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세력의 중국(인) 혐오 선동... 광장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터뷰: 화교·화예 당사자 활동가의 경험과 고민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선고가 멀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호하는 극우세력의 결집은 여전히 거세다. 혐오 정치에 기대어 집권하고 세를 키운 이들은 중국인, 화교들을 희생양 삼아 내란의 책임을 회피하려 혐오와 차별의 불씨를 키우고 물리적 폭력까지 자행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광장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화교, 화예 당사자이자 차별과 혐오에 맞서 분투하고 있는 활동가들이기도 한 이원과 윤우, 두 사람을 만나서 고민을 나누었다. 

이원은 대만 국적의 화교 3세로 국내외 평단의 주목을 받는 공연예술가로 일해오다 현재는 '모두의 결혼'에서 혼인 평등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윤우는 대만 국적의 화교였던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한 운동선수였고 지금은 HIV/AIDS인권행동 알에서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왔다. 

광장에서 윤우.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촬영 류민희)

윤우 "저는 화교 자녀이고 한국에서 태어나서 줄곧 한국에서 자랐어요. 한국 국적이고요. 어머니가 대만 국적의 화교셨어요. 엄마와 이모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서 생활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이모는 한국에서 운동 선수로도 활동을 했었고요.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와 결혼하신 후 저를 낳았고, 지금은 귀화하셨어요."

"엄마와 이모가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잘 알고 있지는 못해요. 어머니는 제가 본인들이 받았던 차별을 다시 겪게 될까 걱정이 많으셨어요. 저를 완전한 한국인으로 자라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죠. 제가 조금이라도 대만이나 중국에 관심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대만이나 중국으로는 되도록 여행도 못 가게 하셨고, 중국어도 가르치지 않으셨고요. 대만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가능한  멀리했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저를 교육하셨어요." 

"가족들이 경험한 삶과 이주의 경로들이 있을 텐데, 제가 명확하게 설명을 드리기가 어려워요. 저에게 들려주시질 않았어요. 그런 것들이 늘 궁금하기도 했고, 저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오기도 했었어요." 

"네 살때부터 운동을 했어요. 국가대표이기도 했고 은퇴 후 지금은 HIV/AIDS인권행동 알 인권팀과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등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감염인 노동자에 대한 침해 대응과 진료 거부나 의료 차별에 대해서도 대응을 하고 있고요. 잘 알려진 전파 매개 행위죄에 대한 폐지 운동도 하고 있어요. 감염인도 비감염인도 차별 없이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원 "저는 대만 국적의 화교 3세이고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대만과 한국 모두 속지주의가 아닌 속인주의 국가여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대만 국적을 갖게 되었죠."

"제 증조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같이 한국으로 넘어오셨다고 알고 있어요. 한국에서 일제 강점기, 6.25 전쟁을 모두 겪으셨고요. 저는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저희 집안은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6.25 전쟁 때 대구로 옮겨 살았다고 전해 들었어요." 

"동아시아의 근현대사가 되게 복잡하잖요. 아버지 쪽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주물 공장을 운영하다가 1920~30년대에 한국으로 아예 이주하신 걸로 알아요. 어머니 쪽도 육로로 개성 지역을 오가며 비단 무역 등을 하다가 지금의 북한 지역으로 이주하셨다고 들었어요. 원래 그분들이 온 곳을 따지자면 중국 대륙,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이주를 하신 거였고, 당시에는 지금 대만의 뿌리인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였죠. 한국에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에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어떻게 보면 나라가 이사를 갔달까요. 그래서 저희 집안의 경우 따지자면 사실 대만 땅을 밟아보지 않고, 지금 대만이라고 불리는 나라의 국적을 가지게 된 거예요. 그리고 3대째 한국에 살고 있으면서, 그 국적이 대물림되고 있고요." 

"한국에도 대만 교과 과정으로 수업하는 화교 학교가 있는데, 부모님께서는 저를 그 학교에 보내지 않고, 동네 일반 학교에 보냈었어요. 화교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물려주지 않겠다고까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계속 잘 살아갈 방법을 더 도모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 잠깐 집안일로 중국에 가서 짧게 살다가 돌아왔어요. 그 이후에는 화교 학교에 다니면서 대만과 중국을 몇 번 왔다 갔다 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한국에서 태어나서 거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자라고 생활해 왔죠. 저는 스물네 살 즈음까지 5년마다 갱신을 하는 거주 비자를 가지고 있었고, 2012년에 영주권을 신청해서 받았어요." 

"한 10년 정도 가장 오래 가졌었던 직업은 연극 연출가였어요. 연극과 미술의 경계에 있는 개인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 일종의 공연예술 일을 하던 사람이었죠. 삶과 사회에 대한 경험과 고민들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제 형식으로, 그릇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계속하던 사람이다 보니까 성소수자 문제나 노동 문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주제들을 자주 다루는 사람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어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늘 (사회운동과 작업이)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모두의 결혼'에서 혼인 평등 실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비상계엄 이후 윤석열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극우 세력들은 연일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 선동을 쏟아내고 있다. 헌법재판관과 기자, 연예인, 광장에 나선 시민들의 국적을 검열하고 '화교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한국인', 한국사회의 '시민'인 동시에 '화교', '화예' 당사자이자 차별에 저항하는 활동가로서 윤우와 이원의 고민도 깊었다. 두 사람은 현 상황에서 무엇을 감각하고 있을까. 이 혐오 선동의 뿌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이원 "저는 처음에 중국이 부정선거에 개입하고 한국을 식민지 삼으려고 한다는 식의 주장들이 너무 터무니가 없는 말이다 보니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계엄이 정당했고 그래서 탄핵에 반대한다는 이야기 자체도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금방 묻힐 것으로 여겼어요. 그런데 이 근거없는 두 가지 주장들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계속 몸집이 불어나고 있다는 게 너무 황당해요."  

"한국사회에서 화교들은, 어떻게 보면 거의 없는 존재 취급 당하기도 했었어요. '짱깨' 혹은 '섬짱깨'  이런 소리나 들어왔는데, 살면서 화교라는 어휘 자체를 이렇게 많이 듣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어떤 헌법재판관도 중국인이다, 연예인 누구누구도 화교다, 이런 말들이 퍼지는데 걱정이 많아요." 

"과거에는 '중국인들은 시끄럽다'라던가 '중국인들은 더럽다'라는 식의 어떤 편견과 혐오에 기반해 '중국인'의 특성을 차별적으로 규정하는 식의 사회적 낙인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에는 아예 '중국인이다', '화교다'라는 것 자체가 욕이 되어버렸어요. 무언가 혐오와 차별이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특정한 국적이나 이주민의 정체성을 일컫는 그 말 자체에 욕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북한을 상대로 한 반공, 종북 프레임이라는 게 이제 더 이상 현실적으로 유효하지도 않고 힘을 얻지 못하니, 국가적 규모의 공산당 체제를 갖춘 중국을 두고 뭔가 계속 이상한 소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은데, 뭐랄까요, 아직 정확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데 터무니가 없죠." 

"우려와 걱정들, 어떤 부정적인 감정들은 올라오는데 이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아직 정리되진 않은 것 같아요. 여기에서 굳이 중국과 대만 등을 나누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논리대로 단순히 '공산당이 싫다'라면은 도대체 왜 모든 화교들을, 그 국가의 정치 체제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까지 다 싸잡아 혐오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주민들을 '중국인'이라는 규정 아래, 폭행하는 일까지 일어난다는 게 너무 우려스러워요. 저는 활동을 하면서 중국이나 홍콩, 대만 등에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어 해외 취업을 하고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친구들도 몇몇 알고 있어요. 혐오를 선동하는 극우세력들은 중국이라는 국가와 중국 사람들, 시민들에 대한 분리가 전혀 안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극우세력들이 파쇼들이 일당 독재를 하는 중국 공산당보다 더 독재적이고 파쇼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나, 이런 생각을 산발적으로 하고 있어요." 

"사실에 기반한 공포를 키우는 측면도 있죠. 티벳을 탄압하고, 위구르 사람들을 강제 구금하고 홍콩과 대만의 사회운동을 억압하는 등 중국 정부가 벌인 일들을 보면서 비인간적이고 이상하다는 감각들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중국 공산당 정부의 억압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중국과 동아시아 민중들과 연대하고,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중국 국가와 정부, 시민들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서 욕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요."  

윤우 "극우 세력들의 퍼뜨리는 '빨갱이', '간첩'에 대한 공포는 원래 북한을 핵심 공격 대상으로 두었었죠. 그 이야기들이 과거처럼 힘을 갖지 못하면서, 윤석열 씨도 계엄을 정당화하기 위한 부정선거 음모론에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극우 세력들은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그것을 활용해서 더 큰 자극들을 만들어내고 부채질하고 있고요." 

"사회심리적으로 봤을 때 너무 지금 일그러지고 왜곡된 영웅 심리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중국인들을 비롯해 이주민들, 성소수자들 등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양삼아 계엄을 정당화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옳았다, 내가 윤석열 대통령을 지킨다, 내가 애국시민이고 영웅이라는 서사를 쌓아가고 있다고 느껴져요." 

"극우 세력들은 중국인에 대한 혐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들, 성소수자들 등에 대한 혐오를 연결해서 키워나가고 있어요. 최근 제가 활동하는 HIV/AIDS인권행동 알 트위터에도 오성홍기를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고 중국어로 트윗을 남긴 분이 있어요. 이 사람의 논리는 '너희는 친중 빨갱이니까 중국어로 적어야 말을 알아듣지' 이런 것 같아요. 그런 극우세력들이 요즘 탄핵 반대 집회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들이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함께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죠. 트위터에서도 저희 단체들이 정말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있고요. 이런 복합적인 혐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요." 

혐오와 차별은 언어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의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추세다. 비상계엄 후 중국인, 화교들이 한국사회 일상에서 마주하는 공포와 폭력들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이원 "제 경우에는 겉으로 (화교인 것이) 표가 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 동아시아 사람들이고 외모도 큰 차이도 없고, 말할 때도 티가 안 나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한 폭력들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이나 대만 친구 중에서 조금 더 말할 때 발음 같은 것들이 차이가 나는 친구들의 경우 어떤 일들을 겪을지 걱정이 돼요." 

"한강진에서 집회할 때도 그렇고, 광화문에서도 극우 세력의 집회와 퇴진 요구 집회 공간이 닿아있게 되는 상황들이 있잖아요. 한강진 등에서는 극우 세력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면서 중국인인지 아닌지를 검열하겠다고 나서는 일들도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저와 친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걱정이 들기도 했어요." 

윤우 "사실 우리가 집회를 하고 있는 장소들이 누군가에게는 관광지잖아요. 중국인들이 많이 여행을 오고, 함께 여행을 온 친구들과 거리에서 중국어, 만다린어 등을 사용하면서 노출이 될 텐데, 이들이 극우 세력들과 맞닥뜨려서 겪을 상황도 걱정이 되어요. 물리적인 폭행까지는 아니더라도, 극우들이 집회 현장에서 혐오 표현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일지 우려가 커요. 지난 집회에서는 세종호텔까지 행진하면서 명동에서 여행을 온 여러 중국인을 보았는데, 극우 세력들이 그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노 차이나(No China)' 라고 적힌 피켓을 들거나 윽박지르는 것도 봤어요. 극우 혐오세력들이 조성하는 공포감과 거리의 크고 작은 폭력들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에 여행을 온 중국인들, 이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정말 걱정이 돼요." 

"저는 그런 소식들을 접할 때 이원에 대한 걱정도 되어요. 그런 폭력의 가해자들은 극우 혐오세력이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인'이잖아요. 저는 화교의 자녀로서 화교인 이원이나 다른 이주민들이 받는 상처를 공유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 국적을 가진)한국인으로서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들도 마음이 많이 힘든 것 같아요. 미안하고요." 

이원 "그런데 이런 상황은 비단 극우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최근 퇴진 집회 현장의 한 푸드트럭에서 '이 음식은 한국의 민주시민들을 위한 것'이라면서 외국인에겐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죠. 사실 퇴진 집회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깃발을 들고나오는 이주민도 계시고, 한강진에서는 한국인 남성과 결혼을 하신 북유럽 국적의 시민분이 올라와서 발언하시기도 했고, 한국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외국인들, 이주민들이 함께하고 있잖아요. 지금의 광장은 탄핵을 두고 다투는 어떤 국내 정치적인 공간인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두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싸우고 있는 공간이고, 그 투쟁의 현장에는 누구나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단일 민족'이라는 담론도 그렇고,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묘하게 순수성에 대한 집착과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제 개인의 생각이지만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분단 국가로서 북한에 대한 어떤 공포 정치에 기대어서 무언가 반대하고 선을 긋는 식의 정서를 공유해왔고, 그런 정서가 '이 집회는 순수해야 한다, 한국인을 위한 것, 탄핵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로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도 고민이 돼요." 

중국와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사실 비상계엄 후 퇴진 국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민족 국가, 국민 국가의 정체성을 두고 여러차례 상처입어왔다. 대만 국적을 갖고 있는 이원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단의 인정을 받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국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윤우는 한국 국적의 국가대표 운동선수였음에도 어머니가 화교라는 사실과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맞물린 복합적 혐오와 차별을 겪어야 했다. 

윤우 "사실 선수로, 국가대표로 활동하면서 개인적으로 중국과 악연도 많았어요. 활동했던 종목이 한국과 중국이 강세인 종목들이어서 국제대회에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죠. 중국 선수들과 악연의 상황이 벌어지는 경기들이 많았어요. 저는 독학으로 만다린어를 배웠는데, 사실 중국 선수들의 경기 운영 방식 등에 대해 다투거나 항의할 때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배운 것도 커요(웃음)" 

"이모도 한국에서 선수로 활동하면서 중국 선수들과 경쟁하는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도 항상 '너네 나라도 돌아가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죠. 어머니도 일상 생활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으셨고요. 저도 한국에서 태어나서 쭉 자랐고 한국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야, 군대는 어떻게 해, 한국과 중국이 경기하면 어디를 응원해,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어요." 

"저는 제가 그냥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운동을 해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던 한 사람으로서 저는 그냥 한국인이었어야 했다고도 생각해요.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됐다고도 생각했고요."  

"사실 제가 어머니께 엄청나게 큰 불효를 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사춘기 무렵에 엄마가 한 번 경기장에 찾아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형들도 막 있고 다른 엄마들도 다 있었는데 엄마가 너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를 모른 척하고 차에 타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고 가버린 적이 있어요. 저도 내가 왜 이러지 속상해하면서 뒤돌아보는데 엄마가 차가 안 보일 때까지 계속 뒤에 서 계셨어요. 그리고 제가 은퇴할 때까지도 제 경기를 못 오셨어요. 제가 혹시라도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 그 정체성에 대해서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런 마음이셨던 것 같아요."  

"계속 이렇게 혼란스러웠었던 것 같아요. 나의 정체성은 사실 한국인이었어야 하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게 되었어요.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도 같이 있었고요. 운동을 하고 국가대표 활동을 하면서 저를 진짜 못살게 괴롭히던 남자 선배가 한 분 계셨어요. 아직 현역 국가대표로 활동하는 선수이기도 한데요. 제가 동성애자인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괴롭히고, 같이 운동하기 더럽다, 동성애자는 에이즈환자라는 식의 사실과 다른 혐오 발언들을 퍼뜨렸어요. 그래도 그 선배에게 감사한 것은, 제가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지금의 활동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감염인도 똑같은 사람이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지장이 전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해야 하나 이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던 것 같아요." 

"선배가 퍼뜨린 이야기들 때문에 동료 선수들에게 너 그냥 다른 데 가면 안 돼냐는 이야기도 듣고, 경기 결과가 안 좋으면 너는 갈 데라도 있지, 너는 대만에 가도 되잖아, 중국에 가도 되잖아, 이런 말도 많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팀에 갈 때도 저를 괴롭혔던 선배가 감독님들에게 저와 같이 운동하기 싫다, 제가 동성애자고 에이즈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어요. 팀에 들어가 합숙 생활을 하게 되면 신체검사를 해야 하고, 검사 결과 저에게 감염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결국 팀은 저와 맺었던 가계약을 취소했어요. 그 이야기를 저의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와서 제게 전하셨어요. 저는 밥이라도 드시고 가라고 했었는데, 이제 우리 곧 시합인데 죽은 사람 밥 먹어서 결과가 나빠지면 어떡하냐면서 그냥 가셨어요."  

"그런 복잡 미묘한 심정을 계속 가지고서 이십대를 보냈다라는 게 정말 저는 가슴이 아픈데, 우연히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영화를 봤어요. 저는 되게 죽고 싶어 했던 사람 중에 한 명이었거든요. 난 잘못됐다, 난 죄인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고 제 자신을 되게 혐오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영화를 보고, 제가 또 다른 바비라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를 보고서 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제 정체성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제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누군가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 손을 그대로 잡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고 전하고 싶어요. 우리가 함께 광장에 가지 못해도 내가 광장에 있겠다, 당신이 광장에 나올 수 없더라도 그 몫을 다해서 나가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쉬고 광장에 나가고 있어요. 이렇게 무언가 몸을 쓸 때, 뭔가 활동을 하고 행동을 할 때 또 저한테도 힘이 생기는 거 같아요. 목소리를 낼 때, 깃발을 들 때요. 저는 국제대회 나갔을 때 키가 작아서 깃발을 제가 못 들었거든요. 광장에서는 대형 깃발인데도 제가 깃발도 들고 있어요(웃음)." 

공연예술가로 활동할 당시 이원.(이원 제공)

이원 "영주권을 받기 전에, 5년에 한 번씩 비자를 갱신을 하는 게, 항상 뭔가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고 허락을 받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은 몸을 갖고 태어나니까 당연히 생활을 하고 생존하고 그걸 영위할 공간이 필요한 건데, 나는 항상 어딘가 다만 살아가기 위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존재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2012년에 영주권 신청을 하면서, 거주 비자 만료 후 영주권 발급까지 한 달 정도 기간이 벌어졌어요. 당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분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별 문제 없다고 했는데, 그 한 달 동안 제 거주비자가 끝나자 마자, 제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통신사에서 제 체류기간이 만료됨에 따라서 통신 사용을 중단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일종의 미등록 상태가 된 거죠. 그때 되게 서럽더라요. 제게 태어나고 자란 정체성이라는 것은 되게 복잡한 거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 저에게는 모국 혹은 조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미등록 상태가 됐다는 게 참 서러웠어요. 사실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아동이 되게 많잖아요. 고 강태완 씨의 경우도 그렇고요. 그런 현실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공연예술 쪽에는 두산연강예술상이라고 두산아트센터에서 주는 상이 있어요. 심사위원 3명이 모여서 후보를 선정하고, 서로 합의해서 최종 시상을 하는 구조인데, 상금이 3천만 원이예요. 몇 년전에 그 심사위원 중 한 명과 미팅을 했었는데, 제가 후보에 올랐고 수상이 유력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상은 한국 국적인 한국인에게만 줄 수 있는 상이었고, 결국 제가 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 후에도 한 번 두산아트센터에서 제게 전화가 왔어요. 저에게 '연출님 혹시 아직도 대만 국적인가요' 이렇게 물어왔어요. 제가 다시 후보로 선정이 되었고, 수상이 유력한데 국적 문제가 걸렸던 거죠. 결국 당시에 상은 제가 인큐베이팅을 하고 연출로서 참여했던 작품의 작가가 수상하게 되었어요. 그 통화가 잊혀지지 않아요. 나름 자랑을 하자면 백상예술대상에도 노미네이트가 됐었어요. 제가 진짜 열심히 제 삶과 어떤 사실 어떤 생각을 작품에 담아내었던 것은, 이 세상의 어떤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런 일을 두 번 겪으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너는 너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해 대만 사람이라고 생각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식의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저는 대만에 살지는 않았지만 화교로서의 정체성도 분명히 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은 제게 태어나서 계속 자란 곳이고, 화교로서 성소수자로서, 여러 차별을 경험하기도 한 곳이죠. 제 친구들, 제가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그래서 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계속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마음에서 계속 함께 싸워왔던 투쟁의 공간, 투쟁의 터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번 탄핵 국면에서 계속 광장에 나가면서 평소에 '조국' 이런 말을 정말 싫어하는데 오히려 한국이 나의 조국이다, 투쟁의 조국이다, 나는 이곳을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고 민주적이고 평등하고 다양성과 인권이 보장되는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분명 한국인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또 저는 이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투표권, 선거권은 제한적이지만 제가 정치적인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하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있고, 사회운동도 제가 태어난 땅에서 하나의 정치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겠다는 생각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태어나고 자라온 땅에서 혐오와 차별을 온 몸으로 겪고 살아낸 두 사람은, 그럼에도 서로 다른 이들과 광장에 나서 한국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바꾸어 가기 위한 '연대'의 희망과 책임을 감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우리들은 지금의 광장에서 무엇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윤우 "지금 광장에 모여있는 많은 집회 참여자분들은 무척 다양해요. 윤석열 탄핵이라는 하나의 과제에 공감해서 모이기 시작했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의제들에 대한 요구가 함께 나오고 있고, 그것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죠. 저는 서로가 그 다양한 의제들에 대해서 원래 관심이 없었던 부분이라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당장 공감할 수 없어, 이런 태도보다는 그것이 어떤 경험과 고민들에서 제기되는 요구들인지 서로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화교,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비롯해 다양한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인 등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해서 함께 관심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광장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활동가님이 있는데, 그분이 일전에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라고 쓰셨던 적이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변화는 시작됐고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문장을 덧붙여보자면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 중이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소수자의, 페미니스트의, 장애인의, 이주민의, 우리의 발언들이 광장에 나오고 서로를 환대하면서 우리는 지금 연대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렇게 우리들이 연대하는 지금이 위기이면서도 기회라고 생각을 하고요. 이 기회에 우리의 연대로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것 중 하나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이야기도 드리고 싶어요. 혼인 평등을 위한 소송에서도 함께 이겼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함께 연대를 이어간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제 윤석열은 끝났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 축배를 들면 되는데, 축배를 들고 윤석열은 끝났지만 우리는 계속 연대하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이원 "거의 한 10년 정도 된 책이기는 한데, 저는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라는 책의 문장을 정말 좋아해요. 이주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워킹홀리데이를 가든 유학을 가든 그것도 이주인 거고, 국가 안에서도, 저는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공부와 직업을 위해서 서울로 이주를 했고, 서울 안에서도 월세나 보증금이나 이런 조건에 맞춰서 끊임없이 이주를 하고 있고요. 자발적인 이유와 비자발적인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인간은 늘 이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자신의 삶의 조건들을 이래저래 조합하면서 그때그때 열심히 어디에서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저는 정말 멋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다들 집을 떠나고 다시 계속 새로운 집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에, 그 당연한 일들에 어떤 이유를 붙이고, 차별의 근거로 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광장에 나왔던 시작은 계엄과 윤석열 정부가 너무나 잘못됐다는 공통의 감각이었지만, 각자가 지향하는 바와 몸담고 살아가는 일상의 환경들은 서로 다를 것 같아요. 트위터에서 봤던 것 같은데, 어떤 시민이 누군가 들고 있는 깃발에 적힌 성소수자에 관한 단어를 보고 무슨 뜻인지를 물었고, 설명을 듣고는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해요.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어떤 것들은 배제하고 뾰족해야 한다, 이런 자세들보다는 그냥 알아두겠다는 그 태도가 저는 참 좋은 것 같아요. 성소수자가 계엄을 둘러싸고 무엇을 느끼고,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지향을 갖고 있는가, 이주노동자나 외국인 유학생들이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바라는 동시에 왜 한국사회의 광장에 나섰는가, 이런 이야기들이 논점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다양성,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로 다르더라도, 판단하지 않고 알아두겠다, 함께 가자, 그 태도가 참 좋고 필요한 것 같아요." 

"사실 어떤 의미에서 각자 생존 자체가 쉽지 않으니까, 서로를 연결하고 함께 힘을 합쳐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나는 어떻게든 여기에서 살아남아 높은 곳으로 가서 어떤 위험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불안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불안들이 서로 다른 존재들을 배제하고 구별 짓게 하는 것도 같고요. 그런데 결국 인간은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다양한 존재이고, 어떤 배제와 배타적인 논리들을 하나둘 펼쳐 서로를 헤쳐나가다 보면, 누구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어떤 정상성이나 순수성을 추구할수록 남아있는 사람들은 더 적어질 수 밖에 없겠죠. 내가 고립감과 불안을 느끼는 그 지점이 사실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우리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혐오와 차별의 선동에는 휘말리지 않아야 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되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른 삶과 의견, 가치와 지향 이런 것들에는 기꺼이 이 광장 안에서 서로서로 휘말리면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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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중국이 중국공산당이 민주당이 니들이 너무너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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