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시기에, 그리고 독립적으로, 불평등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다룬 세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이 중 두 권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 시작하며, 나머지 한 권(내 책)은 중농주의(Physiocrats) 또는 계몽주의 시대에서 출발한다. 내 책 『불평등의 비전』(Visions of Inequality)은 2023년 10월에 출간되었고, 다린 맥마흔(Darrin McMahon)의 『평등: 잡히지 않는 개념』(Equality: An Elusive Idea)은 한 달 뒤 출간되었으며, 데이비드 레이 윌리엄스의 『모든 재앙 중에서 가장 큰 재앙: 플라톤에서 마르크스까지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 사상에 미친 영향』(The Greatest of All Plagues)은 2024년 9월에 나왔다. 나는 출간 직전까지 이 두 책의 존재를 몰랐다가, 맥마흔의 원고를 받아보고 이후 윌리엄스의 책을 접했다.
세 책은 역사 속 불평등을 연구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 맥마흔과 윌리엄스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정치적, 더 나아가 정치철학적 또는 도덕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플라톤, 복음서, 루소처럼 불평등에 대해 강한 규범적 입장을 가진 사상가들이 다뤄지며, 맥마흔의 경우 존 롤스(Rawls)까지 포함된다. 반면, 『불평등의 비전』은 철저히 경제적 관점에서 불평등을 바라보며, 다양한 사상가들이 소득 분배를 결정하는 힘이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탐구한다. 나는 명시적으로 규범적 접근을 배제했다.
그런데도, 계몽주의 이후 시기에서는 다루는 인물들이 상당 부분 겹친다. 책 세 권 모두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를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불평등의 비전』과 『모든 재앙 중에서 가장 큰 재앙』에서 마르크스를 다룬 장이 가장 길다. 나는 이미 맥마흔의 뛰어난 책을 리뷰한 바 있다(링크 참조). 이제 윌리엄스의 또 다른 훌륭한 책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나는 두 책을 연달아 읽어보길 추천한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지만 서로 대체재가 아니다. 오히려 보완적인 성격을 띠며, 동일한 사상가들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 맥마흔은 더 정치적 관점에서, 윌리엄스는 더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두 책 모두 그리스 철학자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지만, 맥마흔은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운동까지 포함하는 반면, 윌리엄스는 마르크스를 마지막으로 다룬다.
플라톤에서 루소, 그리고 마르크스로
윌리엄스는 불평등을 반대한 두 인물, 아테네의 솔론과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로 책을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불평등에 반대했지만, 방식은 달랐다. 리쿠르고스는 사실상 스파르타 내에서 불평등을 완전히 제거했지만, 솔론은 계급 타협을 이루는 선에서 그쳤다. 이후 윌리엄스는 플라톤으로 넘어가, 그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두 개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다룬다. 플라톤으로 돌아가는 것은 책 전체적으로 중요한 장점이 되는데, 이는 루소,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미스를 논할 때도 이들 사상가 사이의 분명한 유사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루소를 다룬 장이다. 윌리엄스는 루소의 불평등 비판을 가장 강렬한 문장들로 정리했다. 루소의 저서를 통째로 읽으면 그의 불평등 비판이 이처럼 강렬하게 연속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윌리엄스가 구성한 장을 읽고 나면, 독자는 루소가 완전한 평등에서 벗어나는 모든 형태의 사회를 맹렬히 공격했다는 점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평등주의자였을까?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를 평등주의 경제학자 및 철학자로 보는 시각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나는 윌리엄스와 이 문제에 대해 약간 논의한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평등의 비전』(그리고 여기에 쓴 글 포함)에서 나는 마르크스를 평등주의적 사상가로 보지 않는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은 궁극적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노예제하에서의 ‘정치적 평등’ 논의와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평등이라는 구호는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동원하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언제나 계급 철폐였다. 이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면, 윌리엄스는 다른 접근을 취한다. 그는 마르크스를 평등주의적 사상가로 해석하는데, 그 근거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이 빈곤층과 부유층 모두에게 도덕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불평등은 양측 모두를 타락시킨다. 이러한 해석은 마르크스를 루소와 플라톤과 같은 전통 속에 위치시킨다.
불평등이 인간을 타락시키다
불평등이 초래하는 도덕적 부패는 윌리엄스가 책 전반에서 강조하는 핵심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조로운 노동에 종일 매달리며, 최소한의 생존(먹고, 마시고, 자고, 번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사실상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노동 분업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따른다.
노동 분업과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사고할 여유를 빼앗는다. 결국 노동자들은 지적으로 무뎌지고, 신체적으로 피폐해진다. 노동 분업은 노동자가 오직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 그 외의 다른 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능하게 만든다.
한편, 부유층도 타락에서 예외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자들의 전통을 계승하며, 부의 축적이 부자들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분석했다. 부자들은 자신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다른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스미스 역시 부가 허영심을 거쳐 결국 자만심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며, 이는 루소의 ‘자애(self-love)’ 개념과도 연결된다.
결국,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타락은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윌리엄스는 이를 통해 마르크스를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라, 불평등의 도덕적 폐해를 철저히 분석한 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플라톤에게 ‘플레오넥시아’(pleonexia, 끝없는 탐욕)는 영혼의 문제이지만,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사회 체제가 만들어낸 문제다. 윌리엄스가 ‘프로이센 경제학자’라고 부르는 마르크스가 그리스 사상가들과 갈라지는 지점은, 탐욕이라는 개인적 결함을 자본주의 체제가 조장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개인의 악덕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도덕적 결함을 오히려 찬양하는 사회 시스템을 향하고 있다. 윌리엄스는 이렇게 쓴다.
“그래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밀 등이 한탄했던 성격적 결함이, 부르주아적 관점에서는 필수적이며 심지어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The Greatest of All Plagues, p. 288)
윌리엄스는 칸트의 현상(phenomenal)과 본체(noumenal)의 구분을 적용하여, 마르크스가 탐욕을 개인의 선택이 아닌 외부적 힘에 의해 결정되는 현상적 문제로 본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인은 탐욕을 멈출 수 없다. 탐욕을 버리면 기업이 무너지고, 주주들을 실망하게 하며, 권력에서 쫓겨나 결국 사회에서 잊히고, 외롭게, 고통 속에서, 가난하게 삶을 마감한다. 시스템이 성장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자본가가 탐욕을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단순히 빈곤층에게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론』 1권의 절반 이상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시스템의 혜택을 보는 부유층에게도 파괴적이라고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탐욕을 단순히 필수가 아니라, 이성적 합리성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마르크스는 불평등 자체에 관심이 없었을까?
내가 처음 제기한 논점으로 돌아가 보면, 마르크스에 대한 두 가지 주장—첫째, 마르크스는 우리가 오늘날 연구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불평등을 줄이는 것에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그에 따른 점진적 개혁 정책에도 무관심했다는 점. 둘째,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플레오넥시아를 요구하며, 그 결과 빈곤층과 부유층 모두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시스템이라는 점—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충분히 조화될 수 있다고 본다.
PS: 마르크스와 스미스가 AI를 본다면?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노동 분업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오늘날 인공지능(AI)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해진다.
한편으로 AI는 ‘캐셔 효과(cashier effect)’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거나 개발도상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덜 발달한 경제에서 계산원이 나름의 지적 노동을 수행한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사칙연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전자 결제가 확산하면서 계산원의 역할이 단순히 제품을 포장하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노동의 대규모 탈숙련화(de-skilling)를 의미한다.
반면, AI는 ‘회계사 효과(accountant effect)’를 통해 사람들을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에서 해방할 수도 있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지루한 계산을 처리함으로써, 인간이 더 지적이거나 신체적으로 도전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출처] Poison for the soul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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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