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의 시간은 다른 곳에 있다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코오롱 정리해고 10년, 3,650인의 화답’ 문화제

12월 13일 토요일. 웬일로 아침 일곱 시에 눈이 떠졌다. 버릇대로 머리맡 손전화를 더듬더듬 찾아 SNS에 접속해 보았다. 그리고 고동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린 짤막한 한 줄을 읽었다.

긴급> 쌍차 해고자 이창근 김정욱 동지가 공장 안 70m 굴뚝 고공농성에 돌입했습니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새로운 고공농성이 오늘로 1일째를 맞게 된 것이다. 게다가 오늘 낮 3시에는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아마 오늘이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정투위) 위원장이 단식을 시작한 지 39일째일 것이다.

고동민 해고노동자의 페이스북 담벼락엔 새로운 소식들이 속속 올라왔다. 고공농성장이 된 굴뚝 밑에 천막을 치니 웬 사복 입은 남정네들이 우르르 몰려와 죄다 걷어치웠고 그들에게 맞서던 고동민과 김성진 쌍차 해고노동자는 평택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했다. 이창근 해고노동자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았다. 굴뚝 밑에는 매트리스가 깔리고 경찰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고 했다.

날짜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씨앤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5미터 위 전광판에 올라간 지 한 달째다. 스타케미칼 차광호 해고노동자가 100미터 위 굴뚝에 올라간 지 200일째다. 5년째 싸우고 있는 한남운수 이병삼 해고노동자가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40일이 넘었다.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은 2005년 2월부터 지금껏 10년을 싸웠고 최 위원장의 단식농성도 어느 새 39일째가 되었다. 콜트 콜텍 노동자들의 싸움도 어느덧 3,000일 가까이 이르렀고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철야농성을 시작한 지도 곧 일 년이 된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70미터 위 굴뚝으로 올라간 지 오늘로 1일째가 되었다. 해고노동자들의 시간은 일터나 집이 아닌 추운 곳이나 높은 곳, 밥 없는 곳에서 헤아려지고 있었다.

당장 평택으로 달려가야 하나, 아니면 잠들기 전까지 마음먹었던 대로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나. 차마 저울질할 수 없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저울질하고 있는데 고동민 해고노동자가 ‘평택으로 오기 보다는 과천으로 가서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의 손을 잡아 달라’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았다. 그리고 마음을 굳혔다.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열린 ‘코오롱 정리해고 10년, 3,650인의 화답’ 기자회견

몇 시간 뒤, 나는 정부과천청사 지하철 역 출구를 나서고 있었다. 바람이 거푸 두 뺨을 후려갈기니 금세 얼굴이 얼얼해졌다.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었다. 경찰들을 먼저 찾으니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규직 과보호가 아니라 재벌 과보호다! 우리는 일하고 싶다! 코오롱 “정리해고 10년, 3,650인의 화답”>

긴 문장이 적힌 기다란 현수막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영상을 찍는 사람들과 기자처럼 보이는 이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방패를 앞세운 경찰들은 청사 입구에 버티고 서서 벽을 만들고 있었다.

쌍차 해고노동자의 아내 권지영 씨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몇몇 사업장에서도 한 명씩 나와서 자신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했다. 해고와 투쟁. 눈물과 분노. 누가 더 오래 파업하나 내기라도 하고 있는 듯한 얄궂은 현실들. 아마 기자회견을 수백 번 수천 번 한들 그 많은 사연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쌍차 해고노동자의 아내는 한겨울 꼭두새벽에 하늘 위로 올라간 두 노동자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며 자꾸 울먹였다.

  코오롱 본사 앞으로 이동한 사람들

사람들은 ‘코오롱 OUT’이라 적힌 노란 깃발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다들 코오롱 본사가 있는 네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경찰들 한 무리가 금세 뒤따라갔다. 지하철 역 주변과 코오롱 본사 주위에는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응원 현수막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역 주변과 코오롱 본사 주위에 걸린 응원 현수막들

‘이번에는 코오롱 노동자들이 꼭 일터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코오롱은 78명의 노동자를 부당하게 정리해고한 나쁜 기업입니다.’
‘괴물 코오롱이 사람 코오롱 될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지치지 마시고 빠이팅! 하셨음 좋겠습니다.’
‘최일배 위원장님~ 지치지 마시고 몸과 마음 잘 살피셔야 합니다’
‘자본가 없는 세상, 그날까지!’
‘경영진의 부실경영, 노동자만 정리해고, 코오롱은 부당해고 철회하라!’
‘남의 목숨줄 끊고 잘 살 줄 알았냐. 언젠가 후환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끝까지 함께 싸울 것이다!’
‘의지로 이어 온 코오롱 투쟁 10년을 응원합니다. 모르고 지낸 시간이 길었지만 마지막에는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끝까지 곁을 지키겠습니다.’
‘참 징하네요. 코오롱, 돈만 아는 저질!’
‘정리해고로 10년간 투쟁하신 분들의 목소리를 지금이라도 들으세요!’


괴물처럼 커다란 몸집으로 도사리고 앉은 코오롱 본사 건물 앞에 최일배 위원장이 단식농성을 이어 가고 있는 천막이 있었다. 천막에는 ‘단식농성 39일차’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39’는 한 자리씩 종이에 써서 붙인 숫자였다. 오늘 밤이 지나면 저 숫자는 ‘40’이 될 것이다.


  코오롱 본사 앞 천막농성장

노란 깃발을 든 사람들은 코오롱 본사 앞을 지나 차도를 따라 행진해 나갔다. 기륭전자 윤종희 조합원이 마이크를 쥐고 구호를 외치자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며 따라 외쳤다.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 박살내자!”
“노동자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아 보자!”


  과천 시내를 행진하는 사람들

네 시를 넘기니 땅에 깔린 햇빛이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사람들은 중앙공원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서는 다시 코오롱 본사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호를 외치며 걷다 보니 어느 새 코오롱 본사 뒤편에 이르렀다. 본사 건물로 들어가는 길목을 경찰들 한 무리가 막고 있었다. 행진은 그곳에서 마무리되었다.

주변에 내걸린 응원 현수막에 사람들은 ‘코오롱 OUT’ 깃발들을 꽂아 놓았다. 누군가가 ‘지금 현재 최일배 위원장은 몸 상태가 나빠져 도저히 면회를 할 수가 없으니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건 삼가 달라’고 외쳤다. 대신 사람들은 천막 앞에 펼쳐져 한창 그려지고 있는 걸개그림을 구경하러 갔다.

정부과천청사 역 입구 곁에 세워진 무대 위에서는 저녁 6시부터 열릴 문화제 ‘여는 공연’을 위해 꽃다지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는가 싶던 해는 화장실 한 번 다녀오자 어디로 숨었는지 온 세상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사람들은 빈민 단체에서 준비했다는 밥과 반찬을 여기저기 놓인 탁자 위에 올려놓고 여럿이 둘러서서 먹었다. 지독한 추위에 손을 주머니 밖으로 꺼내기조차 싫어 끼니를 거를까 했지만 결국 뭐라도 뱃속에 넣어야 견디겠다는 생각에 밥 냄새 나는 쪽으로 가서 콩나물 국밥과 돼지고기 볶음을 받아 왔다. 밥 천천히 드시고 오시라는 꽃다지 정윤경 씨의 목소리가 들리고 노래와 연주가 시작되자 밥 먹던 사람들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한데 어울렸다.

뜨끈한 국물을 마시자 입안과 뱃속이 따스해지며 온몸에 더운 기운이 돌았다.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지만 무엇을 위해서 이런 날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사방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속도 뱃속처럼 따뜻해졌다.

꽃다지 공연이 끝난 뒤 기륭전자 김소연 조합원이 무대에 올라 사회를 보았다. 백기완 선생이 마이크를 쥐고, 이 땅의 노동자들은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막에서 못 나올 듯하던 최일배 위원장도 무대에 올라와, 10년 싸움을 올해 안으로 끝낼 수 있도록 한 번만 더 힘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코오롱 정투위 노동자들도 무대에 섰다. 10년 전 코오롱에서 쫓겨나고 나서도 끝까지 남아 지금껏 싸워 온 노동자들이었다.

  문화제에 모여든 사람들

  발언하고 있는 백기완 선생

  최일배 위원장과 코오롱 노동자들

앉은 자리에서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눈길이 가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있는 커다란 코오롱 본사 건물 벽 위로 ‘코오롱 불매’를 뜻하는 그림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이름표를 단 것 같은 코오롱 본사 건물이 이제는 괴물 같기는커녕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코오롱 본사 건물 외벽을 비춘 ‘코오롱 불매’

과천 주민들도 무대 위로 올라와 노래를 부르고 타악기를 연주했다. 몸짓패 ‘선언’과 콜트 콜텍 노동자들이 만든 밴드 ‘콜밴’이 보여 준 공연은 사람들의 몸을 들썩들썩 움직이게 했다. 사회를 보던 김소연 조합원은, 하늘 위로 쌍차 노동자들이 올라갔고 최일배 동지가 단식 중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즐겁게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소연 조합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은 꼭 같이 즐거워 보였다.

  과천 무지개학교 학생들의 타악기 공연

  콜트 콜텍 노동자 밴드 ‘콜밴’의 공연

풍물패 ‘살판’이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코오롱 본사 앞으로 갔다. 사람들은 손에 자그마한 폭죽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쌀알 같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겼다. 천막이 열리자 벽에 기대앉은 최일배 위원장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한겨울 밤하늘에 사람들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코오롱 본사 앞에서 손폭죽을 들고 있는 사람들

그것으로 오늘 <코오롱 정리해고 10년, 3,650인의 화답>은 모두 끝났다.

집에 들어오니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약이 다 닳아 꺼졌던 손전화에 충전기를 꽂아 놓고 나서 컴퓨터를 켰다. 쌍차 고동민 김성진 해고노동자는 결국 유치장에 갇혔고, 김정욱 이창근 해고노동자는 굴뚝 위에서 잘 버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쌍차 해고노동자들 가운데서 26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인터넷 언론사들을 쭉 훑어보니 송경동 시인의 ‘긴급 기고’가 일제히 올라와 있었다. 쌍차 노동자들의 세 번째 고공농성을 보며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송 시인의 절절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 나도 오늘 보고들은 것으로 뭔가를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 동틀 무렵까지 끙끙대다가 결국 한 줄도 못 쓰고 잠들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2월 14일 일요일 밤, 조금 전에 아홉시가 되었다. 간밤에 나는 글 같지도 않은 것들을 썼다 지웠다 되풀이하며 이런 걸 쓰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었다. 너무 추워 손마디가 오그라들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나는 방 안에서 몸을 녹이며 무엇을 어떻게 글로 쓰면 좋을지 머리만 굴리고 있었지만 그 시간에 누군가는 어지럼증과 배 아픔에 시달리며 단식을 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까마득한 하늘 위로 올라가 개 같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과 농성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의 차이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처럼 크게 느껴졌다.

글줄이나마 쓰는 재주가 있으니 뭔가를 써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중얼중얼 늘어놓을 말들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었겠지만 그딴 식으로 노동자가 어떠니 투쟁이 어떠니 희떠운 소리들이나 주워섬길 거라면 차라리 입 닫고 조용히 있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요일 느지막하게 일어나 다시금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생각을 바꿨다. 어제 있었던 코오롱 기자회견과 문화제를 다룬 기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추운 겨울에 천막 안에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밥을 굶고 있는데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얼굴에 철판을 뒤집어쓰고 무작정 쓰기 시작한 것이 이 글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오늘 오후쯤 몇몇 인터넷 언론사에 코오롱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무척 추웠던 어제 과천까지 와서 취재해 간 기자님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한다.)

낮에 잠깐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희끄무레한 하늘에서 흰 점들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흰 점은 씨알 굵은 함박눈이 되어 바람을 타고 사방에 들이부어졌다. 목 뒤에 달린 머리덮개를 얼른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을 치다가 얼마 못 가 문득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이 눈과 이 추위는 나보다 노동자들이 먼저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눈은 지금 굴뚝 위에서 쌍차 자본과, 그리고 스스로와 싸우고 있을 이창근 김정욱 해고노동자들이 나보다 70미터만큼 더 먼저 알았을 것이다. 스타케미칼 차광호 해고노동자는 나보다 200미터 먼저, 씨앤엠 노동자들은 나보다 25미터 먼저 알았을 것이다. 눈과 함께 몰아치는 추위는 천막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을 코오롱 최일배 위원장이, 한남운수 이병삼 해고노동자가 나보다 먼저, 살갗으로, 손끝과 발끝으로 알았을 것이다. 눈은 세상 어디에도 똑같이 내리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얀 눈이 펄펄 날리는 거리 어딘가에서 캐롤 음악이 들려오고, 씽씽 지나는 차들은 그 어떤 인연을 맺을 틈도 주지 않고 내 옆을 지나쳐 갔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 얼굴로 바삐 걸어갔다. 나는 길바닥에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서 나의 시간과는 다른 노동자들의 시간이란 것을 생각했다. 해고노동자들의 시간은 일터나 집이 아닌 추운 곳이나 높은 곳, 밥 없는 곳에서 헤아려지고 있었다.

삶이 힘겨워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저 하얀 색깔의 눈송이는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닐까. 차라리 새까만 눈이 펄펄 내려 온 세상을 까맣게 파묻어 버린다면, 죽음도 폭력도 상처도 모두 시커멓게 지워져 버린다면 노동자들이 겪은 고통에 조금이라도 보상이 될까.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기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어서 집에 들어가 쓰다 만 글을 마저 써야 했다.

입으로는 어제 코오롱 문화제에서 꽃다지가 부른 노래를 흥얼거렸다.

언제나 당신에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 커지고 맑아져
그대 좋은 벗 될 수 있도록


아, 나는 이 노랫말처럼 정말 노동자들의 좋은 벗이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코오롱 최일배 위원장은 몸 상태가 몹시 나빠져 지금 병원에 누워 있다. 내일, 12월 15일이면 단식 41일째다. 그리고 또 내일이 되면,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차광호 굴뚝 고공농성 203일째,
씨앤엠 비정규직 노동자 강성덕 임정균 전광판 고공농성 34일째,
한남운수 해고노동자 이병삼 천막농성 45일째,
기륭전자분회 철야농성 351일째,
콜트 콜텍 해고노동자 투쟁 2,876일째,
쌍차 해고노동자 김정욱 이창근 굴뚝 고공농성 3일째.
(그리고 여기에 적지 않은 노동자들의 싸움까지.)
숫자들이 벌레처럼 징그럽고 끔찍하다. 그러나 저 숫자들이야 말로 노동자들의 시간이고 삶이다. 나의 시간은, 그리고 우리의 시간은 저 노동자들의 시간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아마 답은 거리에 있을 것이다.

  최일배 코오롱 정투위 위원장

[성명서]

십 년의 투쟁, 사십 일이 넘은 단식.
목숨을 태우는 정리해고, 코오롱 이웅열 회장이 해결해야 합니다.
12월 27일, 다시 한 번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서 만납시다!


지난 11월 5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해 12월 14일로 40일차를 맞은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이하 코오롱정투위) 최일배 위원장이, 오전 9시 30분 경 의식을 잃고 쓰려져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되었습니다. 단식 30일차를 넘기며 울렁거림 등 몸의 이상이 지속됐고 며칠 전부터는 혈당이 급격히 떨어져 검진을 담당하던 한의사가 병원행을 권했지만 거부하던 상황이었습니다. 12월 13일 최일배 정투위원장을 검진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의사 역시 혈당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울렁거림이 한계에 달해 병원에 가야한다 했지만 그대로 버티겠다며 천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단식투쟁 39일차였던 12월 13일, 곡기를 끊고 한뎃잠을 자며 싸우는 최일배 정투위원장과 코오롱정투위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겠다는 이들이 모였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유로 정리해고를 단행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고, 가족이라 부르던 노동자 78명의 삶을 한순간에 수렁으로 빠뜨린 코오롱 이웅열 회장이 이제는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지만, 10년째 싸우면서도 ‘아무 상관없는,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외면 받는 코오롱정투위 노동자들의 쓰라린 투쟁에는 정부와 기업만이 아니라 그동안 외면했던 우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투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겠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정리해고 10년, 3,650인의 화답’을 진행했습니다.

최일배 정투위원장은 이날을 기다렸습니다. 지난한 10년 투쟁을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은 한 사람이라도 더 모여 코오롱정투위의 투쟁에 힘을 보태고 정리해고 기업 코오롱이 책임지도록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2년 5월, ‘끝장투쟁’을 선언하고 과천에 농성천막을 치고도 투쟁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미안하다고 일주일에 한 번 문화제조차 잡지 않았던 최일배 정투위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39일을 굶은 빈 몸으로 무대에 선 최일배 정투위원장은, ‘염치없지만’ 12월 27일에는 1만 명이 모여 코오롱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함께 해달라고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아무리 높은 결의와 강고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한파가 몰아닥친 겨울 단식 한 달이 넘으면, 그 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최일배 정투위원장은 12월 13일 ‘3,650인의 화답’을 기대하며 39일의 단식을 이 악물고 견뎌냈고, 우리들의 화답은 이제야 시작되었습니다.

최일배 정투위원장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12월 14일 아침, 쓰러진 그를 살려야겠기에 구급차로 이송했지만 병원으로 옮겨져 의식을 회복한 그가 힘겹게 내뱉은 한 마디는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을 넘기면서는 하루가 열흘처럼 느껴진다는 단식입니다. 그러나 단식은 십 년을 싸워온 최일배 정투위원장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입니다. 40일째 곡기를 끊은 이 순간에도 가장 깊은 고민과 고통을 끌어안고 사투를 벌이는 것은, 그가 무모한 고집쟁이여서가 아니라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10년의 투쟁을 이제는 끝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지켜보며 가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걱정과 염려가 너무나 큽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까움을 연대로, 한숨을 힘으로 바꿔내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힘을, 연대의 힘을 믿습니다. 10년을 싸운 노동자가 또 다시 제 몸을 태우며 투쟁해야 하는 비극의 모든 책임이 코오롱 자본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12월 27일 다시 모일 것입니다. 간곡히 호소합니다. 12월 27일, 10년을 바치고도 남은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최일배 정투위원장과 코오롱정투위 노동자들과 함께합시다!

2014년 12월 14일
코오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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