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 좌파의 참을 수 없는 마니교주의

[편집자 주]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국가 간 자본 이동의 시대에 적용 가능성을 상실했을까, 아니면 오늘날의 착취, 불안정, 불평등의 글로벌 패턴과 여전히 관련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점점 더 열악한 노동과 생존 조건에 직면해 있고, 세계 주요 경제 강대국들 간의 대립과 세계경제질서 재편이 심화하는 가운데, 국제적 대립과 투쟁의 본질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반제국주의-반미투쟁 지상주의 또는 반제국주의를 넘어 친러시아, 친중국으로까지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필요한 문제다. 

지난 7월 제국주의에 대한 특별 심포지엄이 마르크스주의 저널인 “Science and Society”를 통해 열렸고 논문집이 최근 발표됐다. 참세상은 이 논문집의 주요 글과 관련 주장을 모아 연재한다.

(1) '반제국주의' 좌파의 참을 수 없는 마니교주의 (윌리엄 로빈슨)
(2) 제국주의, 반제국주의, 그리고 초국적 계급 착취 (윌리엄 로빈슨)
(3) 누가 사회주의를 언급했나? (톰 브라스)
(4) 제국주의 체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5) 로빈슨 "마니교" 딱지의 ​​의도치 않은 불행한 결과 (스티브 엘너)
(6) 제국주의: 나무가 숲을 보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라 (훌리오 후아토)
(7) 국제적 자본주의 계급 이론: 평가 (데이비드 라이브먼)
(8) 21세기의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준 쉬)
(9) 제국주의에 ​​관하여: S&S 심포지엄에 대한 답변 (윌리엄 로빈슨)
(10) 민주주의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해체하다 (이녜스 발데즈)
 
(11) 양극화된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반식민주의, 새로운 아(亞)제국주의 그리고 국제주의

출처: Unsplash+ & Resource Database

독일의 사회주의자 아우구스트 베벨은 반유대주의를 "바보들의 사회주의"라고 일컬은 바 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이 착취자일 때만 자본주의 착취를 인정하고, 그 외의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착취에 눈을 감는다고 비판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바보들의 사회주의는 자칭 "반제국주의" 좌파에 의해 부활했다. 이들은 미국과 다른 서방 강대국들, 혹은 그들이 지원하는 정부가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행할 때는 이를 비난하면서도, 단지 워싱턴과 적대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억압적이고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국가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거나 심지어 옹호하기도 한다. 

전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사회 통제의 정치적 현실은, 근본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통합된 경제와  국민국가 기반의 정치적 지배 체제 사이의 모순에 의해 형성된다. 경제적 세계화와 자본의 초국적 통합은 세계 자본주의에 구심적 추진력을 제공하는 한편, 정치적 분열은 지정학적 갈등을 야기하는 강력한 원심적 반작용을 일으킨다. 글로벌 자본의 경제적 통일성과 각국의 지배 집단 간의 정치적 경쟁 사이의 간극은 빠르게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각국의 통치자들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내부 사회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애써야 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정세가 현대의 "바보들의 사회주의"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중국, 니카라과, BRICS, 그리고 다극화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반제국주의자" 좌파의 뒤얽힌 논리와 퇴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논의하고자 한다.

중국과 자본주의 발전

'중국적 특성을 지닌 자본주의'는 국가-당 엘리트와 결합된 강력한 중국 초국적 자본가들의 부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농촌에서의 치명적인 원시적 축적과 수억 명의 중국 노동자 착취로 인해 유지되는 자본 재생산과 높은 소비를 하는 중간 계층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에서는 파업과 독립 노조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며, 중국 공산당은 이미 오래전에 계급 투쟁이나 노동자 권력에 대한 논의를 포기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해서 격화되면서 이에 대한 국가의 탄압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이 수백만 명을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급속한 산업화, 기술적 진보, 그리고 첨단 인프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북미와 서유럽의 핵심 국가들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급격한 자본주의 발전 기간 동안 이러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서구의 좌파는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을 노동계급의 승리로 보지 않았으며, 이 발전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의 결합적이고 불균등한 축적 법칙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이제 중국이 '따라잡고' 있는 중이다.

중국 모델은 민간 자본이 생산량의 5분의 3, 도시 고용의 5분의 4를 차지하는 국영-민간 기업 복합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중국은 초국적 자본주의 통합을 향한 신자유주의적 경로를 따르지 않았다. 국가가 금융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민간 자본을 규제하며, 특히 인프라에 대한 막대한 공공 지출과 계획을 통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서구 신자유주의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자본주의 발전 모델일 수 있지만, 여전히 자본 축적의 법칙을 따른다. 1980년대 세계 자본주의에 문을 연 이후 중국은 초국적 기업의 시장이 되었으며, 억압적이고 전방위적인 감시 국가가 통제하는 방대한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잉여 자본의 배출구가 되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수년간의 가속화된 자본주의 발전 으로 축적된 중국 잉여 자본의 출구를 해외에서 찾아야 한다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중국은 해외 자본 수출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 초반 20년 동안, 중국은 글로벌 남부와 북부 국가에 대한 해외직접투자(FDI) 급증으로,  자본의 초국가적 통합을 심화시키고, 투자 대상 국가의 자본주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등 세계를 주도했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의 해외직접투자는 10배 증가했고, 2004년부터 2013년까지 450억 달러에서 6,130억 달러로 13.7배 증가했다. 2015년까지 중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해외 투자국이 되었다. 중국의 해외직접투자가 인바운드 FDI를 초과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순채권국이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해외 직접 투자가 과거 제3세계에 도달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제 이주와 자원 착취가 '남-남 협력'으로 포장되다

페루 아푸리막 주의 원주민 공동체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최대 규모의 노천 구리광산 중 하나인 중국 소유의 라스 밤바스 광산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여왔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실제로 페루 정부는 광산 회사에 경찰 서비스를 법적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중국의 MMG는 구리 채굴을 폭력적인 수단으로 진행하기 위해 경찰의 물리적 힘을 구매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페루 간의 자원 채굴 공간과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반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남-남(South-South) 협력과 탈서구화된 현대화의 모델로 홍보되지만, 예리한 관찰자들은 이것이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착취 구조임을 즉시 알아챌 것이다. 즉, 초국적 자본이 공동체를 몰아내고 자원을 약탈하는 동안, 현지 국가는 폭력적으로 저항을 억압하고 추방과 착취를 보호하는 정치적·군사적 역할을 맡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패턴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 은행들은 인프라, 에너지, 광산 프로젝트를 위해 1,370억 달러 이상의 대출을 제공해왔다. 환경 및 인권 단체들의 연합체가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멕시코, 페루, 베네수엘라의 26개 프로젝트를 조사한 결과, 중국의 광산 및 메가프로젝트 투자와 관련된 곳에서 인권 침해, 지역 공동체의 강제 이주, 환경 파괴, 폭력적 갈등이 광범위하게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대출 관행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러한 대출이 서구의 대출과 달리 서구 대출기관이 부과하는 조건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사실이 아니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중국 자본이 다른 초국적 투자자 및 현지 자본주의 국가들과 협력하여 일으키는 착취, 억압, 환경 파괴에 맞서 싸우고 있는 노동자, 농민, 원주민 공동체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중국 자본이 다른 나라에서 유래한 자본보다 더 나쁘거나 더 좋다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그 소유자의 국적이나 민족과 상관없이 자본일 뿐이다. 그러나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와 글로벌 남반구의 자본주의 국가가 협력하여 지역 공동체에 메가프로젝트를 강요하거나 초국적 기업의 약탈을 용이하게 할 때, 이는 제국주의와 현지 지배 계급에 의한 착취로 비난받는다. 반면, 남반구의 두 자본주의 국가가 동일한 메가프로젝트와 기업 착취를 위해 협력할 때는 이를 진보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남-남 협력"또는 "발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찬양한다.

비제이 프라샤드가 이끄는 트리콘티넨탈(Tricontinental) 같은 단체들은 구 제3세계에서 중국의 이러한 역할을 "상호 이익", "발전 촉진", "윈윈(win-win)"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중국 투자자들이 수출가공지대를 확대하고, 노동집약적인 산업 생산을 중국에서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의 저임금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이 이윤 창출이 아니라 "이들 국가의 발전을 돕기 위해서"라고 믿어야 하는가? 이는 세계은행(World Bank) 같은 담론의 재현일 뿐이다. 중국 국가-당 엘리트들의 담론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트리콘티넨탈은 "중국적 특성을 지닌 사회주의의 평화적 부상"이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렇긴 하나, 이는 자본주의적 수탈과 착취에 대한 대안은 아니다. 자본주의 발전은 계급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프로젝트이다. 서구에서든 동양에서든, 자본주의 발전은 자본 축적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주권'과 '연대'의 오용

“반제국주의” 좌파는 서방의 선전을 정당하게 비판하면서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비서방의 선전에 대해서는 이를 지적하거나 인식조차 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 그 선전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니카라과는 그 대표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오르테가 정권은 급진적인 언어와 반제국주의적 수사를 교묘하게 사용하여 국제 좌파 사이에서 자동적인 지지를 얻어왔다. 오르테가는 2007년 전통적인 우익 과두제 세력, 과거 무장 반혁명 세력의 구성원, 그리고 보수적인 가톨릭 교회와 복음주의 교파와의 협약을 통해 권력을 되찾았다. 그는 사유 재산에 대한 절대적 존중과 자본에 대한 무제한적 자유를 약속하며, 2018년까지 자본가 계급과 공동 통치를 하면서 초국적 자본에 대해 10년간의 전면적인 세금 면제, 규제 완화, 이익 송환의 자유, 그리고 파업 노동자에 대한 탄압을 허용했다. 국가 재산의 96%는 민간 부문의 소유로 남아있다. 이 독재 정권은 모든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 있으며, 인구가 겨우 600만 명인 나라에서, 2018년 이후 3,500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를 폐쇄했다.  그 정권이 자신 이외의 모든 시민 활동을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큰 지지를 받았던 산디니스타 혁명과 그 나라에 대한 잔혹한 미국의 개입 역사 때문에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혁명은 1990년에 끝났고, 2007년에 오르테가 하에서 권력을 잡은 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제국주의” 좌파는 독재 정권을 따뜻하게 포용하기로 선택했으며, 이는 미국의 정권 불안정 시도와 "자주권"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미국이 오르테가에 대한 "반혁명적 정권 교체"를 추진하고 있다는 주장은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워싱턴의 강경 발언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는 무역 또는 투자 제재를 받고 있지 않다. 미국은 니카라과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며, 2022년 양자 무역액은 83억 달러를 초과했고, 초국적 기업의 투자는 계속 유입되고 있으며, 중앙은행에 대한 다자간 대출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군사적 또는 준군사적 개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본부를 둔 코드 핑크(Code Pink)와 같은 단체는 오르테가 정권이 “사회주의 정부”이며 “파괴적인 제재”의 압박을 받고 있고 “폭력적인 쿠데타 시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워싱턴은 오르테가가 아니라 이란, 베네수엘라, 그리고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전면적인 불안정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범죄는 이름에 걸맞는 좌파라면 반드시 강력히 규탄해야 한다. 그러나 전 세계에 걸친 미국 제국주의의 야망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국제주의와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에 대한 좌파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제국주의” 좌파는 다르게 말할 것이다. 언론인 케이틀린 존스톤이 경고한 바를 주의하라: 만약 당신이 서구 국가에 살고 있다면, “제국이 표적으로 삼은 국가들에서 시위자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 시위에 대한 제국의 선전 캠페인을 조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당신은 이 현실에 대해 책임 있는 관계를 가지거나 무책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것뿐이다. 몇몇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반제국주의자'들은 자주권의 개념을 민중이나 노동자 계급이 아닌, 자신들이 옹호하는 국가의 통치자들에게로 되돌려놓았다. 20세기의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 투쟁은 제국주의 강대국의 간섭에 맞서 국민의, 국가 그 자체가 아닌, 자주권을 방어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 자주권을 외부 간섭 없이 국내에서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는 "권리"로 사용한다. 우리는 좌파로서 서방을 지지하는 정권들의 인권 침해를 규탄하기 위해 “국가 주권을 침해”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으며, 워싱턴이 선호하지 않는 정권들에서도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주저해서는 안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한 나라의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계급이 다른 나라의 국가가 아닌, 그 나라의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계급의 투쟁에 연대를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는 대중과 노동계급의 해방 투쟁을 진전시키는 한도 내에서만, 오직 그 한도 내에서만, 좌파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 즉, 이러한 계급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강제로라도 추진하게 될 때만 지지받을 수 있다. "반제국주의자들"은 국가(state)와 국민(nation), 나라(country), 민중(people) 을 혼동하며, 이러한 범주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부족하고, 계급 중심의 정치적 방향보다 포퓰리즘적 경향을 더 지지한다. 우리는 21세기 초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비판했다. 그것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라크 민중들과 연대했기 때문이며,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프로젝트가 전 세계의 빈민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BRICS: 자본-노동의 모순을 남-북의 모순으로 대체하다

“반제국주의자들”은 BRICS를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남반구의 도전이자, 인류를 위한 진보적이고 심지어 반제국주의적인 대안으로 환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려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서구의 패권주의로 축소해야 한다. 식민주의 전성기와 그 직후, 지역 지배 계급은 기껏해야 반제국주의적이었지만 반자본주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특정 국가의 시민들 사이에 이해관계의 일치를 주장함으로써 계급을 지워버렸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해당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식민 지배, 그로 인해 강요된 카스트 제도, 그리고 토착 자본의 억압에 의해 억압받았던 한도 내에서만 진보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인 면모를 보였다. 오늘날의 “반제국주의자들”은 프라샤드의 표현대로 BRICS를 부활한 "제3세계 프로젝트"라 열광하며, 20세기 중반의 반식민주의적 순간에 대한 구시대적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이는 내부 계급 모순과 이들이 얽혀 있는 초국적 계급 관계를 가린다. 이러한 사고가 21세기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언급하면 충분할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마닐라에서 필리핀 혁명 활동가 그룹을 대상으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인도 출신의 한 여성은, 제3세계 출신의 강력한 집단들이 편입된 초국적 자본가 계급의 부상에 관한 나의 분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인도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레닌이 분석한 것처럼, 핵심 자본가들이 인도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그 잉여 가치를 제국주의 국가로 이전하고 있다고 답했다.

우연히도 내가 강연을 한 그 주에, 6개 대륙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운영되는 인도 기반의 글로벌 대기업인 타타(Tata) 그룹이 영국의 여러 상징적인 기업들을 인수했는데, 그 중에는 랜드로버, 재규어, 테틀리 티, 영국철강, 테스코 슈퍼마켓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해 타타 그룹은 영국 내 최대 고용주가 되었다. 즉, 인도 기반의 자본가들이 이제 영국 노동자들을 가장 많이 착취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이 여성의 구시대적인 논리에 따르면, 이제 영국이 인도 제국주의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브라질 대통령 룰라는, 2003년 첫 번째 취임 직후, 그리고 2010년 두 번째 대통령 임기 중, 브라질 기업 임원들을 정부 항공기에 태우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이 대통령-기업 동행단은 브라질에 기반을 둔 초국적 광산 기업인 발레(Vale)가 대륙의 풍부한 광물 자원에 투자할 수 있도록 모잠비크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을 설득하며 “남-남 연대”라는 수사를 내세웠다. 룰라의 아프리카 기업 행보, 그리고 이를 상징하는 “남-남 협력” 의제에서 무엇이 반제국주의적이었는지, 더구나 반자본주의적이었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왜 좌파가 브라질 기반 자본의 아프리카 진출, 중국 기반 자본의 라틴 아메리카 진출, 러시아 기반 자본의 중앙아시아 진출, 또는 인도 기반 자본의 영국 진출을 환영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든다. 

우리는 룰라 정부와 같은 정부의 국내에서의 (온건한) 재분배 정책과 역동적인 대외 정책을 지지할 수 있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똑같지는 않으며, 누가 정부를 구성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진보적" 정부가 반드시 사회주의적이거나 반제국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근시안적인 시각에서는 중국, 인도, 또는 브라질 기반 자본의 대외 확장이 일종의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캐나다에 기반을 둔 지정학적 경제 연구 그룹(Geopolitical Economy Research Group)과 그들이 후원하는 국제 마니페스토 그룹(International Manifesto Group)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념적 헌신이 사실을 앞서는 가운데, BRICS가 "제국주의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자율적이고 평등한 국가 발전과 산업화를 촉진하는 노력에서 잘 알려진 성공 사례 중 하나"라는 기묘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BRICS가 글로벌 자본주의와 초국적 자본의 지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이들 국가들은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보다 다극적이고 균형 잡힌 국가 간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러한 다극적 국가 간 시스템 역시 잔혹하고 착취적인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BRICS의 자본가들과 국가들은 북반구의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 노동계급과 대중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2023년 BRICS의 회원국이 확대됨에 따라, 새로 블록에 합류하려는 후보국에는 "제국주의의 속박"에 맞서 싸우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카자흐스탄과 같은 '대단히' "자율적이고 평등한"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극성: 새로운 걸림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서방의 급진적인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대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쇠퇴한 국가 간 질서에 대한 결정타를 예고할 수 있다. 점점 더 통합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는 미국과 서방이 통제하는 국제 정치 질서 및 금융 체계, 그리고 독점적으로 달러화된 글로벌 경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 우리는 경제적 불안정과 정치적 혼란이 고조되는 가운데, 전세계의 지정학적 정렬이 급진적으로 재구성되는 초기 단계에 있다. 그러나 국제 질서에서의 패권 위기는 여전히 단일하고 통합된 세계 경제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다원주의는 전 세계의 대중 투쟁에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다극적인 세계가 된다고 해서 새롭게 부상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축들이 기존 중심지보다 덜 착취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다중심적 세계에서 기존의 서방과 새롭게 부상하는 중심지들은 놀랍도록 유사한 "강대국" 담론을 중심으로 수렴하고 있다. 특히, 징고주의적(맹목적, 배타적, 호전적, 민족적 색채를 띤) 애국주의와 신화화된 "영광의 문명"에 대한 향수는 이제 되찾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스펭글러식(Spenglerian) 서사는 -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극단적 민족주의, 제국주의 또는 회귀적 정치 이데올로기 - 각 나라 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권위에 대한 유교적 순종, 한족 우월주의, 그리고 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장정과 결합된다. 푸틴에게는 유라시아에 뿌리를 둔 "위대한 러시아" 제국의 영광스러운 시절이 있으며, 이는 푸틴이 "전통적 영적·도덕적 가치"라 부르는 극단적인 가부장적 보수주의로 정치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푸틴은 이 가치를 "쇠퇴하는 서방에 맞서는 러시아 민족의 영적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는 "미국 예외주의"라는 교리와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호언장담에 의해 정당화된, 쇠퇴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제국주의적 자만심이 나타난다. 그 주변에는 항상 백인 우월주의가 있었으며, 이제는 "대체 이론"이라는 이름의 신장하는 파시스트 운동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여기에 범튀르크주의, 힌두 민족주의, 그리고 이 떠오르는 다극적 세계에서의 다른 준파시스트적 이념들을 추가할 수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중국을 다시 위대하게!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

미국은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경쟁하는 범죄 국가들 중 가장 위험한 범죄자일 수 있다. 우리는 워싱턴이 새로운 냉전을 조장하고, 러시아를 공격적인 나토 확장으로 자극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만든 것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반제국주의" 좌파는 미국과 그 동맹국이 유일한 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서방 대 그 외의 세계"라는 마니교적 서사 - 세계를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대립하는 힘의 싸움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세계관 - 이다. 이와 같은 선악 이분법적인 스타워즈식 서사는 단일한 '악의 제국'에 맞서는 정의로운 싸움을 그리며, 결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바로 스타워즈 같이, 판타지 세계의 허황된 말들과 "반제국주의" 좌파의 말들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진다.

[출처] The Unbearable Manicheanism of the “Anti-Imperialist” Left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윌리엄 I. 로빈슨(William I. Robinson)은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글로벌 연구 및 라틴아메리카 연구 석좌 교수다. 그는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 정치, 사회 이론,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광범위한 저서를 집필했다. 최근 저서로는 ⟪폭풍 속으로: 새로운 글로벌 자본주의에 관한 에세이(Into the Tempest: Essays on the New Global Capitalism)⟫(2018), ⟪글로벌 경찰 국가(The Global Police Stat)⟫(2020), ⟪글로벌 내전: 팬데믹 이후의 자본주의(Global Civil War: Capitalism Post-Pandemic)⟫(2022)가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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