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모든 전략적 길목을 우회하는 새로운 글로벌 노선이 실제로 가동되는 ‘멋진 신세계’를 상상해 보자. 이제 이 노선에서 이뤄지는 모든 거래를 지역 통화로 결제하고, 역내 거래 플랫폼을 이용하며, 투자 역시 오직 유라시아 자본으로만 이뤄지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아시아에서는 무엇보다 직접 만나 대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핵심이다. 정치·경제 정상회의는 공동 정책을 조율하는 자리인 동시에 어느 누구도 체면을 잃지 않게 하는 무대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합의와 상호 존중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집단적 서방과 달리, 아시아에서는 진정한 외교를 절대적인 우선순위로 둔다.
아시아와 유라시아 전역에서 잇따라 열리는 정상회의는 대개 상당한 파급력을 갖는다. 지난해에는 중국이 톈진에서 제24차 상하이협력기구(SCO) 연례 정상회의를 개최했고, 곧이어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방경제포럼(EEF)이 열렸다. 올해에는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SCO 창설 25주년 정상회의가 막을 올렸고, 뒤이어 블라디보스토크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인도가 뉴델리에서 연례 브릭스(BRICS) 정상회의를 개최하며 일련의 정상외교를 마무리한다.
25주년 SCO 정상회의가 지난 8월 31일~9월 1일에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렸다. 출처: SCO
SCO는 지난해 톈진 회의를 계기로 핵심 다자기구로서 마침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향해 나아가는 신중한 로드맵을 더욱 구체화했다. 올해에는 최종 비슈케크 선언에서 드러났듯이, 구체적인 세부 내용도 큰 그림만큼 중요했다.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두 가지 결정이 특히 두드러졌다. 첫째, SCO 회원국들은 미국의 이란 전쟁을 만장일치로 규탄했다. 이는 인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전체가 이를 규탄했다는 뜻이다.
둘째, SCO 회원국들은 국제법에 기반을 두고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평등하고 포용적이며 차별 없는 다자무역체제”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확인했다. 여기에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별대우”도 포함된다.
전쟁이 아니라 무역을 하라
비슈케크 회의에서는 “국가의 주권에 대한 간섭”에 만장일치로 반대하고 “안보의 불가분성”을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SCO 회원국 안보 도전 및 위협 대응 종합센터를 실제로 운영하기 위한 제도 정비에도 착수했다.
사실상 이는 쇠퇴기에 접어든 서방 패권국이 잇달아, 끝없이 벌이는 하이브리드전과 직접적인 무력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장치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SCO는 사실상 우리가 함께 속한 유라시아 대륙뿐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큰 지역 협력체다. 회원국에는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이 살고 있으며, 세계 GDP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푸틴은 또 이렇게 강조했다. “러시아와 SCO 국가들의 무역액은 2025년에 4,0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회원국들은 상호 결제에서 자국 통화를 갈수록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가 SCO 회원국과 하는 거래에서 자국 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98%를 넘는다.”
이는 이미 SCO의 뚜렷한 초대형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회원국끼리 자국 통화로 무역하는 비중을 계속 높여가는 것이다. 브릭스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푸틴과 마찬가지로 이란 대통령 마수드 페제시키안도 추진 중인 SCO 개발은행을 서둘러 설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은 본질적으로 이 은행이 “경제적 수단을 무기로 사용하는” 세력으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한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유라시아 강국들은 브릭스의 은행인 신개발은행(NDB)보다 훨씬 더 독립적인 SCO 개발은행을 만들려 하고 있다. NDB는 정관 자체가 미국 달러 체제와 연계돼 있다.
NDB는 이미 6년 전부터 브릭스 비회원국에도 가입 문호를 열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일부 국가는 이후 브릭스 파트너국이 됐다. 현재 여기에는 알제리, 방글라데시, 콜롬비아, 우즈베키스탄, 짐바브웨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납입 약정 자본 규모는 고작 536억 달러에 불과하다. 글로벌 사우스를 위한 개발은행으로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SCO는 또한 SCO 에너지 협력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2030년까지 구체적으로 실행할 계획이다. 여기에는 여러 사업이 포함되는데, 그중 하나가 러시아에서 SCO 파트너국인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이어지는 바이칼의 힘 가스관이다. 이 사업은 과거 ‘시베리아의 힘 2’로 불렸다.
길을 건설하라 — 금융 시스템도 함께
이제 SCO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경제포럼을 연결해서 살펴보자.
시베리아, 북극, 러시아 극동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거대한 과제가 뒤따르는지 이해하려면, 매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핵심 토론 세션을 꾸준히 살펴봐야 한다. 이 지역의 개발은 국가안보 차원의 필수 과제이며, 블라디미르 푸틴이 직접 챙기고 있다.
가령 교통 회랑의 구조를 다룬 이번 토론을 보자. 여기서는 북극횡단 교통회랑(TATC)을 상세히 설명한다. TATC는 해상 운송, 철도, 도로, 그리고 시베리아의 주요 대하천을 하나로 연결한 통합형 복합운송 체계다.
러시아의 북극횡단 교통회랑(TATC) 지도
여러 측면에서 TATC는 역시 복합운송 체계인 브릭스 연계 국제남북운송회랑(INSTC)과 닮아 있다. INSTC는 러시아·이란·인도를 잇는다. 또한 중국이 동서 방향으로 구축한 여러 신실크로드 회랑과도 유사하다.
국제남북운송회랑(INSTC) 지도
러시아의 구상은 화물 흐름을 동쪽과 남쪽으로 돌리는 것부터 극동 지역을 새롭게 떠오르는 북극횡단 교통회랑(TATC)에 편입하는 것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전략적 계획은 이미 ‘러시아연방 북극권 및 북극횡단 교통회랑 통합 행동계획’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갖췄다.
그리고 여기서 북극(Arctic), 더 정확히는 중국이 시적으로 ‘극지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북극항로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핵심 토론에는 원자력 분야의 거대 기업 로사톰(ROSATOM)의 블라디미르 파노프(Vladimir Panov)가 참석했다. 북극 개발 특별대표이기도 한 그는 러시아의 북극 정책이 전략 자원 기반을 1년 365일, 하루 24시간 가동할 수 있도록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동시에 “북부 원주민의 전통과 생활방식을 보존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것”도 목표로 삼고 있다.
러시아는 복합적인 극동 전략의 일환으로 동부금융센터도 설립하고 있다. 알렉세이 모이세예프(Alexei Moiseev) 재무차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최근 러시아 금융시장에서 추진한 제도 개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연결 회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가 북극항로에 거는 승부는 다른 어떤 사업과도 비교하기 어렵다. 그 복잡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고객의 관심을 끌 만한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해운, 쇄빙선 지원, 항만 인프라, 정부 규제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푸틴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핵심을 곧바로 짚었다. 러시아는 극동과 북극을 전력망, 데이터망, 철도, 그리고 나토(NATO)의 통제 지점을 완전히 우회하는 극지 항로로 연결해 하나의 물리적 시스템으로 구축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TATC가 있다. 이 회랑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무르만스크에서 출발해 북극항로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고, 다시 아시아태평양 전역으로 뻗어 나간다. 요컨대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철도와 쇄빙 인프라, 에너지망을 엮어 대륙을 가로지르는 육상 교량을 만들고, 그 노선을 뒷받침할 금융 시스템까지 함께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국제남북운송회랑(INSTC)과 비교해 보자. 브릭스와 SCO에 함께 속한 세 나라는 이 회랑을 이용하면 워싱턴이 봉쇄할 수 있는 전략적 길목을 단 한 곳도 거치지 않고 서로 교역할 수 있다. 이란은 서방의 봉쇄 전략에 맞서는 더 큰 구도 속에서 러시아의 남쪽 관문 역할을 맡는다.
러시아와 중국, 생산적 투자에 전력
비슈케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온 결과를 함께 살펴보면, 유라시아가 ‘서방을 잊어라’라는 로드맵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듬고 있는지 보여주는 실질적인 사례가 줄줄이 드러난다.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 교수는 글로벌 사우스의 핵심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달러 표시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유라시아 강국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일대일로 참여국을 포함해 무역 및 투자 파트너들이 거래와 투자를 이어갈 수 있도록 신용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안이 실현되면 SCO와 브릭스 회원국인 중국, 러시아, 이란이 자금의 상당 부분을 공급하는 새로운 경제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체제에서는 “채권자가 중국의 일대일로와 같은 사업을 통해 공공 인프라 건설 자금을 지원하는 국가들의 경제에 지분을 확보”하고, 석유 의존 국가들은 “중국이 보증할 수도 있는 형태로 이란에 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다.
브릭스는 본질적으로 혁명적 조직이라기보다 개혁을 추구하는 협의체다. 그럼에도 SCO와 함께 다극화로 나아가는 움직임의 다자주의적 핵심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 주 후반 뉴델리에서 획기적인 돌파구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회의 테이블에 앉는 러시아, 중국, 이란은 비슈케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룬 진전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갈 길은 멀고 험하다. 미국 달러는 여전히 세계 외환보유액의 57%, 세계 수출대금 청구의 54%, 외환거래의 89%를 차지한다. 그러나 자국 통화와 상호 통화, 지역 통화를 이용한 무역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흐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와 중국, 러시아와 인도의 거래가 그렇고, 아세안 안팎에서도 같은 흐름이 나타난다. 범아프리카 결제·정산 시스템(도 성장하고 있다. 사례는 계속 늘어난다.
브릭스는 마침내 국경 간 금융 메시징 시스템을 활용해 자국 통화로 결제하는 자체 결제·정산 체계를 도입하기 직전까지 와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인프라 구축을 마무리하고 회원국들이 집단적 정치 의지를 결집해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이는 곧 무역과 금융거래에서 달러가 누리는 지배적 지위를 뒤흔든다는 뜻이다. 비슈케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얻은 교훈을 뉴델리에서 정교하게 다듬는다면,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다.
[출처] From Bishkek to New Delhi: Building a new Eurasia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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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페 에스코바르(Pepe Escobar)는 <더 크래들>(The Cradle)의 칼럼니스트이자 <아시아 타임즈>(Asia Times)의 편집장이며 유라시아를 전문으로 하는 독립 지정학 분석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