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것들의 상식과 바람

[명숙의 무비,무브](2) <광해, 왕이 된 남자>와 정치

바람이 불고 개미가 줄지어 이동하는 것을 보며 날씨 변화를 읽어내던 시골 어른들은 분주히 무언가를 대비했다. 마당과 텃밭에 나가 농기구나 비료포대를 건물 안으로 들여왔고, 닭이 있는 울타리도 살폈다. 그렇게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읽어낸 옛 어른들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세월이었겠지.

삶도, 사회도 마찬가지여서 그렇게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발신자가 보내는 메시지를 공중에 흩뿌리지 않고 수신자가 받아낸다면 그 사회는 소통의 가능성에 환해지지 않을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예매율 1위라 친구와 함께 봤다. 이 영화의 인기에서 우리 사회 대다수 사람들의 열망을 조금 읽었다면 과장된 것일까.

인기 좋은 영화는 영화적 매력, 즉 탄탄한 스토리텔링, 배우의 연기력, 훌륭한 연출 등을 두루 갖춰야 한다. 더불어 영화 외적인 요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 시대의 주요 화두나 관심사를 다룬 영화라면 영화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끌어모은다. 물론 개봉관을 얼마나 장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어서 배급사의 영향력도 한몫을 한다. <광해>는 이러한 요소를 대부분 갖췄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에 많은 사람의 눈과 귀가 쏠린다. 물론 대통령과 왕이라는 지위 자체가 매우 다르고 역할도 다르지만, 한 사회의 정치를 이끄는 주요 위치인 것만은 비슷하지 않은가.

[출처: CJ엔터테인먼트]

정치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사실 대선이나 총선이 다가오면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한 번쯤 후보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정책이나 공약이 덜 나오기는 하지만 ‘국민이 행복한 사회’나 ‘사람이 먼저다’라는 식의 정치 방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액면 그대로야 멋진 구호지만 감동은 없다. 왜일까? 아마도 그건 수사일 뿐이고, 선거 시기 호들갑일 뿐이란 것을 알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에 대해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광해>에서 정치에 ‘정’자도 모르는 시정잡배인 광대 하선이 보름간 왕이 되어 벌인 정치에서 사람들은 안철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게다. 그는 아직 정치에 물들지 않은 사람, 그래서 수많은 정치공학적 술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사실 그러한 기대는 기존 정치인에 대한 안티테제로 비롯되는 것이기에 무한 가능성의 정치로 비칠 수도 있지만, 발을 디딜 수 없는 무한 허수 정치에 그칠 수도 있다.

다시 영화로 가보자. <광해>는 조선시대 서인들의 권력찬탈 음모에 맞서기 위해 광해와 생김새가 비슷한 하선이 왕 노릇을 보름간 하면서 일어나는 정치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왕 노릇을 하던 하선에게 도승지인 허균은 “정치란 무릇,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동법 시행을 위해 대신들에게 무언가를 내줘야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다. 거래로써의 정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는 낯설다. 가짜 왕 하선은 정치란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는 단순한 상식으로 접근해 감동을 준다. 대동법 시행이 늦은 이유에 대해 신하가 “지주들이 더 많이 내게 되어 차별이 될 수 있다”고 답하자 하선은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내놓는 게 차별이오?”라며 꾸짖는다. 또 명나라 전쟁에 군사 2만 명을 보내는 안을 다루면서, 적당히 싸우다가 여차하면 금에 항복하고 살아서 돌아오라고 한다. 대신들이 그건 오랑캐를 섬기는 것으로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고 하자, 하선은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백성들이 백 곱절 천 곱절 소중하오!”라며 핏대를 세운다. 이렇듯 그는 시종일관 사람의 생명과 생존이 소중하다는 상식으로 정치를 풀어간다. 너무나 흔한 스토리와 인물구도이지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병현의 뛰어난 연기 때문은 아닌 게다. (묘하게도 안철수도 상식의 정치를 말한다.)

부유세나 누진세 등 소득이 많은 사람에게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도록 하자는 세금개혁안을 소유권을 부정하는 ‘빨갱이’로 몰거나,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터인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하면 미국과의 외교를 위협하는 친미 종북주의자로 몰았던 한국의 현실이 겹쳐지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정치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회사가 쉽게 해고하고, 국가가 쉽게 잡아 가둘 수 있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소중히 해야 할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정치에서 유려한 화술과 화려한 경력, 거창한 슬로건보다는 상식적인 판단과 실천을 사람들은 갈망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상식만으로도 쉽게 감동을 받는 법이다.

[출처: CJ엔터테인먼트]

천한 것들의 정치를 가능케 하려면

그런데 그 상식이 정치에 대한 우리 안의 틀을 좁게 만드는 것으로 작동할 때는 답답하다. 지금 한국은 왕이 될 사람이 정해져 있는 신분제 사회는 아니지만, 여전히 정치는 ‘재력 있고’, ‘나이 든’, ‘남성’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영역에 들어올 내용과 사람’에 대해 구분 짓고 경계를 만들고 있다. 영화에서 진짜 왕 광해가 하선에게 그러했던 거처럼 말이다.

“용상에 앉았던 천한 것을 살려둘 수는 없잖소.”

광해가 겨우 건강을 되찾고 왕의 위치로 돌아가면서 도승지 허균에게 하선의 처분을 명하면서 한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광해는 하선의 대역으로 자기를 해하려 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었고, 조정의 흔들림도 막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목숨을 내놓으라니... 광해에게 중요한 건,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고, 그게 지배를 유지할 수 있는 틀이다. 아무나 넘보는 왕 자리는 왕이 아닌 게다. 좋아하거나 지지하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결혼하지 않고 애도 없는 여성이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을 때, 아직 이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 또는 그것의 전제가 되는 이성애자 여성이 아닌 사람은 정치적 권리가 없는 시민권자가 아님을 체감한다. 게다가 그에 맞선 야당의 전략이 ‘든든한 맏형’이라는 젠더이미지일 때, 여전히 한국에서 진보나 민주주의는 가부장으로 수렴되는구나 싶어 씁쓸하다. 천한 비혼 여성이, 비정규노동자가, 동성애자가, 장애인이, 이주민이 정치의 영역에서 발도 디딜 수 없는 사회에서 천한 것들의 정치는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선이 내시나 사월이의 아픔에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정치를 하려면, 먼저 우리 사회의 상식이라는 이름의 차별과 배제를 깨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 사회에 다양한 존재와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걸 드러내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어둡고 긴 차별의 동굴을 벗어나 빛이라도 쐬려면 세월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천한 것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선거 시기만큼은 적어도 고개를 숙이는 정치인들이 있을 정도인데, 적어도 시민들에게 헌법에만 있는 ‘모든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민의 투표권 정도는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9월 1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투표시간을 8시까지 2시간 연장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새누리당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OECD 국가 대부분은 8시~10시쯤 투표마감을 한단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고, 저녁에도 일하는 비정규직이 많은 한국에서, 하루 장사로 겨우 생활하는 소상인이 많은 현실에서 투표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최소한의 정치참여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물론 정치는 선거 시기에 한정되어서는 안 되며, 투표권 행사만이 정치가 아니며, 투쟁이 정치라는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정치에 투표권 행사로라도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소수에 머무르지 않도록 제도적 틀을 개선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투표시간을 연장해도 믿을만한 정치인이나 정당이 보이지 않으면 지지하지 않을 수 있다 하더라도 선택권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처럼 도시민의 80%가 백지투표를 던지더라도 선택권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결국 투표하러 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끝으로 개인적 바람이라면 도부장에게는 하선이 목숨을 바칠 만큼 ‘진짜 왕’이었고, 그만큼 감동을 준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준 사람이 대선에 나온다면 좋겠다. 작년 35미터 고공에서 홀로(그러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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