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이 환생하는 도시의 '외로운 섬'

[최인기의 사진세상](13) 청계천 공구상가를 지키는 사람들


6호선 동묘역에 내려 6번 출구로 나와 청계천으로 향했습니다. 사진 속의 삼호호텔은 주변 동대문호텔과 함께 꽤 오래된 역사가 있는 호텔입니다. 이 앞은 2004년 청계천 복원공사를 앞두고 노점상과 용역 그리고 공권력이 맞붙어 일대 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자서전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를 보면 이 호텔의 2층에서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금은 철거된 고가도로를 따라 판자촌을 가리기 위해 지어졌다는 삼일 아파트는 이 층 만 남겨둔 채 철거를 하고 현재는 방치되어 있습니다. 복도에 들어서니 뜯긴 문 사이로 부랴부랴 떠나고 남은 세간이 아무렇게 버려진 채 뒹굴고 있습니다. 철 지난 달력과 연체료 고지서, 버리고 간 낡은 옷가지와 짝 잃은 신발들, 주인 잃은 인형은 집안의 내력을 엿보게 합니다. 곰팡이가 검게 피어오른 벽에 위태롭게 걸린 괘종시계가 4시를 가리킵니다.


청계천 황학동에서 전자제품을 파는 63세 조경남 아주머니를 찾았습니다. 큰아들이 태어난 1985년 청계천 8가에 들어와 지금까지 장사하고 계십니다. 한참 장사가 잘될 때는 노다지를 캐던 황금상권이었답니다. 전국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이 청계천 황학동이었으니 아무거나 갖다 내놔도 팔리는 곳이었답니다. 이즈음 청계천은 없는 게 없는 곳으로 핵폭탄도 만들어 팔 수 있는 곳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88년 올림픽 때는 외국관광객에게 알려져 국제적인 벼룩시장으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조경남 씨는 청계천 복원공사 후 서둘러 ‘가든 파이브’에 입점했지만, 그 후 분양가가 서너 배 더 오르고 인테리어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장사까지 되지 않아 월세마저 밀리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움켜쥐고 있다가 남편은 병을 얻었고, 결국 화병으로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개발을 반대하고 극렬하게 투쟁했던 분들이 지금은 서울시의 절대 지지자가 됐습니다. 상인들과 우리는 얼마 전까지 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서울시가 이렇게까지 우리를 배려해 줄줄은 몰랐고 감동했습니다." 이 말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한 언론사와 나눴던 인터뷰기사입니다. "청계천의 위대함은 그 외형적인 결과가 아니라, 수십만 명의 상인과 노점상들을 설득한 데 있다"며 "서울시는 주변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상인들을 무려 4,200차례 만났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조경남 씨 앞에서 꺼내자마자 벌컥 화를 내며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코빼기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상인들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저는 서둘러 발걸음을 청계천 세운상가와 아세아 극장이 있던 자리로 옮겼습니다. 이곳은 오래전 청계천 복원공사의 부당함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이 있습니다. 청계천 노점상 박봉규 씨입니다. 이분은 2003년 8월 23일 중구청장실에서 노점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을 하였고,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9월 6일 사망했습니다.

“저희 아버지, 세상에 법 없이도 사실 분이셨습니다. 당신의 수입이 적어도 당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 챙기며 사신 분입니다. 저희 아버지 평생 고생만 하시다 결국 스스로 세상을 등진 분이십니다. 중구청이 그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지요. 중구청의 과도한 단속과 단속과정에서 용역반원들의 인간성 무시와 학대, 폭력...

이 모든 것들이 죽음을 생각하시게 한 것 같습니다. 딸로서 그 과정들을 알고부터는 삶 자체가 싫어졌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가진 게 없어서, 도둑질할 수가 없어서, 노점상 한 것이 죄라면 그래서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구청에서 CCTV 녹화 필름을 보았습니다. 중구청 직원의 폭언은 모두 삭제되고 아버지 분신 직후의 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화장실에서 3분. 그 3분 동안 무슨 생각 하셨을까요? 생과 사를 왔다갔다 하시며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남겨진 어머님과 자식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죄악...

하지만 아버지께선 당신이 받으신 상처가 더 크셨을 겁니다. 희망의 세상이라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살라고 하셨던 아버지. 자식보다 어린 중구청 용역들의 갖은 욕지거리와 폭력. 마지막으로 희망을 품고 찾아간 중구청 직원들의 폭언. 자존심까지 짓밟힌 내 아버지의 그때의 심정. 전 너무도 가슴이 아립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아시나요?

저 37년을 살면서 제 아버지께 따뜻한 밥 한 끼, 좋은 옷 한 벌, 그 흔한 효도 여행 한번 보내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집가서 사는 것이 효도라고 하시던 내 아버지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4개월 동안 흘린 제 눈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식으로서 마지막까지 편하게 보내 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차디찬 냉동실에 4개월 동안 계실 수밖에 없어 장례식도 못 치르고 있는 제 가족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 자식으로서 아버지께 너무 해 드린 것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가진 게 없어 저같이 가슴 아픈 일들, 더 이상 없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003년 12월 21일 박봉규 씨 큰딸 박진 씨의 편지입니다. 분신 사망한 노점상 아버지의 맺힌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며 쓴 편지입니다.


청계천 공구상가 사람들은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없습니다. 2005년으로 기억하는데 ‘플라잉시티’ 등 예술운동가 그룹이 이곳 공구상가에서 함께 며칠 동안 동고동락하며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베니스영화제 대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 ‘피에타’의 배경이 바로 이곳입니다. 을지로 3가 5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공구상가로 접어드는 골목이 나옵니다. 공구상가 골목에 들어서자 스패너, 망치, 그리고 드릴 같은 것들이 천장 높이 촘촘히 쌓여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망치 하나, 못 하나, 아무렇게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비춰 질 겁니다. 하지만 끄떡없습니다. 주인장 나름의 오랜 경험과 지혜로 차곡차곡 적재적소에 물건들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어떤 물건을 찾더라도 눈 감고 손만 쓱 뻗으면 척척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공구 틈바구니에 끼어 허기진 배를 채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꺼내 들었을 것이며, 때로는 한낮의 달콤한 낮잠에 취했을 것입니다. 그 사이사이를 얼마나 또 오랜 시간 노동으로 채웠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공구상가 안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자 살아온 만큼 견고한 쇠사슬로 물건을 칭칭 동여매는 모습이 보입니다. 셔터 내리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노동을 달래기 위한 술판이 슬슬 벌어집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슬쩍 끼어들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떤 공구상가 분은 엑스트라로 출연했다고 자부심이 대단하십니다. 소주잔이 돌고 안주가 나오자 영화를 봤느냐고 물어보니 역시나 영화를 보신 분은 아무도 안 계시고 안 봐도 뻔한 내용이 아니겠느냐 하십니다. 어느 분은 청계천에서 일하는 젊은 총각이 신 나게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며 “신 나게”를 강조하십니다. 다른 분은 다방 여자인가를 만나서 살다 옛 애인이 나타나자 헤어지는 영화라고 맞장구를 치십니다. 아무튼, 대단들 하십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 어디 기자냐고 묻자 이미 술 한잔 들이킨 저는 지나가는 길손이라고 하기엔 좀 머쓱해 ‘민중언론 참세상’ 기자라고 해버렸습니다. 기자가 뭐 별건가요?


어찌 보면 이곳 사람들은 낡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들 손을 거치는 물건들은 멀쩡히 새것으로 환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치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고집이 청계천 공구상가를 지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잠시 저는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속도의 시대, 솟아나는 빌딩숲과 아파트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저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것은 아닌지...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경기도 광주로 떠밀려 갔던 사람들, 다시 수십 년 동안 청계천에서 터전을 잡고 서로 촘촘히 엮인 그물망처럼 살아왔던 사람들, 누구 말대로 이곳은 도시 한가운데 ‘외로운 섬’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낼 수 없습니다. 연재가 끝나기 전에 청계천에서 이주한 숭인동 풍물벼룩시장에 한 번 더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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