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원의 그들

1927년 아서원의 모습

고급음식점 아서원

지금의 서울광장에 서서 서울시청을 마주 보면 오른편으로 을지로가 보인다을지로는 종로와 함께 한강 이북 서울을 대표하는 도로이다이 길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황금정으로 불렸다을지로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롯데호텔과 롯데 백화점이 자리 잡고 있다롯데 자본이 차지한 이곳은 조선시대에 보은단골이라 불리어 민가와 남별궁이 있던 곳이고일제강점기에는 조선호텔총독부도서관식산은행반도호텔아서원 등과 민가와 상가가 함께 있었다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73년 건설부 고시를 통해 이 지역에는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이 들어서게 된다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숱한 곡절을 담은 이곳의 이야기는 지금은 그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공간으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곳이 되었지만문헌과 연구로 그 자취를 상상해볼 수 있다이곳 한쪽에 있었던 아서원은 중국 산동성 출신의 화교인 서광빈(호가 홍주인데 이름보다 호로 더 유명해짐)이 1907년 설립한 음식점이다아서원은 뛰어난 음식 맛은 물론 야간에는 기생 60여 명을 고용하는 요정으로도 운영하여 당시 고급 중화요리집으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이때 얻은 명성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지속하여 일반인들의 신년회 송년회뿐 아니라 출판기념회나 정치인들의 주요 회동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아서원은 1934년 반도호텔 공사가 시작되면서 부지를 환지(換地)하여 지금의 롯데호텔 건물의 중간쯤에 있던 2층이던 건물을 비우고 주소를 황금정 181-4로 옮기고 400여 평에 3층 건물을 신축하였다대규모 1급 요릿집이 된 아서원은 1950년대 말 다시 건물을 한층 더 올려 4층으로 확장하였고 당시 화교들의 중화요릿집 중 가장 규모가 컸다아서원은 1974년 내부의 소유권 분쟁과 롯데라는 재벌을 상대로 한 재판과정에서 패소하여 문을 닫을 때까지 영업하였다.

이곳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의미가 큰 곳 가운데 하나이다바로 조선공산당의 창립 당 대회가 열린 장소이기 때문이다공산당 창당대회가 매우 고급스러운 음식점에서 열린 이유는 무엇일까우선 일제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기만책이었다아서원은 서울의 한복판그것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황금정에 있다극도의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회합의 장소로 상대를 기만하기에 좋은 장소였다더구나 이날은 전조선 기자대회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 장소는 동대문 밖 상춘원이었다즉 일제 경찰의 주요 감시를 동대문 너머로 보낼 수 있었다다른 하나를 더 추정해본다면 한 가지씩 여러 요리가 나오는 중국요리의 특성상장시간 회의에 적합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들을 기만하라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19명의 사내들이 당시 고급 중화요릿집이던 아서원 2층 조용한 별실에 모여들었다이들은 사회주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평안북도 신의주부터 전라도 순천과 마산에 이르기까지 15개의 지역 세포단체와 화요회 북풍회라는 두 개의 사회주의 정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길게는 10짧아도 5년 이상 여러 해 동안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으며 독립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그 한 보기로 홍덕유의 경우 그는 이미 1916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9년에 귀국한 경력이 있고 이들 중 나이가 가장 어린 김상주도 이미 1920년경부터 사회주의운동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연령과 상관없이 이들이 모두 공유한 정치적 경험은 바로 3.1운동이었을 것이다체포가 되지 않으면 기록이 남지 않아 참가를 확언할 수 없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들 모두는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이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윤덕병이 41가장 적은 김상주가 23세로 (수형카드에는 홍덕유가 1882년생으로 나오지만 홍덕유의 자기 진술과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 공적조서에도 1887년으로 기록되어 이를 따른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31.9세였다자신의 신념에 회의가 없을 패기만만한 청년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이날의 당 창립을 성사시키기 위해 조직적 역량을 치밀하게 투여했다당 대회가 열린 4월 17일을 앞뒤로 일제당국의 시선을 교란시킬 만한 규모 있는 대회를 배치하여 당 대회를 은폐하였다, 4월 15~17일에 전조선기자대회가, 20~21일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소집되어 있었다이 두 대회는 이날 창립되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원들이 지도부에 폭넓게 포진되어 있기에 날짜조정은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날 창립되는 조선공산당의 주도 세력과 경쟁관계에 있던 서울파의 입장에서도 연초부터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를 조직하였기에 나름의 세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이들은 사회운동자동맹 발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당시 크지 않았던 서울은 전국에서 올라온 수백 명의 사회운동단체 활동가들과 기자들로 숙박업소와 각 사회단체 사무실이 만원으로 붐비었을 것이고 감시대상이 급격하게 늘어난 일경은 이 모두를 감시하기에는 어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난한 회의 속에 재로 덮인 불씨

당 대회는 김재봉의 개회선언과 김약수의 사회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었다불과 3년 전의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의 사회주의 세력 통합회의가 10여 일이 소요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하루 안에 당 조직과 관련한 주요의사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건은 촉박했다이는 건설하려는 조직의 성격이 일제를 상대로 하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치러야 했기에 불가피한 조치이기도 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사전에 충분한 조직적인 토론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은 전조선의 사상운동을 질서 있게 지도하기 위해’ 혁명의 참모부로써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여기에서 사상운동이란 당시의 용어로 사회주의운동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그리고 당 대회 주비위원회가 준비한 10개항을 토론하였다그 10개 안건은 순서대로 당 규약민족혁명운동과의 관계노동자 농민문제당 건설청년문제여성 안에서의 사업강령종교단체와의 관계국제당과의 관계전형위원 선출 등이다모든 안건에 대한 토론을 동반하며당 대회는 5시간동안 진행되었다. (당 대회의 진행시간에 대해서는 조동호보다 먼저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조봉암이 보고서에 4시간동안 진행되었다고 보고하였으나 조동호의 보고는 5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이 글은 당 대회에 직접 참석한 조동호의 보고를 따른다.)

특히 당 대회에서는 1. 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무산계급의 이익을 포함하는 조선인민의 일반적 운동을 지원하고 2. 공산당은 조선의의 자본가뿐 아니라 일본의 자본가에 대항하여 투쟁한다는 결정을 채택한다.

조직적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사항은 새롭게 구성될 당의 중앙집행위원에게 위임하였다중앙집행위원회의 선출도 전형위원만 선출하고 선출된 전형위원회가 새로운 중앙을 뽑아서 개별통지하도록 하였다인선의 문제는 조직 내외 사정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며일제를 의식한 보안을 반영한 조치였을 것이며동시에 이때 조직된 조선공산당이 단일한 세력이 아니기에 정치적 고려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이날 건설된 조선공산당은 당의 강령을 당 대회에서 결정하지 못했다이는 아마도 주비위원회의 내부 토론에서도 결정짓지 못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된다화요회와 나머지 두 세력즉 북퐁파상해파 사이에는 조선혁명운동과 관한 강령적 수준에서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즉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민족해방 이후의 사회상의 차이가 그것이었다해방된 조선은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해방된 직후 사회주의자는 어떤 프로그램을 견지하여야 하는가가 그 차이였다이런 종류의 차이는 각각의 공산주의 서클의 수준에서 당으로의 질적 비약을 해야 할 시기에 쉽게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나라의 경험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조선의 청년 사회주의자들도 유사한 상태에 놓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들이 달랐던 것은 이 차이를 이유로 당의 건설을 지체하지도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무산시키지도 않았다는 점이다이들은 이 날카로운 차이를 뒤로 미루고자 했다그렇기에 강령초안의 작성의 책임을 구성될 중앙집행위에 맡기는 결정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무사히 당대회를 성사시킨 기쁨도 컸겠지만 그들 앞에는 당장 진행해야 할 일들이 놓여 있었다다음날은 4월 18일을 고려공산청년회의 창립회의가 마련되고 있었으며, 19일은 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당이 건설되다

당 대회를 성사시킨 이들의 감회는 남달랐을 터였다.

1921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뼈아픈 과오로 남은 자유시 참변과 그것으로 표면화되고 대립되었던 사회주의진영의 분열과 경쟁 상태를 극복하고자 했던 지난날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당시 당 건설에 참여했던 그룹의 인식을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이는 모스크바에 신생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받기위해 파견되었던 조봉암이 코민테른에 제출한 문서에 남아있다이 문서는 조봉암조훈남만춘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전 역사는 여러 공산주의 그루빠들의 끊임없는 분파투쟁의 역사이며, 4개의 당 중앙위원회그리고 조선공산주의 조직의 통일 및 당창건을 위한 7개의 조직 뷰로 및 위원회의 청산의 역사이다.”

이 글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베르흐네우진스키의 당 통일을 위한 회의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부의 고려총국고려총국의 내지부조선내의 대부분의 사회주의 그룹을 포괄한 13인회코민테른의 24년 2월 결정으로 설립된 고려공산당 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로 이어지는 지난 6년간의 해외와 국내에서 진행된 조직노선그룹간의 경쟁과 활동에 대한 평가였다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건설한 당이 해야할 일은 명확했다노동자 농민이 주인으로 서는 새로운 사회가 그것이었다.

[참고자료 및 논문] 

인터넷자료한국사데이터베이스

우리역사넷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박철하: <1920년대 전반기 조선공산당 창립과정 –꼬르뷰로국내부를 중심으로> 숭실대학 8

이용재: <재벌과 국가권력에 의한 화교 희생의 한 사례 연구-아서원 소송사건> 중앙사론35

이준식: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3

임경석: <13인회 연구> 역사와 현실 94

<1922년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의 결렬> 한국사학보 27

<1926년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외교> 사림 39

<고려공산당 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의 성립> 역사학보 225

<고려총국 내지부 연구> 사림 48

<두 밀사-경성지방법원 정재달·이재복 사건기록과 그 실사> 역사비평 2014년 겨울호

<조봉암의 모스크바 외교> 역사비평 2011년 여름호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연구> 대동문화연구 81

<코민테른의 1924년 2월 결정서 연구> 한국사학보 58

전명혁: <사회주의 사상의 도입과 조선공산당 창건> 진보평론 1999년 겨울호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신편 한국사 49

덧붙이는 말

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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