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의 공존, 옛 '파고다 극장' 주변

[최인기의 사진세상](14) 서울 복판에서 3천 원으로 한 끼 해결하기


요즘처럼 가을 해가 떨어지면 종로 뒷골목 곳곳에 있는 포장마차는 환한 불빛으로 휩싸입니다. 과거에는 희미한 카바이드 불빛이었지만 지금은 화려한 알전구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종로3가 탑골공원 옆 ‘동굴 다방’을 지나 몇 걸음 더 지나면 ‘파고다 극장’ 자리가 나옵니다. 이제는 고시원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오늘은 파고다 극장을 중심으로 개인사를 풀어 볼까합니다. 서울의 돈암동에 자리 잡고 있는 용문고등학교라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였는데요. 이 학교에 ‘러브액션’이라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80년대 강북 쪽에서는 꽤 잘나가던 스쿨밴드였습니다. 그 그룹에서 키보드를 치던 영진이, 그리고 연극반이었던 명석이라는 친구와 저는 종종 파고다 극장에서 개최된 락 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낙원 악기상가가 근처에 있다 보니 예전부터 ‘파고다 극장’이 공연장소로 딱 이었던 것 같습니다. 80년대 중반 헤비메탈과 하드락이란 말이 아직 생소할 무렵, 이곳에서 주말마다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철십자’, ‘뮤즈에로스’, ‘혼’... 그룹 이름도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장수했던 ‘블랙신드롬’과 ‘블랙홀’도 있었고요. 전설적인 그룹 ‘들국화’와 ‘시나위’, ‘부활’도 이곳에서 가끔 공연을 가졌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80년대 초중반 이들은 ‘헤비메탈사운드연합’을 결성하여 ‘파고다 극장’에서 주말마다 활발히 공연을 펼쳤습니다. 나중에 이태원과 신촌, 한참 후에 90년대 홍대 앞 클럽을 중심으로 인디음악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사실상 한국 락 음악과 소위 인디음악의 출발은 누가 뭐래도 이곳 ‘파고다 극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공연관람을 마친 친구들은 ‘파고다 극장’ 담벼락을 끼고 빙 둘러앉아 여전히 식지 않은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드럼은 이렇게 치는 거라고 허공에 대고 두 손을 휘두르며 흉내를 내고 있었고, 또 한 친구는 옆구리에 손을 갖다 대고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어 대며 공연 도중 기타리스트가 몇 번의 삑사리가 났는지 맞히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머리를 주억이며 오늘 공연에서 기타를 몇 대 부쉈는지 맞추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대학입시라는 스트레스와 시름을 음악을 들으며 견뎌냈던 거 같습니다.


한때 ‘파고다 극장’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기형도라는 시인입니다. 그땐 솔직히 29살의 나이로 요절한 이 젊은 시인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시집은 여자애들이나 핸드백에 넣고 다니면서 나뭇잎 떨어지는 벤치 아래에서 읽는 건 줄 알았죠.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그의 시를 접하게 되었는데 ‘서울 변두리의 가난, 술에 취한 사내, 불안한 희망, 도시생활 속 절망’으로 이어지는 시어들은 시인의 삶만큼 내 가슴을 아리게 했습니다.


종로는 대규모 개봉관들이 대로변을 중심으로 3가에 피카디리와 단성사 극장이 마주보고 있었고, 종로대로변을 건너 청계천 방향으로 서울극장, 종각 쪽으로는 허리우드라는 당대 최고의 개봉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를 두고 탑골공원 후문 쪽에 자그마한 파고다 극장이 있는데요. 왜 하필 시인은 변방의 작은 극장에서 유명을 달리했을까요? 한 시인의 죽음을 두고 그동안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겠지만, 저는 파고다 극장을 지나칠 때마다 텅 빈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을 시인이 떠오릅니다. 격정의 시대 80년대가 저물고 또다시 시작될 불길한 미래를 시인은 고통스럽게 독백으로 시를 읊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쓴 60여 편의 시는 그 후 ‘문학과 지성사’에서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첫 시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고, 젊은 시인이 지녔던 시적 울림은 마침내 영화 ‘장미빛 인생’, ‘봄날은 간다’, ‘빈집’, ‘질투는 나의 힘’ 이라는 영화 제목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마치 요절한 시인의 영혼을 위로하듯 말입니다.


‘파고다 극장’ 자리 앞에 작은 이발소가 있습니다. '이레 이용원’. 10년 전에는 바로 옆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죠. 50대로 보이는 인상 좋은 중국 교포 아주머니가 후덕하게 머리를 감겨 주고, 면도도 해주며, 반겨주던 곳입니다. 할 일 없는 동네 노인들이 이발소에 모여 “동무? 동무는 어디서 왔슴네까” 하고 던지는 농지거리에 교포 아주머니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일 없슴네다” 하고 말대꾸를 하자, 다들 또 그 억양이 우스워 죽겠다고 박장대소였습니다. 고시원에 있을 때는 종종 이발소에 놀러와 머리를 깎았는데요, 그러다 얼마 전 다시 들르니 원래 있던 곳은 구멍가게가 들어섰고, 같은 건물 일층 대로변으로 이발소를 옮겼더군요. 오랜만에 다시 들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안 계시고 중국교포 아주머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작달막한 키에 대머리 이발사가 의자에 앉으라고 권합니다. 목에 흰 천을 두르고 머리를 맡겼습니다. 머리숱이 없다 보니 쓱싹쓱싹 몇 번 가위질에 귀밑이 깔끔해지고 단정해 보입니다. 머리를 감고나면 작은 빨대를 꼽아주던 달콤한 야쿠르트도 더 이상 주지 않아 좀 섭섭했지만, 가격은 얼마냐 하면? 놀라지 마세요. 3천5백 원입니다. 이 가격은 20년 전 가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래전에는 몇 개 되지 않던 이발소가 수십 개도 더 되는 거 같습니다. 이발사에게 왜 이렇게 이발소가 많이 늘어났느냐고 물으니, 가격이 싼 것도 있지만 머리 깎는 기술이 좋아서라고 자랑합니다. 문을 나서니 늦가을의 바람이 파스라니 깎은 귀 볼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겨울 문턱인 듯 제법 추웠습니다.


출출한 배를 채우려고 탑골공원 옆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실비 식당들이 종로 재활용센터 앞까지 즐비합니다. '선비옥‘ 이라는 식당 앞에 있는 야외 식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북엇국과 순두부가 2천 원입니다. 오래전 가격 그대로입니다. 저는 순댓국을 시켰습니다. 새콤달콤한 깍두기 국물을 넣고 밥을 말아 훌훌 입속으로 털어 넣으니 포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커피는 단돈 100원입니다. 머리 깎고 저녁밥에 커피까지 마셨는데 총 5천6백 원이 들었습니다. 이러니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파고다는 ‘탑’이란 뜻입니다. 이제는 탑골공원이라 부르지만 예전엔 주로 파고다공원이라 불렀습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역사적인 장소이기에 이곳에서는 종종 작은 규모의 집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님들이 보라색 보자기를 쓰고 감옥에 갇힌 자식과 가족을 위해 양심수 석방을 눈물겹게 외치며 집회를 하였습니다. 탑골 공원 안에는 국보 2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보물 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에는 담벼락주변으로 작은 상가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나지만, 그 후 담벼락은 헐고 담장을 새롭게 설치해 바깥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88년 올림픽을 맞아 탑골공원은 무료로 개방되기 시작했고, 탑골공원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보니 어르신들의 휴식처가 된 지 오래입니다.


대로변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지만 한 걸음 들어서면 오래된 골목길이 속살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여기는 위치상 서울의 한복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쾌적하고 세련된 종로의 거리를 걷되 특별히 볼일이 없는 이상 이곳까지 찾아들어와 3천 원짜리 식사로 한 끼를 해결하는 경우는 드물 겁니다. 식당이 유지되는 비결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넘쳐난다는 사실과 이들 대부분이 노인이라는 것입니다. 종로는 관철동 젊음의 거리와 인사동을 중심으로 문화의 거리, 그리고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노인들의 영토가 공존합니다. 좋게 말하면 종로는 오래된 전통과 현대가 한 공간에서 서로 지탱해 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구별 짓기’가 가능한 것은 오랫동안 서울이라는 공간이 급격히 발전해 오면서 형성된 문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문화는 개발이라는 첨병에 맞서 자신의 공간을 지켜나가거나 혹은 파고다 극장이 고시원으로 변했듯이 새로운 자리를 내줌으로써 생명의 끈을 연장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뒷골목 종로의 남루한 거리, 늦은 시간 탑골공원 후문 포장마차는 내일의 희망을 안주 삼아 하나둘씩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의 천국입니다. 다음은 종로의 피맛길과 관철동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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