 영화를 본 사람들이 불편해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인지 물음표가 계속 떠다녔다. 보통 이 영화는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된 여자와 엄마의 사랑을 갈증하는 아들의 무차별 살인 복수’라는 게 대개의 평이기에 그 틀을 벗어나고 싶었다.
‘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해야하지? 자식은 왜 어머니를 사랑해야만 하나?’라는 도발적 질문.
왜 우리는 부모와 자식은 사랑해야 하는 관계여야만 한다는 당위로 이해할까? 더구나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고, 자식을 선택할 수도 없다. ‘케빈’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아니 엄마 ‘에바’를 노골적으로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를 무조건 사랑하라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여성으로서 모성 본능에 따른 것이니 당연하다는 명제를 들이밀 때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성이 ‘결핍’된 것이라고 비난해도 그 비난을 고개 끄덕이며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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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신화에 대한 비판과 연구는 여러 여성학자들이 이미 말해 왔다. 수지 라인하르트는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에서 모성신화는 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이며, 16세기까지 가족을 중심으로 경제활동과 가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육아가 여성 혼자의 몫이 아니었다고 한다.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도 17세기의 가족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근대의 가족처럼 부모와 자식이 자애와 친밀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라인하르트가 인터뷰한 13명의 여성 중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남미나 마야족에서 발견되듯 산모들은 출산 후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진화생물학자인 세라 브래퍼 흐르디에 의하면 첫 출산을 하는 산모 40%가 처음 아기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아이를 낳고 기쁨의 감격에 휩싸이는 경우가 전부는 아닌 셈이다. 그러니 에바는 특별한 게 아니다. 더구나 “엄마라는 위치는 늘 책임이 막중한 연중무휴의 고된 일과 배려와 이해심,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자리”이다. 케빈의 아빠처럼 퇴근 후나 주말에 잠시 아이를 봐주거나 놀아주는 정도로 가벼운 위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성본능 신화’가 떠도는 것은 희생적 모성의 인격체로서 어머니를 상정하여 여성에게 일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비용과 연구가 들어가는 양육정책보다는 가부장적 국가에서는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 바탱대르의 ‘만들어진 모성’에 따르면 인구통계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군사적·경제적 자원으로서의 의미가 확실해지면서 아이의 중요성이 생겨나자, 육아에 대한 국가정책이 생기고 어머니의 헌신적 역할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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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티케스트] |
어머니의 희생을 강조하는 모성신화는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육아의 책임자인 어머니에 대한 비난으로 손쉽게 이어진다. 영화에서도 사람들은 케빈이 아빠와 동생, 학교 친구들을 죽인 책임을 어머니인 에바에게 묻는다. 그녀는 재판을 받고도 마을에서 손가락질 받는다. 취업도 쉽지 않다. 케빈이 반사회성, 이른바 사이코패스(원작인 소설의 설정이 사이코패스다)가 된 것은 어머니의 탓인가? 그녀가 순수하고 온전한 사랑을 주지 않아서 아이가 살인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어떤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강력범죄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족의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끔찍하다. 그 힘든 양육을 여자에게 맡기는 것도 모자라서 그 아이의 잘못까지도 뒤집어쓰다니!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도대체 엄마(여성)들은 어디에서 숨을 쉴 것인가. 아이는 엄마나 부모의 전제(專制))아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만나는 친구와 동네 사람, 지역사회에서 함께 커가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던진 또 하나의 질문
왜 케빈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지? 케빈의 말대로 좋아하지 않더라고 익숙해지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집착에 가까운 그의 욕망이 불붙기 전에, 인간의 감정은 불안정하고, 사랑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모자관계여서 더 특별하고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롭게, 케빈과 에바가 독립적 개인으로 만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삶과 생활을 공유하는 시간만큼 사랑도, 감정도 달라질 수 있다는 유동성을 케빈이 알았더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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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티케스트] |
난제, 범죄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의 만남
직업병인지 영화를 보며 인권-차별을 떠올린 장면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케빈 때문에 에바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에바의 집과 차에 빨간 페인트를 던지는 장면을 보면서, 인권운동을 하는 나로서는 ‘범죄자 가족에 대한 낙인과 차별’의 심각성을 생각했다. 저런 일이 발생할 수 있겠구나, 사람들이 조금만 더 이성적이라면 그녀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 텐데, 어쩌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몇 주 후 신문에서 통영에서 살해된 초등생의 아빠가 살인범의 가족과 마주쳐서 너무나 힘들어서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며 ‘아뿔싸!’ 했다. 범죄자의 가족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도 정말 힘들겠구나, 만나면 떠오르고 가슴이 미어지겠구나 싶었다. 범죄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의 만남은 서로에게 난제이다. 이건 그냥 논리로 풀 수 있는 것도, 제도적으로 풀 수 있는 것도 아니겠구나 싶었다. 제도로 풀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산적해있을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픈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동료로서 보내는 위로가 아닐까.
최근 일어난 강력범죄와 성폭력으로 큰 상처를 입었을 모든 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북돋움인 위로의 한마디를 건넨다. 많이 아프시죠? 조금만 힘내세요. 우리도 당신의 아픔을 압니다.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