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없는 코오롱 자본, 코오롱스포츠 불매투쟁으로 심판한다

[오늘, 우리의 투쟁]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의 10년 투쟁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히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참세상>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코오롱,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전의 이야기

2004년 8월 25일, 64일간 이어진 코오롱 구미공장의 총파업이 마무리됐다. 한때 3,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며 국내 섬유산업을 이끌었던 공장의 파업 대오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일상화된 인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1,500명가량으로 줄어들었다. 몸 망가지는 걸 살필 새도 없이 3교대로 열심히 일하면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임금이 주어졌다. 매년 조금씩 오르는 임금에 길드는 동안 어느 공정은 없어지고 수십 년 일한 누군가는 위로금을 받고 퇴직한 뒤 비정규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낡은 설비와 사라지는 공정, 갈수록 줄어드는 인원으로 위기감이 감돌던 공장에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일부 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고 인원 정리를 시행하겠다.”는 사측의 일방 통보가 전해졌다. 노동조합은 고용보장과 신규투자를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준비되지 않은 두 달여의 총파업은 고통스럽게 끝났다. 노동조합은 파업 기간 무노동 무임금까지 감수하며 고용보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내주었고, 사측은 의도한 모든 것을 관철시켰다. 노동조합은 임금 삭감과 한계사업 철수를 인정하고 사측은 신규투자와 고용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코오롱 자본의 경영상 어려움은 명백했지만, 이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경영진이 야기한 위기였다. 무분별한 투자와 거듭된 실패로 인한 부실경영이 드러났고, 비자금 의혹이 불거진 코오롱캐피탈의 470억 원대 횡령 자금을 계열사 출자를 통해 보전하면서 그룹 전체의 재무상태와 이미지가 악화되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었다. 위기에 봉착한 자본은 화풀이라도 하듯 노동자들에게 온갖 책임을 전가하며 잔인한 공격을 퍼부었다.

패배한 총파업의 여파로 현장이 무너지자 연말부터 사측은 ‘조기퇴직 우대제’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경산·구미·김천공장에서 90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을 내쫓고도 2005년 1월에는 기어이 정리해고를 강행한다.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노동조합은 또다시 임금 15% 삭감안을 제시하고, 2월 1일 노사는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구미공장·김천공장 인원조정 관련 합의서’를 작성한다. 합의서에는 이미 강제 퇴직한 431명을 포함한 509명의 인원조정 내용이 포함되었고, 사측은 나머지 인원의 구조조정 방식과 관련해 정리해고는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불과 17일 후 78명의 노동자에게 2월 21일자의 정리해고 통보가 전해졌다. 이 합의서는 사실상 노동조합이 수용한 정리해고 합의의 근거가 되었고, 2008년 9월 대법원은 코오롱의 정리해고가 부당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2004.6.23. 시작된 64일간의 파업 [출처: 코오롱노동조합]

현장에 통한 진심, 기적 같은 노조위원장 당선과 코오롱의 노조탄압

2005년 2월 17일, 회사가 밀어붙이고 노동조합이 용인한 정리해고의 대상자 78명에게 통지서가 전달되었다. 대다수가 노동조합의 전·현직 간부이거나 현장에서 바른말을 해왔던 노동자들이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지켜낸 단 하나, 고용보장 약속마저도 헌신짝처럼 내버린 사측과 노동조합에 대한 정리해고자들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2월 21일, 50명이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조합원들을 사지로 내몬 노동조합에 대한 현장의 분노 역시 만만치 않았고 불신임을 묻는 서명이 돌기도 했다. 코오롱정투위는 해고투쟁을 엄호하겠다는 노동조합의 약속을 믿고 사측이 바라는 노노갈등을 피하고자 해고투쟁에 총력을 집중하기로 한다.

그러나 6월이 되자 노동조합은 아무런 논의 없이 집행부 총사퇴를 하고 만다. 사측의 출입금지가처분신청으로 현장 진입의 길이 막혀있던 코오롱정투위는 조합원들에게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리고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동조합 선거에 출마하기로 한다. 위원장과 사무장, 4명의 부위원장 등 총 6명이 런닝메이트가 되는 코오롱노동조합 10대 집행부 선거는 세 팀의 후보가 출마해 7월 21일 치러졌다.

코오롱정투위의 목표는 애초부터 당선이 아니라 현장에 잠재된 조합원들의 공분을 일깨우고 부당한 정리해고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해 복직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사측의 방해공작과 부당노동행위는 도를 넘었고, 코오롱정투위 후보들은 사측이 고용한 용역깡패에 막혀 열흘의 선거운동 기간 중 사흘을 허비했다. 6명의 해고자로 구성된 후보가 내세울 수 있는 공약도 마땅히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간 부지런히 현장을 누비며 조합원들의 진심에 호소했고, 결과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적 같은 당선이었다.

일주일 후 사측이 매수한 선관위원장의 선거 무효 선언이 있었지만, 구미시청과 노동부는 최일배 위원장과 10대 집행부를 합법적인 노동조합으로 인정했다.이후 사측의 금품·향응 제공 등 선거개입에 대한 선관위원의 양심선언이 이어졌다. 그러나 사측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장 내에 100명이 넘는 용역깡패를 상주시켜 노동조합에 대한 폭력을 자행했다. 최일배 위원장은 노조사무실에 참을 인(忍)자를 새겨놓고 참고 또 참으며 교섭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사측은 오히려 노동조합에 대한 초법적인 탄압과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관리·통제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부당노동행위와 노조선거 지배개입과 관련해 검찰은 두 차례의 압수수색을 포함해 무려 9개월 간 수사를 진행했지만 2006년 7월, 고작 1,500만 원의 벌금을 구형하고 노무담당 인사팀장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2006.5.26. 코오롱정투위, 청와대 앞 크레인 고공농성 [출처: 코오롱투쟁승리를위한공대위facebook]

법에도 현장에도 기댈 수 없는, 절박함과 의지로 이어온 투쟁

코오롱정투위는 구미와 코오롱 본사가 위치한 과천을 수시로 오가며 줄기찬 투쟁을 이어갔다. 최일배 위원장은 2004년 파업 합의에 배석해 고용보장 약속의 증인이 되었던 구미시장을 압박하며 시청 앞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위원장의 단식 17일차, 세 명의 조합원들이 전류가 흐르는 구미공장 안 송전탑에 올라 한 달 넘게 버텼다.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일 년을 꼬박 목숨 걸고 투쟁했지만, 사측은 철저한 탄압과 외면으로 일관했다.

2005년 3월, 이웅열 회장 면담을 요구하며 벌인 사흘간의 과천 본사 로비 점거농성에도 답을 얻지 못하자 코오롱정투위는 담판을 짓기 위해 회장의 집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서를 품은 최일배 위원장을 비롯한 조합원 전원이 출동한 경찰에 폭력 연행되었고, 격분한 최일배 위원장은 동맥 절단을 시도한다. 피 흘리는 최일배 위원장을 호송차에 실어 연행하던 경찰은 그의 의식이 희미해지자 차를 돌려 병원으로 이송했고, 이틀 동안 수술과 조사를 마친 후 바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시켰다.

위원장 구속 이후 열린 노사 간의 교섭은 금전적 해결만을 주장하는 사측에 의해 결렬되었다. 5월 말에는 세 명의 해고자가 청와대 앞 크레인에 올라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였지만 열흘 만에 경찰특공대에 의해 진압되고 그중 한 명은 구속되었다. 한편 4월 11일 중앙노동위원회는 코오롱의 부당노동행위와 부당해고 구제신청 재심을 기각하는 판정을 내렸다. 중노위 결과에 따라 코오롱정투위의 조합원과 위원장 자격이 상실되자, 구미공장에서는 사측과 입장을 같이 하는 김홍열을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노동조합은 2006년 12월 규약 변경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민주노총을 탈퇴한다.

목숨까지 내걸고 2년 가까이 싸웠지만, 현장은 차갑게 얼어붙고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결연하게 투쟁해 온 코오롱정투위 내부에도 동요가 일었고, 최일배 위원장이 출소한 후 투쟁의 지속 여부까지 포함한 전체 논의가 진행되었다. 2006년말부터 코오롱정투위는 조직을 투쟁팀과 생계팀으로 나누고 2007년 4월 구미공장에서 예정된 코오롱 창립 50주년 행사를 겨냥한 집중투쟁을 결의한다. 그러나 4월 13일, 민주노총 총력투쟁 지침이 내려진 구미공장 앞 결의대회에 모인 대오는 500명이 채 되지 않았고 그 시각 공장 안에서 김홍열 노조위원장은 노사상생을 외치며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했다.

정리해고 이후 숨 가쁘게 이어온 투쟁과 사측의 극악한 노동탄압은 공중파 3사의 뉴스와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다투어 다룰 만큼 이슈가 되었지만, 세간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졌고 꿈쩍도 않는 사측에 맞선 투쟁은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싸움의 경험과 세월이 쌓여갈수록 포기할 수 없는 억울함과 투쟁의 이유 역시 분명해졌다. 사실상 무노조 사업장이 되어버린 정든 일터 앞에서, 하루아침에 삶을 지옥으로 만든 코오롱 과천 본사 앞에서 해고자들은 투쟁을 이어갔다. 경영상의 위기와 무관하게 노동자의 삶을 벼랑으로 내모는 정리해고를 용인할 수 없었고, 돈과 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멈출 수 없었다. 일할 때는 미처 살피지 못했던 비정규직의 현실에 공감하며 연대하고, 길 건너 이웃 공장 KEC의 정리해고 싸움을 ‘내 투쟁’으로 함께해 저지했다. 코오롱정투위는 그렇게 성찰과 연대를 통해 지난한 투쟁의 시간을 더 깊게 채워갔다.

  2011.10.5. 코오롱 주관 국제골프대회가 열리는 천안우정힐스cc앞, 정리해고 철회 기자회견 [출처: 코오롱정투위]

함께 살아가기 위해 기억해야 할 이름, 코오롱

지난 2월 18일, 코오롱 이웅열 회장의 얼굴이 공중파를 장식했다. 2월 17일 경주의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지붕이 붕괴하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참가자 10명이 사망하고 128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리조트를 운영하는 마우나오션개발이 코오롱 법인·이동찬 명예회장·이웅열 회장이 지분을 100% 보유한 코오롱 그룹의 자회사라는 사실이 바로 알려졌고,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참사에 대한 공분이 거세게 일었다. 다음날 새벽 현장으로 내려가 고개 숙여 사죄하며 사과문을 발표하고, 사흘 만에 피해자에 대한 보상 합의를 마치는 기민한 대처로 이웅열 회장은 분노한 여론을 달래고자 했다.

하지만 경영진이 초래한 위기의 희생양으로 정리해고되어 10년째 투쟁 중인 노동자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일축해 온 코오롱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회장까지 나선 발 빠른 사과의 ‘진정성’은 전해질 수 없었다. 이후 사고 관련 상황보고회 자리에서 경주시장은 저비용의 부실한 건물 건축과 안전을 도외시한 운영으로 돈벌이에만 눈이 먼 코오롱에 대해 “도덕성에 문제가 많다.”는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마우나오션리조트 참사와 대응은 매우 단적으로 그러나 총체적으로, 이윤을 위해서는 기업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의식과 ‘사람’마저 손쉽게 저버리는 코오롱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4월 18일에는 코오롱스포츠 한 매장에서 참사를 언급하며 할인 이벤트를 홍보하는 마케팅 문자를 발송해 파문이 일었다. 코오롱스포츠는 트위터를 통해 공식사과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탑승자의 구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순간에 ‘더 늦기 전에 선물하자’는 판촉 문자를 발송한 반인륜적인 상술에 많은 이들이 치를 떨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특히 승승장구했던 코오롱은, 2012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된 이상득 전 의원의 ‘친정’이기도 하다. 1988년 코오롱상사 사장으로 퇴임한 이상득 전 의원에게 코오롱은 고문료 명목으로 19년 이상 매월 수백 만 원씩을 지급해왔다. 의원 시절 보좌진들은 코오롱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고 이명박 정권 시절에는 다수의 코오롱 출신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이웅열 회장은 대기업 회장 중 유일하게 미래기획위원으로 위촉된 바 있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물 사유화와 4대강 수질 개선 등 각종 사업 특혜와 비자금 문제의 중심에도 코오롱이 있다.

한편 각종 공기업과 지자체의 사업 발주에 참여하면서 도모한 불법적인 입찰 담합으로 코오롱이 부과받은 과징금 총액은 무려 130억 원이 넘는다. 와중에 지난해 이웅열 회장은, 지주사인 코오롱이 2년 연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5개 계열사로부터 47억 원의 연봉을 받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며 빈축을 샀다. 30위권 밖의 자산 순위에도 불구하고 100대 기업 중 11위에 해당하는 액수의 연봉을 챙긴 처사가 과도하다는 비판이었다. 재계순위 23위였던 2005년 노동조합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며 정리해고를 강행하고, ‘2010년 재계 10위’를 목표로 선언하며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아온 코오롱의 현재 재계순위는 37위다.

최근 몇 년간 경제지와 보수언론까지 나서 ‘악재·첩첩산중·사면초가·산 너머 산’ 등의 수식어로 코오롱 그룹의 도덕불감증과 경영 쇄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천박한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한국사회에서 비리와 부패로부터 자유로운 기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계속되는 코오롱의 사회적 물의 행보는, 고삐 풀린 탐욕을 견제할 최소한의 브레이크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질화되고 가속화되는 것일 테다. 코오롱이 내세우는 ‘기본과 정도를 통해 모두에게 존경받는 기업’이라는 윤리경영 덕목은 참으로 요원해보이지만, 이제부터라도 기본에서 다시 시작해 정도를 걷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10년째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철회가 되어야 한다.

  2013.4.22. 과천 본사앞에서 열린 코오롱스포츠 불매운동 선포 기자회견 [출처: 민주노총경북본부]

관 짜놓고 시작한 끝장투쟁 천막농성, 10년 투쟁의 마지막 승부수는 코오롱스포츠 불매!

2012년 5월 11일, 코오롱정투위는 끝장투쟁을 선포하고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서 또다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정리해고가 철회되기 전에는 내려가지 않겠다는 최일배 위원장의 결의를 웅변하듯 묵직한 관이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철옹성 같은 자본을 상대로 싸움을 이어오는 동안, 생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많은 동지가 떠났고 15명이 남은 코오롱정투위 내에서도 투쟁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2명이 되었다. 농성 시작 이후 ‘코오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부터는 매주 화요일 저녁 천막 앞에서 문화제를 열었다. 과천 시민들의 연대와 공동투쟁으로 친밀해진 동지들 덕분에 외롭지 않은 농성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자본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7월에는 ‘희망뚜벅이’와 ‘희망광장’을 통해 경계 없는 공동투쟁의 필요성에 공감한 투쟁사업장들이 모여 ‘정리해고·비정규직·노조탄압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을 결성했고 최일배 위원장이 단장을 맡았다. 일상적인 공동투쟁으로 진한 동지애를 나누고, SNS를 통해 코오롱정투위의 투쟁을 알리며 2012년이 흘렀다. ‘끝장투쟁’을 선포한 만큼 조급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초강수의 극한투쟁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자본과 국가의 내성은 갈수록 강해졌고, 미미한 주체 동력으로 할 수 있는 투쟁을 고민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코오롱스포츠에 집중하는 불매운동이다. 코오롱스포츠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2012년 말부터 박찬욱·김지운 등 유명 영화감독을 파트너로 필름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새로운 마케팅으로 이미지 제고를 꾀하며 매출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2013년 4월, 코오롱공대위는 매장 앞 1인 시위와 함께 관악산·북한산 등 서울의 5개 산을 등반하며 부당한 정리해고와 부도덕한 코오롱 자본의 실상을 알리는 ‘코오롱스포츠 불매산행 시즌1’을 시작했다. 10월부터는 시즌2를 기획해 경북 구미의 금오산 등 전국 8개 산을 등반하며 전국적으로 코오롱스포츠 불매를 확산시켰다.

불매산행 시즌1이 진행되던 5월 13일,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에 전국 242개 매장 및 102개 산에서 코오롱제품 불매를 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불매운동 및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가처분신청에는 코오롱 불매와 관련된 선전물의 사용과 배포, 온라인상의 명예 훼손 내용 게시 금지는 물론 ‘나쁜 코오롱·정리해고 기업·박근혜·이상득·MB정권·4대강’ 등의 단어 사용 및 코오롱정투위가 제3자를 대상으로 이러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까지 금지해달라는 내용 등이 담겼다. 그야말로 소가 웃을 어이없는 소송이었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기 위해 타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악의적인 발상이었다. 어지간하면 자본의 손을 들어주는 법원조차 102개 산의 출입금지 부분에 대해서는 황당한 가처분신청이라며 기각했다.

자본의 엽기 소송은 오히려 코오롱스포츠 불매운동을 부각시켰다. 무엇보다 이는 목숨을 건 싸움에도 보이지 않았던, 투쟁에 대한 자본의 ‘반응’이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는 불매운동을 투쟁으로 여기지 않거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의 반복된 결의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기업 노동조합에서 코오롱스포츠 제품을 조합원 선물 목록에 포함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참으로 안타깝고 실은 분노스러운 현실이지만 끊임없이 호소할 수밖에 없고, 코오롱정투위의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마지막 승부수는 이제 코오롱스포츠 불매투쟁일 수밖에 없다.

SNS를 통해 확산되는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으면서 2014년에는 3월부터 불매운동을 통해 코오롱정투위의 10년 투쟁을 알리기 위한 ‘코오롱스포츠 불매 QR코드 100,000 프로젝트’와 함께 불매산행 시즌3를 시작했다. 6월까지 제주 한라산을 포함해 전국 11개 산을 등반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주말마다 진행되는 투쟁에 함께하기 위해 코오롱공대위는 시즌3 일정을 과감히 중단했다. 정리해고 투쟁도 세월호 투쟁도 결국 돈과 힘에 진실이 가려지고 가진 것 없는 자들만 죽어 나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년째 싸우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한 집중투쟁을 폐기하기는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야만을 더해가고 장기투쟁사업장은 더욱 충격적인 ‘새로운 야만’에 가려져 때로는 늘 그렇게 투쟁하는 배경인 양 뒷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밖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보이는 투쟁의 시간도 언제나 당연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코오롱정투위의 10년 투쟁은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결의와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한편,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제는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2014.8.18. 시작되는 코오롱스포츠 전국 매장 앞 1인 시위 및 주요도시 불매 캠페인 웹자보 [출처: 민주노총]

코오롱정투위는 8월 18일 청담동 코오롱 플래그십스토어 매장 앞 "코오롱 정리해고 철회 및 원직복직 쟁취를 위한 코오롱스포츠 전국 매장 앞 1인 시위 및 주요도시 불매 캠페인 선포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새롭게 집중투쟁을 시작한다. 코오롱스포츠 불매운동의 여파를 실질적 매출 타격으로 전화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전국 주요 도시 매장 앞에서 진행하는 1인시위다. 단 한 달의 집중 불매투쟁이, 장동건과 탕웨이를 내세운 코오롱스포츠의 매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80만 민주노총 조합원과 코오롱정투위의 투쟁을 지지하는 수많은 마음들이 모인다면, 부도덕한 자본에 대한 공분을 일깨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코오롱정투위 동지들의 10년 투쟁이 기적 같은 승리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이번에는 꼭 함께 마음을 모으고 직접 몸을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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